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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 옆 사범대 1호관. 여기 벽화가 있다. '광주민중항쟁도'이다. 도청으로 모여드는 사람들. 그들 손에 쥐어진 7자루의 총. 최후까지 남아 목숨 걸고 전남도청을 지키던 시민군, 해방광주. 백두산 천지와 통일·민족해방. 색 바랜 그림에 담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2001년 이 벽화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벽화에는 그려진 당시의 정치·사회·역사적 시대상이 반영되어 있다. 의미를 다시 찾는 것은 이야기를 창조하는 것이라 했던가. 우선 그 올바른 의미를 찾기 위해, 80년 5월부터 이 벽화가 그려진 1990년도 상황까지 되짚어 보자.

"오늘날 한국 사회는 신 식민지 반봉건사회로 규정할 수 있으며 시민혁명을 통해 민주화와 통일로 나가야 한다"- '민족민주대성회(1980년 5월 8일~16일)'성격을 규정한 전남대학생운동진영 내부 문건 <자유>중에서.

80년 광주민중항쟁은 부당한 권력에 맞선 자발적인 무장투쟁이었다. 하지만 민중들의 무장봉기는 신군부와 언론(조선일보 등)에 의해 불순분자와 간첩이 조종한 '시민폭동'으로 규정된다. 이는 이회성 당시 계엄사령관의 담화문(80년 5월23일)과 언론의 보도에 의해 '폭동·난동'이라는 극도로 통제된 정보조작이 펼쳐진 결과이다. 정권찬탈과정에 광주를 이용한 신군부의 잔혹성과 폭력성을 감추기 위해 또다시 반공이념을 이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대 한국 사회 정치변동에 있어서 광주민중항쟁은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광주민중항쟁은 미국의 본질과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중요한 사건인 것이다. '한국 사회에 있어 미국의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제기된 것이다. 이것은 한국의 민주화와 민족통일이 각기 다른 과제가 아니라 미국의 한국 지배정책에서 벗어남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것임을 명백히 보여준 피의 대가였다.

1990년에 그려진 사범대 1호관 벽화는 이러한 시대상에 대한 구체적 표현이다. 미국에 도움을 받는 폭력적 국가권력에 항거한 광주민중항쟁의 민중·통일지향적 의지의 반영이다. 87년 6월 항쟁을 거치면서 미국과 통일 지향적 의미를 배제한 '민주화운동'이라는 한정된 의미로의 규정을 거부하고, 미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통일을 지향하고자 하는 당시 대학사회의 염원을 벽화로 표현해 낸 것이다.

또다시 10년, 2001년 우리는?
작년 한해 우리는 통일을 향한 거대한 물줄기를 형성했다. 그리고 올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제2차 정성회담을 위해 서울 나들이가 준비하고 있다. 통일에 대한 열망과 희망이 폭력과 피로 얼룩진 20여년 전의 아픔이 아물어가며, 통일의 희망에 온기를 불어 넣어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걸림돌이 남아있다. 20년전 그 모습 그대로 통일을 염원하는 이에게 총과 칼을 겨누는 미국의 패권적 입김이 우리를 아직도 억누르고 있다. 반통일·반민족의 조선일보도 건제하다. 반공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구시대 기득권정치인들도 득실댄다.

이로 인해 현실과의 타협이 아니라 문제해결의 주인으로 나서야 하는 대학의 역할이 아직 남아 있다. 우리 민족의 힘으로 정치경제의 민주화와 민족통일의 실현하고자 하는 광주민중항쟁의 정신. 이것이 2001년 사범대 1호관 벽화가 우리 대학에게 시사하는 현재적 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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