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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0일(금), 인천공항 출입기자실에서 쫓겨난 지 3일째 되던날, 오마이뉴스 뉴스게릴라는 다시 공항으로 가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태평로에 있는 한국언론회관(프레스센터)을 찾았다.

나는 왜 그 출입기자실에서 수모를 당하며 쫓겨나야 했을까? 이틀만에 6백여명의 독자들이 댓글을 달면서 '열받는' 상황의 한 주인공이 된 나는 정리가 필요했다. 도대체 출입기자실은 언제부터 왜 생겼을까? 그동안 이를 개혁해보려는 노력들은 있었을까? 있었다면 왜 실패했을까?

나는 수많은 독자들의 의견을 읽으면서 문제는 오 간사 개인이나 인천공항 공보실 직원도 아니며 인천공항 출입기자실의 20여명의 기자들만의 것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번 사태의 원인과 의미를 차분한 머리로 정리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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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언론재단 자료실에서 발견한 '기자실 역사'

그래서 나는 출입기자실에 대한 논의가 담긴 책들이 있을 만한 한국언론재단 자료실(중구 태평로 한국언론회관 13층)을 찾았다. 그곳에서 나는 적지 않은 언론 학자들과 전·현직 언론인들이 출입기자실의 문제에 대해 지적해온 '어제와 오늘'을 발견했다.

우선 한국기자협회에서 발행한 [저널리즘-1990 가을·겨울]호에는 <변화하는 언론상황과 기자단의 위상>이라는 특집이 실렸다. 기자협회는 한국 기자들의 대표적인 조직인만큼 그곳에서 발행하는 계간지에 실린 글은 11년전 한국기자 사회의 출입기자실에 대한 고민을 농축해두고 있었다. 그 글은 한마디로 기자실 개혁시도와 그 좌절의 역사였다.

그 글은 기자협회 기자들이 공동취재하여 당시 기자협회 편집국장이던 박인규씨(현 경향신문 매거진엑스 부장)가 대표집필한 것이었다.

읽어보자.

"여기에서는 우선 기자단의 운영행태가 과연 국민의 알권리에 충분히 봉사할 만큼 모범적인가라는 점이 점검되어야 하며 보다 본질적으로는 현재와 같이 한 기자가 한 출입처를 전담하며 출입처에서는 기자단에 가입된 기자에게만 배타적으로 정보를 공개하는 출입처 중심의 취재 시스템이 복잡한 현실의 전모를 보도하는 데 얼마나 적합한 취재 시스템인가가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이 쓰여진 당시는 노태우정권(6공) 후반기였다. 이 글은 당시의 언론상황의 변화 속에서 기자단의 폐쇄성이 큰 문제로 부각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기자단의 폐쇄성은 신규언론의 대거 창·복간이란 6공 언론 상황의 변화에 의해 가장 큰 쟁점으로 부각된 부분이다.

폐쇄적 기자단 운영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보원에 대한 접근권을 차단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한 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모든 국민에게 부여된 정보청구권을 위임받아 대리 행사하는 언론인 중 일부가 정당한 이유 없이 다른 일부의 정보획득의 기회를 봉쇄함으로써 국민의 알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한다는 것이다."



기자실에서 거부당한 한겨레신문 기자들의 수모와 항쟁

당시 출입기자단은 한겨레신문 등 신생언론사들의 출입처 합류를 완강하게 거부했다고 이 글은 적고 있다.

"청와대의 경우, 지난 88년 5월 한겨레와 CBS가 각각 청와대 출입 취재요청을 했으나 7월 말경 '종합대책을 검토 중', '기자실이 좁다'는 이유 등으로 출입이 허용될 수 없다는 회답을 받았다. 그러나 뒤에 정부대변인인 문공부장관(당시)은 국회문공위에서 한겨레기자 등이 청와대 취재를 못하는 것은 청와대기자단 자체가 한겨레 등의 가입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결국 폭력사태까지 야기되면서 한겨레신문 등 신생언론사는 눈물겨운(?) 항쟁을 한다. 나는 아래 사례의 11년전 한겨레 기자와 2001년 3월의 오마이뉴스 뉴스게릴라를 비교해보았다.

"한편 기자단가입을 둘러싸고 가입사와 미가입사기자간에 물리적 폭력사태가 벌어진 적도 있다. 88년 8월경 서울 시경기자단 가입을 놓고 한겨레기자와 시경기자단 간사인 모 석간사 기자사이에 말다툼 끝에 폭력사태가 벌어져 기자실 탁자유리는 물론 공보실장실의 유리까지 모두 파손되는 등 난투극이 연출됐다는 것이다. 이 사태를 두고 당시 한겨레에선 '항쟁', 기자단에선 '난동'이라 표현했는데 이후 우여곡절 끝에 10월경 한겨레와 더불어 국민, 세계, CBS 등이 가입됐다."

폐쇄적인 기자단을 만드는 데에는 출입처인 관공서도 한몫 한다. 당시에도 교통부 등 관공서들은 기자단에 가입되지 않은 기자들에게는 자료협조를 하지 않았다.

"미가입기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재무부의 경우 기자단 미가입사에 대해 요청이 있을 때만 보도자료를 보내주며 보도자료가 나올 때마다 보내줄 것을 요청하면 공보실측에서는 '기자단에 가입해야 가능하다'며 곤란하다는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교통부기자단에서도 비회원사 기자들이 브리핑에 참석하거나 기자실에 출입하려 하면 일부 고참 기자들이 '누구냐, 나가라'며 면박을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중앙언론사 기자단은 촌지배분 등의 이유로 신생지·지방지 기자들과 기자실을 분리시켰다고 이 글은 적고 있다. 떡은 한정돼 있는데 달려드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한편 얼마 전 중앙청 기자실은 중앙기자실과 지방기자실로 분리됐다. 분리된 과정은 기존 중앙석간지 기자중 일부가 분리를 주장, 지방지기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앙지 기자들이 작은 방을 구해 나갔다고 하는데 그 원인들 신생지·지방지기자들의 대거출입으로 인한 촌지배분 때문이란 분석이 유력하다."

기자단 문제의 해결을 위해 언론계에서는 기자윤리강령제정, 새로운 취재 시스팀 도입을 시도했으며 기자단을 해체하기도 했다.

"5공 때까지의 기자단에 대한 부정적 인상, 신규언론의 기자단가입을 둘러싼 골치하픈 문제 등을 일거에 해소하기 위해 단행된 기자단해체는 그 이후 기자단이 부활하거나 다른 기자단으로 확산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보사부 기자단 해체 선언과 너무 쉬운 부활

이 글은 특히 보사부출입기자단이 이례적으로 '기자단 해체' 성명서를 발표하게된 배경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해체 당시인 89년 11월 23일 보사부기자단은 '출입기자단성명서'를 통해 '새로운 언론·언론인상을 세워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기자단을 해체하고 촌지 등으로 일컬어지는 금품수수 등 일체의 부조리를 배격하기로 결의했다'고 밝히고 *기자단해체, 간사제 폐지 *기자실은 취재 등의 편의시설기능으로만 존재 *보도와 관련, 담합·청탁·촌지 등의 금품수수 등 일체의 부조리 배격 *기자실운영비는 소속언론사가 공동부담 등 4개항을 결의했다.

그런데 보사부기자단이 해체되기까지에는 당시 전국민적 관심을 모았던 라면유지파동과 관련, 보사부기자단에 대한 거액 촌지의혹이 적지 않는 계기로 작용했다고 한다. 앞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대체로 보사부의 입장에 따라 '라면유지가 인체에 유해하지 않다'는 기사를 썼던 보사부출입기자들에 대해 모 검사가 신문을 보고 '많이 먹었나보지'라고 빈정대는가 하면 라면회사 사장들이 해명을 위해 보사부기자실을 방문한 것을 놓고 거액 촌지설이 유포됐다. 더욱이 모 언론사에서는 검찰에 출입하는 후배기자가 보사부출입 선배기자에게 "나눠먹읍시다"라는 농담을 던지는 등 촌지수수의 의혹이 날로 커져갔다는 것이다.

▲변화하는 언론상황에서 진정한 기자단의 위상은?

이러한 의혹을 씻어내야 한다는 기자단 전체의 분위기와 자정을 위해 기자단해체가 선행돼야 한다는 일부 소속기자들의 의지가 맞아 떨어져 결국 기자단 해체를 결의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보사부 출입기자들은 기자단 해체와 함께 간사제도를 폐지하고 운영위원을 한 달씩 순환제로 선임, 기사관련 협조사항 체크, 기자실운영, 촌지수수 등 비리감시의 역할을 맡기고 여사무원 월급·비품구입등 기자실 운영을 위해 언론사당 매월 3만원을 각출했다. 또 해체직후 병원협회지원으로 예정됐던 제주도 여행을 취소하고 일부 들어오는 촌지는 되돌려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자단해체' 등 기자들 내의 자정의 노력은 일부에서만 국한되었을 뿐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고 흐지부지되고 만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 대외적으로 기자단이 재결성되지는 않았지만 간사제도가 부활하는 등 사실상 기자단해체이전과 비슷한 상태로 되돌아갔으며 일부 기자만이 여전히 기자단해체 결정정신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된 원인은 우선 출입기자가 상당수 교체돼 현재의 구성원은 대부분 해체결정에 참여하지 않은 기자들이라는 점, 또 기자단해체가 전혀 확산되지 않은 상태에 다른 출입처 기자들에 비해 후배들과의 술자리 등 일상생활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한편 기자실운영비에 대해서도 일부 언론사는 지급했으나 반수 가량의 언론사가 지급치 않아 기자가 개인부담 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일부 사회부장들이 기자단해체의 확산을 우려해 전화통화를 통해 기자실운영비를 주지 않기로 얘기를 모았다는 설도 있다."



"기자협회, 언노련 연대해서 개혁해야"

이 글은 "장기적으로 전면적인 기자단해체를 위해서는 신문협회, 기자협회, 언노련 등 전체 언론차원에서의 각 언론사 연대방안이 모색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6월 민주항쟁에 이끌려 뒤늦게 민주화대열에 동참한 언론이 언제까지나 민주화대열의 후미에 뒤처져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게 우리의 판단이다. 전반적인 개선을 이루어나가는 것과 함께 이제는 보다 목적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자정혁명을 완수하고 민주화의 선두에 나섰을 때에야 비로소 언론의 사회적 책무를 다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현재로서는 출입처 기자단을 존속시키되 촌지수수 등의 부정적 기능은 스스로 감시, 비판하며 개방적 조직으로 확대개편 기자들의 전문성제고에 기여하도록 하는 편이 현실적 방안이 될 것이다."

이렇듯 이미 11년 전에 한국기자협회로 대변되는 기자사회는 기자단의 문제점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자단해체'의 노력도 해봤다. 하지만 '기자단'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기득권을 버리고 개혁하기 보다는 편리와 필요를 내세워 기존 질서에 안주했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이번의 사태가 나와 인천공항 출입기자실의 오 간사 사이의 싸움이 아니며 오마이뉴스와 기성매체들간의 싸움도 아니며 오랫동안 쌓여온 모순의 폭발임을 알게 됐다.

그런데 11년전에 <저널리즘>이라는 연구서의 16쪽에 걸쳐 진지하게 출입기자실을 개혁하고자했던 뜻있는 이들의 목소리는 왜 실현되지 못했을까? 왜 기자협회와 언노련은 이 문제에 침묵해왔을까?

안타까운 것은 11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기자들은 늘 세월이 변해도 정치권의 구태는 변하지 않는다고 지적해왔지만 기자사회 또한 그들을 닮은 꼴이었다.

11년전의 고뇌를 정리했던 당시 기자협회 편집국장 박인규씨는 현재 경향신문 매거진엑스 부장인데 지난 2001년 1월 <신문과 방송>(한국언론재단 발행, 월간지)에 <제언21: 이런 관행 고치자-출입처를 벗어나자>는 글을 썼다. 20세기의 그의 문제의식과 개탄은 21세기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의 21세기 글은 이렇게 맺고 있다.

"기자들이여, 이제 현장으로 되돌아가자. 국회와 법원, 전경련도 물론 뉴스의 현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농어촌과 공장, 학교와 달동네 등 무궁무진한 뉴스의 현장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기자실은 1주일에 한 두 번만 가고 뉴스의 현장을 찾아가 보자."


예고

나는 한국언론재단 자료실에서 이 글 말고도 출입기자실의 역사를 잘 설명해준 자료를 발견했다. 그 자료는 1988년에 한양대 신방과 팽원순 교수가 <신문연구>에 쓴 <기자단의 문제와 그 기능>이었다. 팽 교수는 한국의 출입기자실이 일본의 기자클럽을 본 따 만들었지만 일본보다 더 폐쇄적인 운영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팽교수는 그 글을 들어가기에 앞서 제목 밑에 이런 강조문을 실었다.

"혹시라도 기자단이 기자들의 부패를 조장하는 수단으로 이용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백가지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그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기자단을 없애버려야 한다."

팽 교수의 글도 곧 <이어지는 기사>로 오마이뉴스 독자분들게 소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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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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