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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입춘(立春)

먼 데서 온 편지를 읽는다

한겨울
날 선 바람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따뜻한 이 한 마디에
태반 속 아가는
발길질을 해대며
자궁을 열고 있다

햇덩이 같은 머리,
막 생겨난 손가락은
얼어붙은 땅을 녹이고
바윗돌마저 밀쳐낸다

집집마다
우렁찬 첫울음 소리
그렇게 봄은,
걸쳐놓은 금줄에
빨간 꽃으로 피고 있었다.



"아빠, 어서 일어나세요. 봄비가 내린다니까요?"
그래, 어렴풋이 선잠을 깨우는 소리가 바로 추녀 끝에서 빗물 지는 소리였구나. 호들갑에 눈을 뜨기는 하였지만 딸아이처럼 봄비를 반기기에는 마음도 몸도 묵은 땟국물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랬지. 아마 한 달 전쯤만 하더라도...
"아빠, 얼릉 일어나세요. 하얀눈이 펑펑 내린다니까요?"
딸아이는 꼭 오늘처럼 호들갑을 떨었었다

겨울이 하얗게 굿판을 벌려놓으니 그 신명나는 굿판에 끼어들지 않을 수가 있어야지. 시린 눈밭 위에서 강아지처럼 폴짝폴짝 뛰면서 발자국 찍기에 바빴었다

그렇게 요란을 떨던 겨울이 꼬리를 감추고 있단다. 엊그제까지만 하여도 폭설로 온 세상이 멈춰서 버리더니 그 지루한 꺼풀을 벗겨낸 햇살이 봄의 첨병들이었다니 참으로 오묘한 섭리입니다.

수줍은 손님이 얼굴 붉히고 슬그머니 오고 있습니다.

하늘이 땅에 주는 사랑, 그 사랑이 환하고 바르다는 것을 일깨워주려고 봄비는 흔들림없이 가늘고 바르게 내리고 있었다. 언 땅을 두드리면서 풀들의 겨울잠을 깨우고 있는 봄비.......

움을 트는 어린순처럼 들떠 있는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봄마중을 가자고 한다. 숫처녀처럼 수줍고 더디게 오는 봄을 얼른 마중 나가자고 한다.

금곡사 오솔길을 오르고 있다. 길옆으로 나래비 서 있는 벚나무들은 벌써 움을 트고 있다. 마디마디 구멍을 내놓고 하나둘셋 하면 일제히 모가지를 내밀 기세다.

하! 저 메마른 가지가 벌써 저렇게 햇살들을 도톰하게 모아 놓았구나.
그래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보자. 마른 허공에 튀밥 같은 꽃들을 터트릴 때까지......

산그늘 아래서 물안개 하얗게 피어오른 저수지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얼었던 속 강물이 풀리고 있는지, 가난한 시골 농부들의 언 마음이 풀리고 있는지 하얀 물안개의 그림자가 참으로 예쁘다

'그래 저건 물 속 생명들이 풀섶이나 흙 속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일 거야'
'얼마 안 있으면 퐁퐁 물수제비 뜨는 물고기들의 은빛 비늘도 볼 수 있겠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저수지 바닥에 물고기들의 그림자라도 있나 실눈 뜨고 살펴본다. 묵은 먼지를 털어내 버리고 보석 같은 물방울이 맺혀 있는 버들강아지의 솜털이 너무나 아름답다.

강물 위에 산그림자와 어우러져 있는 버들강아지를 보노라니 한 폭의 잘 그려진 수채화를 보고 있는 듯하다.

졸졸졸 물이 흐르는 화음을 사방으로 쫓아다녔다. 풋내나는 물들이 저수지 큰 물의 품속에 옹알거리며 안긴다. 저수지는 품 떠났던 아가를 다시 안고 얼르고 있는 것처럼 가는 빗살무늬를 만들고 있다. 환한 햇살처럼 웃고 있는 물살, 물살들.....

한없이 붙잡는 물소리를 뒤로 하고 논둑을 걸어 내려오고 있다. 눈을 짓무르게 하는 푸르른 빛들, 아무도 돌보지 않았던 보리가 서리 먹고 눈 먹고 겨울을 이기더니 한잎 두잎 낯선 어깨를 비비고 있다.

지금은 저렇게 낮은 키로 설설 기고 있지만 꼿꼿한 보릿대를 세워 들판을 노랗게 붓칠을 하고 있겠지. 나는 지금 그 황금물결치는 밑그림을 보고 있는 중이야.

오지랖이 넓은 친구의 손에 이끌려 조그만 오일장에 들렸다. 그물망태에 든 갯것들을 꼼지락 꼼지락 까고 있는 아낙과 그 시린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든 어린 딸을 보니 눈이 아려온다.

배운 것 없어 농사에 기댈 수밖에 없는 처지, 농한기라 바다에서 손가락 부르트도록 꼬막을 캐어서 오일장 시린 바닥에 앉아 날품을 팔고 있는 사람들. 맡길 곳 없어 엄마 허리춤을 잡고 따라나선 아이는 옹기전 강아지 졸음같은 잠을 자고...... 가만히 꾸벅거리는 잠 같이 농가빚은 말없이 늘어만 간다.

'그래 맞아 우리들 맘 속에 봄은 아직도 멀었어. 바람찬 장터로 몰린 저 사람들을 좀 봐. 매케한 화염병 거리로 내몰린 노동자들의 울음소리를 들어봐'

'새순이 움트고, 자잘한 물소리가 재잘거리고, 꽃들이 벙근다고 꼭 봄이 온 것만은 아니야.'
'사람들의 마음속 나뭇가지에는 눈물로 언 고드름의 길이는 길어만 지는데... 나만 홀로 봄타령을 하였구나...'

환한 봄을 가득 담고 오리라던 봄맞이길은 춥고 시린 겨울을 다시 돌이켜 놓고 와 버린 듯한 마음뿐이다. 돌아오는 길 내내 아낙 옆에서 강아지처럼 졸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아프게 아프게 밟혀온다.

아! 우리들 마음 속의 봄은 언제 환한 등불을 밝히고 찾아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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