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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길고 지리한 싸움이었다. 지난 11월 9일 조춘화(41. 전 국민대노조 위원장) 씨는 해고 무효라는 대법원 판결이 확정되는 순간 지난 4년 간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요즘 대학들은 총장이 문제'

1997년 10월 2일 오후 2시. 국민대학교에서는 매주 목요일마다 정치인과 대학교수 등 저명한 인사를 초청해 목요 특강을 개최하고 있었다. 이날 목요 특강 연사로 초청된 인물은 숙명여대 이경숙 총장.

4년만에 복직 판정을 받은 조춘화 씨
ⓒ오마이뉴스 박수원
전두환 신군부 집권을 정당화했던 국가보위비상대책위 입법회의 의원과 노동법 개악 당시 노개위 위원을 지낸 이경숙 총장이 특강을 한다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국민대 노조 조춘화 위원장은 190여 명의 조합원들에게 뿌릴 '요즘 대학들은 총장이 문제'라는 제목의 유인물 200여 장을 준비했다.

특히 이경숙 총장은 숙명여대 노조와 3월부터 시작된 교섭을 해태시켜 10월까지 해결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유인물에는 숙명여대 총장뿐 아니라 사립대학 가운데 당시 문제가 되고 있던 서강대 총장(이상일)과 단국대 총장(장충식)이 거명돼 있었다.실명은 거론하지 않고 학교 이름만 언급한 채 말이다.

"물리력을 동원해 특강을 무산시킬 생각은 없었습니다. 학생들에게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인사를 목요특강에 데려오라는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겠다는 생각이 컸었는데..."

그런데 어떤 이유 때문이었는지 그날 목요특강은 취소됐고, 조춘화 씨는 학사행위 방해죄로 징계위원회에 회부됐다. 당시 조춘화 씨는 그 해 6월 대학노조로는 드물게 20일 동안이나 파업을 진행한 전력때문에 학교에 미운 털이 박힌 상태였다.

징계위원회 결과는 해고. '해교 행위'와 '명령 불복종에 의한 행정질서 파괴'가 해고 사유였다. 98년 1월 16일 해고가 결정된 이후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지긴 했다. 재심위원회에서 학교는 구체적인 사과와 그에 걸맞는 행동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개인적으로 목요특강 취소에 따른 책임은 질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학교는 저에게 노조 활동과 외부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요구하더군요. 노조 활동은 헌법에 보장된 권리인데 각서를 쓰라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재심위 결과도 역시 원심과 같은 해고. 해고가 확정된 4월 13일부터 조춘화 씨는 비슷한 시기에 재적된 대학원 총학생회장 원동업 씨와 천막 농성에 돌입한다. 원동업 씨는 학내에서 벌어진 교수 성폭행 진상조사와 민주제단체 협의회 구성을 요구하는 등 조춘화 위원장과 함께 학교에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천막농성을 시작한 지 10일째 되는 날 새벽 5시. 대학노조 간부들과 총학생회 간부들이 함께 대책회의 후 잠을 자는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보직교수, 학교직원, 수위 등 50명이 넘는 사람들이 천막을 에워싸고 칼로 천막을 철거하려고 작업을 시도하고 있었다. 천막은 30분만에 허물어졌고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무너진 천막 위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그러나 곧이어 출동한 성북 경찰서 소속 경찰들에 의해 연행됐다.

"성북 경찰서에 연행됐다가 바로 그날 전원 석방됐어요. 경찰서에서도 왜 연행했는지 이유를 잘 몰랐으니까요. 학생들은 학교 요청에 따라 공권력이 들어왔다는 사실에 분노했고, 그 사건 이후에 우리 싸움에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게 됐습니다."

4월 13일부터 진행된 천막농성은 8월 28일까지 138일 동안 계속됐다. 그 해에는 왜 그렇게 비가 많이 오고, 바람도 많이 불던지 조춘화 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물 위에 둥둥 떠서 잠을 잤던 기억 밖에 없다"고 말했다.

물위에 둥둥 떠서 잠을 잤지만 자신의 싸움에 지지를 보내준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는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천막 농성 당시 노조 위원장 선거를 진행했었죠. 학교에서 내세운 후보가 있었는데 조합원들이 저를 위원장으로 뽑아주더군요. 학교 압력이 만만치 않아 당선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정말 눈물겨운 선거였습니다."

현승일 총장 낙선운동

천막농성 이후에는 부당 해고에 대한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의 구제신청이 진행됐다. 그러나 결과는 모두 "학교측에 책임이 없다"는 내용. 결국 민사소송을 통해 1999년 11월 25일 1심에서 "해고 처분은 지나치다"는 판결을 얻어냈다. 그러나 학교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조춘화 위원장을 해고시켰던 장본인인 현승일(현재 한나라당 국회의원) 총장은 해고 무효라는 판결이 나왔지만 항소를 하고 4.13 총선을 위해 총장직을 물러났다.

"현승일 총장은 정치적 야심이 많았던 인물입니다. 8년 가까이 국민대학교 총장으로 있으면서 정치대학원을 만들었고 그곳에 정치인들을 대거 데려와 특강을 진행하기도 했었죠. 아니나 다를까 임기 8개월을 남겨두고 국회로 들어갈 준비를 하더군요. 제 문제는 해결도 하지 않은 채 말이죠."

"4년 동안 싸우느라 흰 머리가 늘었습니다"
ⓒ 오마이뉴스 박수원
이후 조춘화 씨는 현승일 총장이 후보로 출마한 대구 남구로 내려가 낙선운동을 진행했다. 총선연대에 자료를 늦게 넘긴 탓에 현승일 씨가 낙선자 명단에서 누락하긴 했지만 대구지역 총선연대와 함께 활동을 시작했다.

"대구 총선연대와 함께 기자회견을 진행하는 날이었습니다. 선거 막바지라 그랬는지 지역신문과 방송이 모두 관심을 보였어요. 그런데 갑자기 대구 남구 청년당원들이 오더니 불법이라고 기자회견 자체를 무산시키려고 시도하더군요."

그는 현승일 씨 선거 담당 사무장 고소로 검찰에 명예훼손과 선거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했다. 물론 무혐의 처리됐지만 말이다.

해고와 관련된 대법원 선고는 끝났지만 조춘화 씨는 국민대학교 직원과 여전히 법정소송을 진행 중이다. 학교 인사담당 대리 구아무개 씨는 그가 해고 무효 민사소송을 내자 97년 당시 상황과 다른 진술을 하기에 이른다.

인사 담당 대리 구 아무개 씨는 "조 씨가 목요특강 취소를 목적으로 학생들을 선동하기 위해서 1000부가 넘는 대량 인쇄물을 배포했다"는 것. 조춘화 씨는 구 씨가 재판을 왜곡시켰다고 고소를 했지만 오히려 무고죄로 고소인에서 피의자로 신분이 뒤바뀌게 됐다.

"위증한 사람은 그대로 두고 저를 무고죄로 조사하겠다는 검사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사람들이 왜 기를 쓰고 이민을 가려 하는지 그 심정을 알 것 같았습니다."

이 재판도 결국 2001년 4월에 승소했다. 그러나 검사는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다시 항소해 놓은 상태. 이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국민대학교 총장으로 임명된 정성진 총장은 24년간 검사로 재직하면서 중수부장까지 지낸 권력자로 교수 임용 4년 5개월만에 대학총장에 임명된 인물. 정성진 총장은 11월 15일 진행된 이 재판에 구 아무개 씨의 진술을 뒷받침하기 위해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했었다.

조춘화 씨는 1명도 아니고 3명이나 되는 대학총장들과 참으로 길고 힘겨운 싸움을 진행했다. 이경숙, 현승일, 정성진. 긴 시간을 보내면서 그 역시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해고될 당시 초등학교 5학년, 초등학교 3학년이던 아들과 딸이 이젠 중3, 중1이 됐습니다. 올해 초 중1 딸이 심장병에 걸려 걷지도 못할 상황이 됐을 때 한 번도 그런 말 한 적 없던 아내가 '여보 그만둡시다'라고 하더군요. 지금이야 딸 상태가 많이 나아졌지만 그 때는 복직이고 뭐고 모두 정리하고 싶었죠."

조춘화 씨는 현재 대학노조 사무처장으로 재직중이다. 오랜 해고 생활 가운데 대학노조는 그에게 큰 버팀목이 됐다. 얼굴도 모르지만 후원금을 보내주는 후원인이 있었고, 변호사비 보태라고 1일 주점을 열어주는 동료들이 있어 그는 외롭지 않았다.

"끝까지 지켜봐준 대학노조 동지들과 가족들에게 무엇보다 고맙지요. 대학 당국이 노조 활동가를 함부로 해고시키면 큰 코 다친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으로 동지들에게는 감사함을 대신하고 싶습니다."

유인물 한 장 때문에 4년 세월을 힘겹게 보내야 했던 조춘화 씨. 힘 있는 권력과 지리한 세월도 그의 신념 앞에서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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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오마이뉴스 정신을 신뢰합니다. 2000년 3월, 오마이뉴스에 입사해 취재부와 편집부에서 일했습니다. 2022년 4월부터 뉴스본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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