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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냥 <굴다리 헌책방>이라 합니다. 어느 분은 이 곳을 <장수갈매기>라고도 하더군요. 아저씨가 책방 일을 보다가도 당신이 꾸리는 '갈매깃집'인 '장수갈매기'에 가 있기도 하기에 그 갈매깃집 이름을 따기도 하지요. 이곳 아저씨는 이 동네 사람들은 겉만 보아도 다 헌책방인 걸 아는데 뭐 굳이 간판을 다냐면서 간판 없어도 찾아올 사람은 다 찾아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쉽게 찾아가기는 어려울지 모르나 이 작은 헌책방이 쉽게 잊히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가까이에 '한겨레신문사'나 '월간 말' '검찰청' '법원' 같은 곳이 있음에도 그곳에서 일하는 분들이 당신들이 조금만 걸어가면 찾아갈 수 있는 헌책방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노라면 씁쓰레하지요.

굴다리 헌책방. <한겨레>를 찾아가는 길에 들렀습니다. 지하철 6호선이 뚫리며 좀더 찾아가기 좋습니다. 지하철 5-6호선 '공덕'역에서 8번 나들목으로 나오면 바로 왼편에 골목이 하나 있지요. 그 골목을 따라 100m 즈음 걸어가면 골목이 끝나고 굴다리가 하나 뵈는데 길 밖에 잔뜩 책을 쌓아둔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갈매기 고기집' 네 군데를 옆에 둔 '간판도 이름도 따로 없는' '굴다리' 헌책방입니다.

책방에 굳이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사람들이 '헌책방'인 줄 다 안다는 아저씨 말씀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곳이 헌책방인 줄은 다 압니다. 다만 '알고 있으나 아는 만큼 잘 찾지' 않는다고 할까요?

우리는 알면서도 몸으로 실천하지 않는 일이 많듯 사람을 만나 고개숙일 줄 알기라든지 책 한 권 제대로 읽어내는 일이나 책방을 찾아가서 온누리에서 펼쳐낸 온갖 곱고 힘찬 이야기를 만나는 일도 잘 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만나 고개숙이며 이야기를 듣거나 책을 읽지 않으면 언제나 자기 눈길에만 사로잡힙니다.

부지런히 일하며 땀흘리는 농사꾼이나 노동자는 자신이 하는 일 안에서 살아가는 뜻을 익히고 깨닫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땀흘리며 일하는 일도 줄고 사람도 줄어들고 사람을 얼굴 맞대고 만날 수 있는 자리도 줄어들면서 책이란 매체가 제 구실을 하지요.

이 곳에서만 25년

<굴다리 헌책방> 아저씨는 이 곳 공덕동에서만 스물다섯 해 책방문을 열고 있었답니다. 우리들이 찾아가는 헌책방은 갓 태어난 헌책방도 있으나 나이를 당신 나이처럼 많이 묵은 곳도 있습니다. 오래 묵어 자식이 대를 잇고 앞으로는 손주도 나설 수 있으니 그렇게 묵은 헌책방들은 그야말로 '대를 잇는 장이얼(장인정신)'이 녹아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겠죠?

보임.
스물다섯 해 동안 한 자리를 굳게 지켜온 이에게 자신이 지켜온 곳을 찾아오는 사람이 보는 책이라든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슬며시 보이지 않을까 합니다. 나이란 그만큼 오랜 겪음(경험)을 담습니다. 헛나이 먹는 사람도 있지만 참나이를 먹는 사람이 있죠. 우리 삶에서 '헌책방'이란 곳은 '책장사'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책문화'를 일구고 지켜온 사람이라고 봅니다.

헌책방을 꾸려온 당신들은 그 동안 판 책을 이야기하노라면 몇 해 동안 얘기해도 모자라 합니다. 이러한 땀흘림과 애씀을 헤아리고 생각하는 이는 드뭅니다. 바로 이렇게 이름도 낯도 떠오르지 않는 많은 이들에게 '사람 손을 한 번 거친 책'을 다시 팔면서 '책이 한 번 보고 버려지는 일'을 막아 왔죠.

더불어 '참으로 소중한 책'이 첫 임자도 모르는 사이 버려지거나 흘러나왔을 때 '더욱 소중한 책'으로 값매겨서 제 임자를 만날 수 있도록 했고요. 그렇게 살아온 분들이기에 '책'이라 할 때 당신들 눈에 '보임'이 있지 싶습니다. 그리고 책을 찾는 책손님 앞에서도 그네들이 무얼 찾는지 '보'고요.

내세우는 책은 없다

헌책방에서는 '내세우는 책'이 없습니다. '베스트셀러'도 '스테디셀러'도 없습니다. 헌책방에 있는 모든 책은 '한 권밖에 없는 책'이지요. 다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 다 다른 길로 본 책들입니다. 지은이가 선사한 책부터 난날 선사받은 책도 있고 어버이가 딸아들에게 선사한 책도 있으며 쌈짓돈 털어서 산 책도 있고 도서관에서 보존연한을 넘겨서 처분된 책도 있습니다. 신문사 보도자료로 들어갔다가 한꺼번에 갈무리된 책도 있어요. 하도 안 팔려서 반품수거를 했다가 고물상에 넘겨버리고 말아, 그 고물상에서 헌책방으로 나오는 수도 있고요.

같은 책이라 해도 어떻게 사람 손을 거치는가에 따라 다 다릅니다. 그래서 헌책방에서는 책 한 권을 보면서도 '책 한 권에 얽힌 이야기'가 남다르고 책 한 권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다소곳이 얻을 수 있습니다.

책꽂이에서 눈에 잘 띄는 곳에 일부러 꽂는다고 해 보아야 다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헌책방에서는 따로 '잘 팔리는 책'이라 하여 푯말을 붙이지 않거든요. 그리고 이렇게 모든 책을 다 고루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사람을 보는 눈길로 살짝 돌려놓는다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기도 소중하고 이웃도 소중하며 늘 서로를 헤아리면서 즐겁게 살아가야 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헌책방에 갔을 때는 자기 마음에 쏙 드는 좋은 책을 건져야 합니다. 저도 <굴다리 헌책방>에 가서 이런 책들을 다섯 권 건졌습니다.

다. 내가 산 책

<김사달 - 멋의 의미, 범우사(1982)>
<백범사상연구소 주해 - 도왜실기, 사상사(1974)>
<한창완 - 한국만화산업연구, 글논그림밭(1995)>
<백원담 - 색동저고리 입고 꼬까신 신고, 한울(1995)>
부정기 간행물 <공해> 창간호, 형성사(1985)
(관련 책들은 사진자료로 따로 올리니 참고하세요)

<공해>라는 부정기 간행물은 몇 호까지 나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편집위원 가운데 한 분은 지금 환경운동연합을 이끌고 계신 최열 씨입니다. <한겨레>에서 과학생활 기사를 줄기차게 써온 조홍섭 씨도 편집위원입니다. 편집고문 이름을 보니 '김병걸 유인호 성내운 백기완 정호경 송건호' 들입니다. 책 껍데기엔 지은이를 '정호경 김지하'로 내세우는군요. 아무래도 이 두 사람 이름값이 가장 높을 테니 사람들 눈길을 잡으려고 그런 듯합니다.

<공해>란 잡지에 실은 글을 보면 이야기나눔(좌담)부터 특별기획이자 취재, 현장 이야기, 반공해 외침, 반공해 운동 사례, 현장교사와 교수들이 짤막하게 쓴 이야기, 글쟁이가 쓴 반공해 시와 소설까지 있습니다. 한 마디로 '반공해 운동'을 할 수 있는 모든 글 방식을 이곳에 담았습니다. 임진택 씨는 '공해풀이 마당굿'을 한 뒤 단상까지 적어 놓았습니다.

백원담 씨가 딸아이를 가지고 난 뒤 딸아이에게 해 줄 이야기를 미리 적어나간 책 <색동저고리 입고 꼬까신 신고, 한울>는 '생명이 또 다른 생명과 만나 둘이 어우러진 생명을 낳으면' 얼마나 사람이 달라질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책이지 싶습니다. 세밀화란 그림을 그리는 이태수 씨는 자신도 아이를 가지고 나서 보니 아이가 나중에 크면 볼 만한 그림책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고 자기가 하는 일이 '그림 그리기'이니 자기 아이가 크면 볼 수 있는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하여 알뜰한 그림책을 많이 그려냈습니다.

우리는 우리만이 아니라 우리 뒷세대를 생각하면 참으로 크고 고운 일을 많이 하고 우리 삶도 더 아름답게 가꿀 수 있습니다. 지금 자기만을 생각한다면 아무 것도 못 합니다. 지금 자기 삶만 생각한다 함은 자기가 죽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되든 신경 안 쓴다 함과 잇닿거든요. 그래서 사회도 문화도 환경도 모두 엉망이더라도 눈길 한번 안 두게 마련입니다.

"왜놈들 때려잡은 이야기"인 <도왜실기(屠倭實記)>는 이름은 으레 한 번쯤 들어봄직한 책이지요? 백범 김구 스승을 이야기하면 <백범일지>와 함께 <도왜실기>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 책은 한문으로 중국에서 펴냈기 때문에 우리 말로 옮겨낸 일은 해방된 뒤에야 비로소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해방된 뒤 옮긴 책도 드문 책이 되고 말아 뒷날 백범사상연구소에서 다시 우리 말로 옮겼죠. 나중엔 범우사에서도 손바닥책으로 잘 꾸며서 내놓았습니다.

<도왜실기>엔 이승만이 머리말을 쓰기도 했더군요. 이승만이 백범 스승을 두고 참으로 크고 훌륭한 일을 했노라고 쓰고는 있는데, 이렇게 머리말에는 좋은 말만 붙인 분이 왜 백범 스승이 중국에서 조국으로 돌아오려는 길을 반가이 마중하지 않았을까요. 이런 글을 읽으면서 정치모략이 어떠한 것인지, 자기 앞길만 생각하는 거짓이 어떠한지도 배웁니다.

의사이면서도 자기 직업을 넘어 우리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을 많이 해온 김사달 씨가 조촐히 쓴 글을 모은 <멋의 의미, 범우사>도 솔찬히 보면 좋을 책이라 함께 골랐습니다.

다님길 한 줄뿐인 작은 헌책방

밤때 <굴다리 헌책방>에 왔을 때는 문에 자물쇠가 달려 있더군요. 하지만 책방 안엔 불을 켜놓고요. 애써 찾아왔는데 책방 문에 자물쇠가 달려있다면 '갈매기 고기집' 가운데 '장수갈매기' 집을 찾아가 보세요. 책방문을 잠갔다면 '장수갈매기'에서 일을 보고 계신 겁니다.

어제 찾아갔을 때는 다른 손님 두 분이 계셨습니다. <굴다리 헌책방>은 책방 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편과 오른편에 책이 빼곡히 있고 딱 하나 있는 다님길이 좁아 책 보는 이가 자신 말고 더 있으면 그야말로 책방이 꽉 들어찹니다.

이렇게 좁은 책방에서 무어 볼 책이 있겠느냐 싶어도 한번 찾아가 봅시다. 책 가짓수가 많고 넓다 하여 우리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데 도움이 될 좋은 책이 꼭 있으리란 법은 없으니까요. 자그마한 책방으로 스물다섯 해를 꾸려온 느낌도 받아보면서 주인 아저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어도 <굴다리 헌책방>을 찾아온 보람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 * 시내버스로는 588번이 지나갑니다. 지하철 5-6호선 8번 나들목으로 나올 수 있고 번화가 신촌에서 이곳까지 채 10분밖에 안 될 만큼 가깝기도 하지요. 가게가 문을 닫았다면 옆에 붙은 '장수갈매기' 집에 가서 책방 문을 열어달라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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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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