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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8월 17일 오전이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1층 로비로 내려가는데 낯익은 분들이 보여 황급히 뛰어내려갔더니 바로 장기수 분들이었다.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2001 민족통일 대축전」과 관련하여 평양을 방문한 지 3일 째 되는 날이었다. 우용각, 함세환, 김창원, 홍명기 씨등이 숙소인 고려호텔에 오신 것이다.

최근 '총각 장기수 선생, 장가갔다'는 문화방송 보도의 주인공 함세환 씨에게 결혼 축하 인사를 드렸다. '새신랑'은 수줍은 듯 환한 미소로 결혼 소감을 대신했다. 이어 도착한 홍경선·황용갑 씨 등 모두 6명의 장기수분들과 고 이종환·윤용기 씨의 묘소로 참배를 가게 됐다. 우용각 씨는 내 손을 잡으며 당신 차를 타고 가자 했다. 그분들이 잠들어 계신 묘지, 애국열사릉으로 가는 차안에서 우 씨는 두 분의 마지막 모습을 들려주셨다.

▲애국열사릉

"윤용기 선생이 서울에 있을 때 한번 쓰러지지 않았나. 여기 와서 좋은 약 다 쓰셨는데, 고질병이야. 협심증, 부정맥에다가 심장판막…. 그 날 내가 윤용기 동지 집에 가서 얘기하고 헤어지는데, 갑자기 고개를 팍 숙이더라고. 입에서 거품이 나. 구급차를 불렀잖아. 한 7분만에 도착했어. 큰 병원으로 갔는데 관상동맥이 맥혔대. 약물을 투여해 한번 뚫었어. 그런데 그 약은 24시간 이내는 또 못 쓴대요. 그러다 또 막혀…."

"이종환 선생은 간암 진단 받았잖아. 여기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 많이 했지. 의사와 간호사가 완전히 붙어 있었지. 식사 못한 게 수 십일 되는 것 같아. 순 영양제주사로 버텼지. 본인이, 이제 많이 살았다고 하면서…. 우리 동무들 기질 있잖아. 의사들이 만류해도 요지부동이었어. 본인 요구를 들어주자 그래 가지고서…. 의사도 얼굴이 반쪽이 됐어요."

이윽고 묘지에 도착했다.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작년 10월 고려호텔에서 두 분을 뵈었던 순간이 생각났다. 헤어질 때 차 창 밖으로 손 흔들던 이종환 씨의 모습과 윤용기 씨가 힘주어 하셨던 말씀, "다시 만나야 돼"라 했던…. 그런데 이렇게 문상을 오게 될 줄이야. 선생님 부디 평안 하소서.

우리 일행은 또 다른 열 두명의 장기수 분들이 기다리는 인민문화궁전으로 향했다. 소문대로 그들은 바쁜 나날을 보내고 계시는 듯 했다. 오전에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분들이 호텔로 오셨고 다른 일정이 있었던 분들은 점심시간에 인민문화궁전으로 모인 듯 했다. 그렇게 모두 열 여덟 분들을 만나 담소를 나누고 점심을 먹으러 고려호텔로 향했다. 호텔로 가는 차안에서 우용각 씨에게 가족상봉 소감을 여쭤보았다. 그는 "아주 단란하게 잘 지낸다."고 했다.

(40년 헤어져 있다가 만나니 어떻냐는 질문에) "어른 품위를 지키지 못해. 할아버지 노릇을 해보지 못했으니까 그렇지만 뭐. 상당히 화목하게 지내. 할아버지 노릇 하는 것도 어렵더라고." (그럼, 남편노릇은 잘 하세요 라고 묻자) "그렇지. 잘 한다고 봐야지." 이 말에 동승한 운전사·안내원 등 다 같이 웃다보니 호텔에 도착했다. 그 날의 메뉴는 평양냉면이었다. 면발보다 질기고 긴 우리들의 인연과 우정, 그리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두고 온 가족들, 남녘의 벗들에게

그들은 내가 가져간 비디오 카메라를 향해 두고 온 가족과 남녘의 벗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민가협 어머니들, 우리 잊지 않습니다. 임기란 회장님을 비롯해서 성철이, 김호 엄마, 그리고 서경순 어머니…. 우리 식구들 뿐 아니라 북쪽에 있는 인민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민가협 어머니들 얘기합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 싸운 얘기들. 헤어질 때 헤어짐이 만나기 위한 첫발이란 약속했지요. 이제 병은 거의 다 나았어요. 이렇게 건강하다고요. 죽을 수 없어요. 남쪽의 어머니들에게도 보답을 해야하고. 어머니들, 민가협 간사들 희생적으로 싸우던 모습들 잊어지지 않아요. 그리고 우리 어머니한테, 힘내시고. 어서 오셔서 아들집에서 여생을 보내시길 바란다고. 다 잘 살고 있으니까 여기 걱정하지 마시고 힘내시고. 건강하면 다시 만날 거예요."(신인영)

"사랑하는 양귀련. 그 동안 몸 성히 잘 있었느냐. 나 역시 건강히 잘 있다. 나는 지금 평양에서 나의 아들과 며느리, 손녀, 손자와 행복하게 잘 있다. 네 소식을 알고 싶어 외국에 있는 막내 동생에게 편지를 했으나 회답이 없다. 알 길이 없던 차에 남 총무를 만나 이렇게 전하게 되니 내 마음 한량없이 기쁘다. 아무쪼록 몸 성히 잘 있길 바란다."(양정호)

▲김선명 씨에게 선물로 받은 결혼사진.
카메라에 대고 서로 인사를 전하느라 앞다투는 가운데 멀찍이 차례만 보고 계시던 김선명 씨를 발견하고 다가가 "결혼식 초대도 않고 서운했어요"라 했더니 "그래서 여기 올 때 사진을 갖고 왔지" 하며 결혼사진을 선물로 주셨다.

"젊었을 때 친구들하고 서로 언제 결혼하나 하면서 통일시킨 다음에 결혼하자 했지. 작년 12월 6일 결혼했어. 아내 덕분에 중학생인 아들도 얻었어.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지."

김 씨는 출옥 후 남쪽에서 단 한번 만나 보지 못했던 동생에게도 안부를 전했다.

"지금도 여기 와서 생각해. 동생들이나 나나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니고 분단 때문이야. 나 (연좌제) 때문에 많이 당했어. 통일된 담에 또 그 전에 서로 왕래할 수 있으면 내가 남쪽에 가서 동생들을 만나든지 동생들이 북쪽으로 와서 서로 만나든지 그렇게 되리라 생각하고 있어. 동생들 건강하길 바래."

또한 그는 "민가협 어머니들 임기란, 송갑석, 임종석 어머니 모두 안부를 전해주고 인사도 변변치 못하고 왔노라고 전해주고. 안학섭·임방규 선생들이랑 정순덕 선생에게 안부 전해주고"라며 그 '전해주고'란 말을 한없이 했다.

헤어질 시간이 왔다. 남녘에 아내를 두고 온 분들은 그리움을 애써 참으며 인사를 전했다.
"우리 할마이 몸도 약하고 그런데…. 건강에 유의해주고."(김영만)
"나 건강하게 잘 살고 있으니까 돌아갈 때까지 건강하기 바래요, 제발. 건강해야 돼요."(이두균)

그들은 타고 왔던 차에 다시 몸을 실었다. 차가 떠나려는 순간 운전석 맞은 편에 앉아있던 함세환 씨가 차창을 내려 악수를 하자 하셨다. 그 뒤편에 앉았던 김선명 씨는 다시 차 문을 열고 나오셔서 나를 부둥켜 앉고는 다시 만나자는 말만 되뇌이셨다. 그리고 그들은 떠났다.

"선생님 지금 어디 사세요?"

그로부터 이틀 후인 8월 19일. 그날 보지 못한 장기수 분들을 만나게 되었다. 지난번에 못 나오셨던 분들이 일부러 시간을 내신 모양이었다. 모두 34분이었다. 인민문화궁전에서 만나 평양 단고기 집에서 점심을 함께 했다.

김동기 씨는 돌 하나를 쥐어주며 "성묘하러 갔다가 우리 고향 돌을 하나 가져왔어. 고향 돌을 가져가십시오"라 했다. 그 돌에는 함북 성진이라고 쓰여 있었다.

둘째 날 만남은 더 많은 분들이 오셔서 그런지 왁자지껄했고 활기가 흘러 넘쳤다. 나 역시 마음의 여유가 생겨 좀더 구체적으로 근황을 물을 수 있었다.

그들은 두 군데 나눠 살고 있었다. 가족이 살아 계신 분들은 고려호텔 앞 창광 거리에 있는 '동동'에서(38세대. 윤용기 씨는 여기서 사셨다), 지금은 결혼을 했지만 총각들과 홀로 되신 분들은 보통강 유역 '안산'에서 살고 계셨다.(23세대. 이제 이종환 씨는 없다)

"비전향장기수 아파트라 하지요. 주소는 평양시 중구역 동동 12반인데 나는 10층 2호삽니다."(최하종) 리경찬 씨에게 물었다. "나도 같은 동, 김동기 선생과 옆집에서 살아요." (사모님은 살아 계신가요?) "난 있는데, 김동기 선생은 없어. 아들과 살아요. 나는 처와 딸, 사위, 손자, 손녀 모두 6식구가 함께…." 박완규 씨는 4남매가 잘 커줘서 고맙다며 동동 18층 2호에 산다고 했다.

아내와 상봉한 분들은 저마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했다. 최하종 분은 "마누라도 살아있고. 요새 꿈만 같애. 아내와 서른 살에 헤어졌는데 72세가 되어 백발이 되어 돌아왔잖아요. 그때 100일 밖에 되지 않던 아이가 마흔 둘이 되어 있고. 장기수 아내들은 30, 40년을 기다려 이제 할머니가 됐습니다"라고 했다.

"결혼식 초대 못해 죄송합니다"

"12월 6일에 결혼했습니다. 어머니들 모두 초청하려 했는데 사정이 여의치 못해 죄송합니다. 처와 사는 모습 보여주고 싶은데, 아쉽습니다. 민가협 그리고 모든 분들 통일되는 그날까지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 뵙기를." 또 다른 총각 장기수 이재룡 씨의 인사였다.

그런데 경사는 세 분만이 아니었다. 이세균 씨는 "서울에서 항상 내 결혼을 걱정했던 분이 있었는데"라며 "나, 결혼했어. 6월 8일에. 그 분에게 알려주면 좋아할 것 같아서"라며 결혼소식을 전했다.

"민가협 어머니가 제일 보고 싶어"라던 유운형 씨는 누구랑 사시냐고 물으니까 "가족이 다 죽고 누이동생 하나 있는데. 이젠 아내랑 살아"란다. 결혼하셨냐니까 "결혼한 거지 뭐. 작년 11월 13일인가"라며 겸연쩍어 하셨다. 한장호 씨도 결혼을 하셨다 했다.

"민가협 어머니들은 모두 애인이야"

그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바람이 있다면 남쪽의 고마운 분들을 죽기 전에 꼭 한번 찾아 뵙고 인사드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휠체어를 타고 나오신 이종 씨는 "건강히 지내시라"고 인사를 전해 달라 했다. 뒤에서 휠체어를 끌던 이종 씨의 며느님도 카메라에 대고 "며느리 인사도 전해주세요"라 했다. "선생님들이 우리 아버님 잘 돌봐주셔서 이렇게 건강하게 북에 돌아오셨다"고 덧붙이면서.

"1년이 다 되어 갑니다. 내 가족이 18명인데 항상 남쪽 얘기를 해요. 아들녀석은 '아, 남쪽에도 참 좋은 분들 많군요. 아버지, 꼭 이담에 찾아 뵙겠습니다'라고 해요. 민가협 어머니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하시고…."(이공순)

그들은 소식을 전하고 싶은 마음에 경쟁을 하기도 했다. 김인수 씨가 카메라에 대고 "민가협 어머니 모두에게 안부 전합니다. 그곳에 있을 때 여러 가지 많은 신세를 지고 인사도 못하고 와서"라 하자 옆에 있던 최하종 씨가 "내 이름도 좀 전해 줘요"라 했다. 그러나 김 씨가 "그리고 앞으로 또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리라 봅니다. 부디 모든 어머니들이 건강하게 잘 지내시라고 축원하겠습니다"라며 자신의 인사만 계속하자 최 씨는 "내 이름도 전해 달라니까" 하며 재촉하자 "최하종이도 인사 전해달랍니다"라고 해 다 함께 웃었다.

장병락 씨는 "어머니들과 시위도 하고 수련회도 하고 그 때 생각이 자꾸 떠오릅니다.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민가협 어머니들과 동지들이 그리워집니다. 아들 며느리 손녀하고 특히 조순덕 여사에 대한 얘기 많이 해요. 빨리 통일이 돼서 얼싸안고 춤을 출 수 있기를. 부디 건강하십시오"라 했다. 이어 장 씨가 "조 여사는 내 애인이야"라고 혼잣말을 하자 옆에 있던 안영기 씨는 "민가협 어머니들은 다 애인이지" 라고 응수해 박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장 씨는 "목요집회에 내 자리 하나 남겨 놓으라"는 당부도 했다.

▲인민문화궁전앞 단체사진.


"우리 집에 오셔서 된장국이라도 드셔야 하는데"

단고기 집에서 밥을 먹는데, 이공순 씨는 집으로 초대를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아침에 집사람에게 여기 온다고 하니까 '남쪽 분들이 당신을 살렸는데 우리 집에 와서 된장국이라도 먹어야지' 하며 같이 오라는 거예요. 남 총무, 우리 집에 가야하는데 이거 미안합니다. 이담에 우리 집에 와서 밥도 먹고…."

또 다시 그들은 카메라를 향해 두고 온 동지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특히 북쪽에 와서 만난 남쪽 장기수의 자녀들과 상봉한 소식이 이어졌다.

"박종린 동지. 따님하고 손녀하고 우리 집에 왔다 갔습니다. 따님은 왜 우리 아버지가 오지 않았는가 해서, 박 동지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서 그것을 마치고 요다음 기회에 모도 올 때 올 것이다 이렇게 얘기해 줬어요. 부인은 돌아가시고 따님은 통일 거리에 있는 도서관에서 사서하고 있고. 손녀는 고등학교 나와 대학 가려하고 있고. 따님은 우리 딸이랑도 연락하고 있는데 며칠 내로 우리 집에 오기로 했습니다."(김인수)

"영식이(김영식), 그 동안 잘 있었는가. 내 처도 죽고 네 처도 죽었단다. 그러나 네 자식들은 행복하게 부럼 없이 잘 살고 있어. 아이들 걱정 말고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고."(장병락)

보고싶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던 그들은 갑자기 고성화 씨가 생각났는지 이구동성으로 안부를 전했다.
"고 선생, 작년에 안 오셨는데 꼭 오세요. 안 오면 끌고 옵니다."(김은환)
"송환 희망자 명단 중에 이름이 첫 번째인 것 봤는데, 평양에서 만나길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습니다."(안영기)
"영감님 오래 사십시오."(김동기) (다같이 웃음)
"고성화 영감 안 오면 혼난다 그래."(최선묵)

'꼭 전해 달라'는 말이 수도 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지면이 좁아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진 씨가 하신 말을 빼 놓을 수 없다.
"내 아내에게, 이름이 김경자거든요, 전해 주세요. 저는 건강하고 잘 있습니다.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그리고 역시 남에 아내를 둔 이경구 씨가 한 말이 가슴에 남는다.
"'난, 내 처를 영원히 사랑합니다' 이걸 꼭 전해주기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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