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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펴
그 예쁜 얼굴은 옥비녀보다 곱구나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말라
거리에 가득 찬 사람들 모두 다 네 모습 사랑하리라'


송강 정철의 '자미화'라는 시다. 얼마나 미모가 뛰어나기에 거리에 모습조차 드러내지 말라는 내용을 시에 담아 남겼을까. 어쩌면 이 시를 지은 정철의 속마음에는 이 여인에 대한 예찬과 질투가 함께 들어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너무나 고와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혹, 그랬다간 민들레 홀씨처럼 훌쩍 떠나버릴 지도 모를 그래서, 시속에 우려와 경고를 섞어 노래한 것인지도...

이토록 정철이 시에 담아 극찬을 한 주인공은 도대체 누구일까. 이 시는 정철이 1582년 9월, 전라도 관찰사로 있다 도승지에 임명되어 한양의 임지로 떠나며 지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이 시는 누군가와 헤어지며 지어진 별곡이라는 얘기다. 정철의 주특기인 별곡 말이다. 자미화는 백일홍을 가리킨다. 백일홍의 미색이야 누군들 모를까. 그렇다면 이 백일홍에 비견되어진 여인은 누굴까.

바로 이 여인의 묘가 고양시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고양시 신원동 송강마을이라는 곳에 가면 이 여인의 봉분을 볼 수 있다. 그 사연 때문인지 봉분의 오롯함이 주는 맛은 남다르다. 이름하여 강아(江娥) 아씨.

이 봉분이 처음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4년 한성대 정후수 교수에 의해서였다. 정철 문중에서는 오래 전부터 강아 아씨와 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지금은 강아 아씨의 묘비문과 묘 정비가 이루어져 제대로 된 봉분의 형태를 하고 있다.

강아와 정철의 만남은 어쩌면 우연일 수도 필연일 수도 있다. 강아가 정철을 만난 건 1581년, 16세의 꽃 같은 나이였다. 그러나 당시 정철의 나이 46세. 16세의 처녀와 46세의 중년남자의 만남은 지금으로 말하면 원조교제의 의혹을 받기에 충분하다.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는 데 하물며 나이가 무슨 장애가 될것이겠냐마는 요즘 눈으로 보면 어쨌든 수상쩍을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사랑에는 방식이 있는 아닐까. 아마 강아와 정철의 사랑방식이 요즘 식으로 이루어졌다면 그건 분명 원조교제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조교제를 사랑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거기엔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소위 70년대 '아저씨'영화로 분류되는 '별들의 고향' 같은 영화도 10대와 중년남자의 사랑 얘기다. 그러나 그걸 원조교제로 보는 사람은 없다.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강아와 정철의 사랑얘기가 원조교제가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히 해두어야겠다.

강아가 정철을 만난 것은 남원에서였다. 강원도관찰사로 있다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한 정철의 신분에 비해 당시 강아의 신분은 기생이었고 이름도 자미였다. 당시 풍류객들이야 기생과 시, 여행을 빼면 별로 할 얘기가 없다. 정철 역시 당대 둘째가라면 서러울 풍류객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자미와 정철의 만남은 1년을 넘기지 못한다. 다음해인 1582년 9월 정철은 도승지로 임명되어 한양으로 떠나할 처지였기 때문이다. 안정된 환경 속에서 이루어진 둘의 교제는 그게 전부이다.

당시 관아에는 객지에서 관리를 하는 벼슬아치에게 아내를 대신할 수 있는 여인을 공급하는 기생제도가 있었다. 자미의 임무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 1년 동안 강아는 정철을 위무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그리고 정철은 자미화 어쩌구 하는 시 한 토막을 남기고 훌쩍 떠나 버렸다.

여기서 얘기가 끝났다면 우리는 강아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강아와 정철의 남원생활을 월탄 박종화는 '자고가는 저 구름아'라는 소설에서 지고순결하게 묘사하고 있다. 1년 동안 정철은 자미의 몸을 건드리지 않았다. 오로지 사랑의 마음으로 자미를 대했고, 자미 역시 지성으로 정철을 모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때부터 자미를 강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강(江)은 정철의 호 송강의 '강'자를 따온 것이고 아(娥)는 자미의 뛰어난 미모를 비유해 붙여진 것이었다.

강아와 정철의 재회는 남원에서 헤어지고 근 10년이 지난 뒤에야 이루어졌다. 그것도 정철의 유배지에서. 정철은 1591년 6월 명천의 유배를 시작으로 진부를 거쳐 평안도 강계로 유배지를 옮겨 다니게 된다. 정철과의 재회에 적극적으로 나선 사람은 강아였다.

천리길을 마다않고 정철이 있는 강계로 강아가 찾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해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5월에 정철은 유배지에서 선조의 부름을 받는다. 그리고 그해 9월 정철은 도체찰사로 임명되어 배를 타고 충청도로 향한다.

이때 강아는 정철에게 같이 가게 해줄 것을 요청하지만 거절 당한다. 왜군이 우글거리는 전쟁터로 가는 길에 아녀자를 데려갈 수는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런 사실로 보아 남원에서의 만남 이후 강아가 정철을 다시 만나 보낸 기간이 약 1년여 가까이 되지 않나 싶다. 이 재회가 이승에서 만난 강아와 정철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전라도 지역에 내려가 있던 정철은 다음해 1593년 1월 다시 북쪽의 조정으로 돌아온다. 1월 8일 평양성 함락작전이 펼쳐졌고, 선조는 의주를 떠나 곡산을 거쳐 정주에 이르러 있었을 때이다. 1월이면 강아는 왜장 고니시의 품안에 있을 때이다. 정철을 지아비처럼 섬기던 여인이 왜장의 품안에서 놀아나다니?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도체찰사를 맡아 남으로 내려가는 정철에게 동행을 거절당한 강아는 정철이 있는 남으로 내려가다 왜군에게 잡히는 신세가 된다. 이때 의병장 이량을 만나게 되는데 그로부터 왜군의 군사정보를 빼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는다. 이것이 강아가 당시 왜군 주력부대의 수장인 고니시에게 몸을 맡기게 된 사연이다. 논개와 비슷한 이야기구조이지만 여기서는 정철과의 애뜻한 사랑얘기가 주가 된다.

정철은 1593년 5월 중국 명나라로 사은사로 갔다가 12월, 돌아오자마자 그 달 18일 강화에서 죽음을 맡는다. 장사는 다음해 2월 부모의 묘가 있는 고양시 신원동 송강마을에서 지내졌다. 그때 정철의 나이 58세요 강아의 나이 28세였다.

그리고 어느 해부턴가 정철의 묘에는 계절에 따라 들꽃다발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곤 하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 눈에 가끔 띄는 사람은 고운 자태의 비구니였다. 그녀는 묘소를 어루만지기도 하고 정성껏 주위의 잡풀을 뽑곤 사라졌다.

언제부터 누구의 입에서였는지는 몰라도 비구니의 법명은 소심(素心)이요, 정철을 사모하던 강아 아씨라는 말이 전해졌다. 왜장 고니시에게 더럽혀진 몸을 정철에게 사죄하기 위해 강아가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던 것이다.

속세와의 인연을 뒤로하는 출가승의 신분이라지만 그래도 차마 잊지 못할 속세의 인연 하나, 강아 아씨 소심은 끝내 정철을 잊지 못하고 정철의 근처 절에 있으면서, 계절마다 묘를 돌보는 것으로 못다 이룬 사랑을 달래고 있었다. 그 뒤 강아 아씨 소심은 결국 송강마을에 돌아와 살다 이승을 하직했고, 정철의 선영에 묻히게 되었다.

이 얘기의 대부분은 월탄 박종화의 '자고 가는 저 구름아'라는 소설에 나오는 것들이다. 문헌의 출처는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지만 문중에서는 오래 전부터 구전되어 오고 있으며 현재 강아 아씨의 묘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이는 사실로 보여진다.

또 문중에서는 제사 때 강아 아씨의 묘에 물림상으로 제를 올리고 있다. 어쨌든 강아와 정철의 이런 사랑얘기라면 훔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더군다나 요즘 같은 세태 속에서라면...

덧붙이는 글 | 송복남 기자는 시사월간지 GYpeople의 편집장으로 있으며 우리나라설화와 전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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