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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제 약속한 대로 '정신분석학적 접근이 필요한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할 차례이다.

<월간조선> 우종창 기자는 또 하나의 편향적인 왜곡보도를 하는데, 여순사건 당시 종군기자였던 이경모의 사진 중에서 자신의 주장과 논거에 유리한 것만을 가져다가 소개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 기자의 기사 중 이 문제의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단장취의(斷章取義)'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단장취의? 일반인들이 자주 쓰는 말이 아니라 무슨 대단히 유식한 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냥 거두절미(去頭截尾), 아전인수(我田引水) 정도의 말로 보면 될 것이다.

사실 이 말은 소설가 이문열 씨가 최근에 한번 써먹으면서 세인의 주목을 받았거니와, 자신의 옛 칼럼에 대해 추미애 의원이 뼈있는 비판을 하자, 글의 전체 맥락을 보지 않고 유리한 뜻만 취해서 남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동원한 말이었다.

자, 그렇다면 지금부터 생생한 실제사례를 통해 '단장취의'의 진정한 사회적·역사적·문학적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기로 하자. 그런 의미에서 이문열 씨까지 함께 이 글을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 월간조선 우종창 기자가 인용한 '아기를 업은 여인이 경찰관 남편의 시신을 찾고 있는' 사진.
ⓒ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


우종창 기자는 <월간조선> 2001년 10월호 기사에서 "여수시 탈환작전 때 종군기자단은 군을 따르고 있었다. 전 호남신문 사진부장 이경모 기자도 종군기자의 한 사람이었다"고 언급한 뒤 다음과 같은 단정적 표현을 썼다.

"그가 찍은 한 장의 사진, 아기를 업은 채 경찰관 남편의 시신을 찾고 있는 사진은 이 사건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월간조선> 우종창 기자는 실제로 이 사진을 자신의 기사 첫 페이지에 소개하기도 했다. 사실 이 사진은 여순사건과 관련해 반란군에 의한 양민학살을 설명해주는 증거자료로서 단골로 소개돼 왔다.

그런데 원래 이 사진의 출전은 이경모 사진집 <격동기의 현장>이다. 이 책의 66쪽과 67쪽, 두 면에 걸쳐 문제의 이 사진이 수록돼 있다.

▲ 우종창 기자가 인용한 사진 바로 뒤쪽에 실려있는 '경찰이 후퇴하면서 무차별 학살한 좌익사상범 용의자의 시신앞에서 오열하고 있는 여인' 사진.
ⓒ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
그런데 이 사진 바로 뒤쪽에는 전혀 반대 성격의 사진이 무려 7장이나 실려 있다. 그리고 이경모는 그 사진에 다음과 같은 설명문을 붙였다.

"경찰은 반란군에 쫓겨 후퇴하면서 가둬두고 있던 좌익 사상범 용의자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갔다. 서울대 법대에 다니다 고향에 내려와 은신하고 있던 김영배(당시 21세)가 그런 희생자 중의 하나였다. 그의 가족들이 광양과 순천의 경계에 있는 덕내리 골짜기에서 아들의 시신을 찾아내 거두고 있다."

특히 이경모는 이 7장의 사진 중 1장, '멍석으로 둘둘 말아 지게에 올려진 동생의 시신 앞에서 울부짖는 누나'의 사진을 <격동기의 현장>의 표지에 실었다.

물론 여순사건을 달랑 국사교과서 수준의 단순한 역사인식만으로 바라보고 싶어하는 듯한 우종창 기자로서는 대단히 섭섭했겠지만, 이경모는 정작 이 사진이야말로 여순사건의 본질적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여순사건의 본질적 성격은 무엇인가?

▲ 경찰에 의해 희생된 좌익사상범 용의자의 사진을 표지로 사용한 이경모 씨의 사진집 <격동기의 현장>
나는,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한 남녀노소 백성들이 좌우대립 속에서 국가폭력에 의해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야 했던 비극의 역사라고 정의를 내리고 싶다. 이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듯하다.

외신기자 칼-마이던스도, 합동통신 설국환 종군기자도, 우익성향의 합리적 군인 강영훈 중령도, 유건호 조선일보 종군기자도, 조선일보에 기고한 소설가 정비석도, 여순사건이라는 한국현대사의 격랑 한가운데 서서 직감적으로 느꼈을 터인 여순사건의 본질적 성격이다. 그것은 앞의 연재기사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들이 당시 남긴 기사나 발언의 행간에서 그대로 묻어난다.

<물론 당시에도 극우신문 평화일보 사장과 기자들, 베스트셀러 소설가 박종화 등과 같이 여순사건에 대해서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고 무서울 정도로 단순한 사람들은 있었다. 그들의 글을 읽다 보면 요즘의 어떤 매체와 기자들, 그리고 어떤 베스트셀러 소설가 등과 같은 '가당치 않은 ×'(추미애 의원의 표현을 빌렸음, 여기서 '×'는 한자 '者'의 우리말뜻을 가리킴) 혹은 '가당치 않은 분'이 연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야만의 시대에는 싱싱하게 젊다는 것도, 남보다 많이 배웠다는 것도 죄(?)가 되었다. 고향인 전남 광양에 내려와 있던 서울법대생 김영배 군이 속절없이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 했던 이유도 바로 그랬다.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았을 잘난 아들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유족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유족들의 심정이 된다면, 누구나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낄 것이다.

이와 관련, 김영배와 친구 사이였던 이경모는 나중에 자신의 회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서로 잘 아는 사이로 결코 공산당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의 대학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고향에 내려와 공부를 하다가 대학 사정이 좀 안정되면 다시 상경하려고 생각하고 있다가 좌익 사상범 용의자로 광양경찰서에 예비검속되어 반란군에 쫓겨 후퇴하던 경찰관에 학살당한 것이었다."

이경모는 이렇게 증언한 다음 "나는 친구의 시신을 거두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고 계속 사진을 찍으면서 마음속으로 '미안하다, 영배야'를 몇 번이고 외쳤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이 대목을 읽다가 그만 콧등이 시큰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경모라는 분이 진정한 기자였구나, 한국언론이 급여수준 등 처우는 옛날보다 좋아졌는지 모르지만 기자정신으로 따진다면 도리어 1940∼50년대보다 훨씬 후퇴한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기자가 현장에 가지 않고는 사진을 찍을 수도 없을 것이며 독자들에 대한 배반이다'는 생각을 가지고 위험을 무릅쓰고 여순사건에 종군한 이경모는 진압군 뒤를 따르면서도 반란군과 진압군의 특정한 시각을 고집하지 않고 자신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묘사했다.

특히 그의 회고문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우리는 그의 기자로서의 편견 없는 중립적 시각을 읽을 수 있다. 다소 내용이 길긴 하지만, 우종창 기자는 꼼꼼하게 읽어보기 바란다.

▲이경모 씨
"(1948년 10월) 23일에는 고향(광양)에 계시는 부모님과 형제들 생각이 떠올라서 오후에 무작정 순천을 떠나 광양까지 11km를 걸어가게 되었다. 걸어가는 도중의 도로변에는 수많은 시신들이 널려 있었다. 이때 나는 눈뜨고 볼 수 없는 경찰관과 반란군들의 처참한 시신들 사이를 헤치며 남편의 시신을 찾고 있는 아이 업은 젊은 부인의 모습을 촬영할 수가 있었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총성은 나로 하여금 광양까지 가는 것을 그만두고 다시 순천으로 되돌아갈 생각을 하게도 하였으나 육친간의 정이란 것이 그리 간단히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실감하였다. 나는 계속 정신없이 광양을 향하여 한 발 한 발 속도를 더하여 빨리 걸어갔다.

광양과 순천 경계 부근에서 통곡하고 있는 친구의 어머님과 누나 그리고 동생을 만났다. '왜 울고 계시느냐'고 물어도 대답을 안 하던 친구 어머님이 한참만에 손으로 도로 옆 골짜기를 가리켰다. 이상한 예감이 들어 골짜기로 뛰어들어가 보니 손아래 친구 김영배 군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그 집 머슴이 두 손을 뒤로 묶인 채 총살당한 김군의 시신을 거두고 있었다."


우리는 이경모의 '편견 없는 시각'을 통해, '경찰관 남편의 시신을 찾고 있는 아이 업은 젊은 부인'의 안타까운 모습도 볼 수 있었고, '쫓기는 경찰에게 두 손을 뒤로 묶인 채 총살당한 대학생'의 처참한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죽음을 무릅쓰고' 찍은 이 두 장의 사진은 수십 년이 흐른 뒤 여순사건을 상징하는 '역사의 기록'이 되었다.

아울러 우리는 그의 생생한 증언에서, 젊은 부인이 헤매던 벌판에는 경찰관의 시신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반란군의 시신도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지난 10월 20일 여수지역사회연구소(소장 이영일) 현장조사팀(팀장 박종길)이 주관한 현장답사에서, 당시 벌판에 널려 있던 시신이 실제로는 반란군과 경찰군이 순천 시내에서 개천을 사이에 두고 교전을 하다 희생된 사람들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경모는 결코 '외눈박이'가 아니었다. 편견을 가지고 자신에게 유리한 것은 확대·조작하고 불리한 것은 축소·은폐하는 '기자의 양심을 저버리는 행동'을 결코 하지 않았다.

그의 회고문에는 해방정국과 정부수립 당시의 상황을 편견 없이 기록한 대목이 수없이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그의 글은 더 리얼하고 설득력이 있다. 사진기자로서 해방 1주년을 취재하러 가면서 느꼈던 점을 기록한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자.

"해방 1주년을 맞이하는 1946년 8월 15일은 1년 전 온 국민이 한 마음으로 해방의 기쁨을 나누던 때와는 달라져서 기념식장 취재를 가는 나의 마음은 무척이나 아팠다. 정치계는 벌써부터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져서 싸우고 있었으며 항간에는 서북청년단이라고 불리는 이북 출신 젊은 대원들이 설치고 다니고 있었으며 백주에도 테러가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었다."

우리는 이경모의 사진과 글을 보면서, 그가 혼돈과 대립의 격동기 속에서도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던 참 언론인이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그래서였을까. 이경모 사진집 <격동기의 현장>의 뒤 표지에는 한 사진작가의 이런 발문(跋文)이 적혀 있었다. 특히 우종창 기자는 엄숙한 마음으로 정독해 보기 바란다.

"이경모의 사진들은 이미지의 힘을 통해 8·15해방에서부터 여수·순천사건을 거쳐 6·25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고리들을 우리의 눈앞에 또렷이 부각시켜 준다. 물론 사진이 항상 진실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사진이 진실을 말해주는 경우는 어떠한 편향된 의도나 오해에도 물들지 않고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할 때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경모의 사진들은 감동적이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하며, 때로는 우울하기도 한 여러 장면들을 통해 역사적 진실을 편향 없이 보여준다."

이 발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사진이 진실을 말해주는 경우는 어떠한 편향된 의도나 오해에도 물들지 않고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할 때이다"라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월간조선>과 우종창 기자는 이 사진집에 실린 사진들을 어떻게 이용했는가? 그들은 선배 언론인이자 사진기자가 '편향 없이 객관적 입장을 견지한 채 기록한 역사적 진실'마저 '단장취의(斷章取義)'하여 '편향되게 악용하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여주었다.

내가 <월간조선>의 보도태도와 우종창 기자의 글쓰기에서 어떤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동정심을 동시에 느끼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우종창 기자는 1998년에도 최장집 고려대 교수에 대한 '사상검증'을 벌인 전력이 있다.

최장집 교수가 누군가? 당시 그 '마녀사냥'에 차출되어 부역한 바 있는 최 교수의 대학 제자인 이한우 조선일보 기자는 자신의 책 <우리의 학맥과 학풍>에서 최 교수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높게 평가한 바 있다.

● "80년대 정치학자 중 거의 유일하게 학문적 성과에 있어서 자기 영역을 확보한 학자."
● "경제결정론에 빠지지 않고 한국의 민주화라는 문제를 축으로 놀라운 탄력성을 보여왔다."
●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국내에 가장 일찍 소개하고 네오마르크스주의 국가론에도 기울었지만 그 이론들을 '신봉'하거나 그것들에 '탐닉'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렇다면 우종창 기자는 '특정한 이론을 신봉하거나 탐닉하지 않는 탄력적인 사고의 소유자인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학자'에 대해 어떻게 감히 '사상검증'을 벌일 생각을 했을까? 그에겐 도대체 어떤 비장의 방법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당시 <시사저널> 서명숙 기자(현 편집장)는 <시사저널> 11월 5일자에 게재한 칼럼에서 우 기자의 비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부한 바 있다.

"전제와 결론을 잘라 내고 '필요한 부분만 인용하는' 과감함과, 그렇듯 거두절미한 대목에 대해 논리적 비약과 이데올로기적인 편향성으로 해석하는 지적 횡포."

단장취의와 사상검증. 우리는 언제나 이런 후진적 행태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합리'와 '이성'은 감히 욕심도 내지 않을 터이니 그냥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라도 왔으면 좋겠다.

아, 이문열 씨. 왠지 오늘 저녁은 술병과 잔을 끌어당기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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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