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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전에 : 조선일보의 사설은 < >안에 묶어 인용하고 있으며, 순서를 바꾸지 않고 전문 인용했습니다.

<"최근의 남북관계에서 양보는 북한이 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한 김대중 대통령의 말에 우리는 동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런 인식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김 대통령은 북한이 지금까지 내걸었던 주한미군 철수, 연방제 통일, 국가보안법 폐지 등 3가지 전제조건을 '거둬 들였다'고 보고 그것을 '양보'의 근거로 삼고 있다.>

협상에 있어서 양보는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전략적 양보와 전술적 양보. 아무래도 전략적 양보는 전술적 양보에 비해서 그 실현가능성이 낮고 경직된 것이죠. 그러나, 전술적 양보가 긍정적으로 작용해 '신뢰 형성' 또는 '환경의 변화 인식' 등으로 발전하게 되면 전략적 양보가 나타날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집니다. 물론 반대로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극단의 가능성이 양립할 때, 협상의 지속 여부는 전적으로 그 협상의 목표가 양자에게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조선일보의 사설 <'북의 양보'라는 대통령의 인식>은 그런 점에서 느닷없는 가치판단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설 전체에 걸쳐, 김대중 대통령이 언급한 '양보'에 대해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전략적 양보로 단정하고 있고, 한술 더 떠 그 '양보'의 전술성을 들어 김 대통령의 언급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사설의 느닷없는 시작은 그 논리의 허약함과 '제 논에 물 대기'식의 자의성이라는 비판의 소지를 안고 있다는 것이죠.

이 시점에서 조선일보가 현재 이 땅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두 KOREA간의 협상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는 것인지, 인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인식하고는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상회담 이후 북한이 그 3가지 주장을 공식적으로 제기하는 일이 없어졌고, 북한 선전매체들도 그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이 이러한 주장들을 '양보'한 것으로 보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그것은 북한의 전술적 변화일 뿐이다. 거기에는 지금까지의 이념적 주장을 일단 접어두고 남한으로부터 '얻을 것'을 얻겠다는 동기가 엿보인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북한이 양보한 것이 아니라 김 정부가 북한의 주장을 사실상 이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글이 단순히 북한의 '이중성'을 지적하는 글이라면, 이 같은 시각은 명백히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시각의 하나로서 존중받아야 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이 글에서 문제삼고 있는 것은 '북의 양보'라는 대통령의 '인식'이라는 점에서, 타당한 근거없이 자의적으로 해석, 판단하고 있는 그 '성급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조선일보는 '문제의 핵심은 북한이 양보한 것이 아니라 김 정부가 북한의 주장을 사실상 이행하고 있다는 점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정부가 그 의지는 별개로 하더라도 협상에서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고 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정상적인 협상능력에 대한 질타라면, 평화와 통일이라는 협상의 궁극적인 목표를 기본 인식으로 깔고, 전략과 전술이라는 측면을 고려하면서, 협상의 양상과 공과를 따져야 합니다. 그것이 이 문제에 있어서 합리적인 비판의 자세겠지요. 물론, 평화와 통일이라는 궁극적인 목표에 동의하지 않거나, 현재의 남과 북의 '협상'자체를 협상으로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라면 달라지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이 사설에서는 아쉽게도 그런 합리적인 비판의 자세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김 대통령의 인식에 대한 성급한 판단과 비판만 있을 뿐, 그것이 평화와 통일이라는 협상의 궁극적 목표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국가보안법의 경우 김 대통령은 기회있을 때마다 개정의지를 밝혔다. 김 대통령은 최근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 치사를 통해서도 보안법 대폭개정 의지를 거듭 밝혔으며 개정 이전이라도 7조(고무, 찬양)와 불고지죄 적용을 신중하게, 최소한으로 적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주장하는 연방제도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정상회담 합의문에 공식적으로 반영됐다. 남 측의 연합제안과 북 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을 토대로 해서 그런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하기로 한 것이다. 이는 북한의 연방제안이 김 대통령 덕분에 합법적인 논의의 공간을 확보했음을 의미한다.

김 대통령은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서도 김정일이 이해하고 수긍했다고 여러 차례 말했지만 북한이 '주한미군 용인'을 공식적으로 직접 언급한 적은 한번도 없다.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주장을 최근 들어 자제하는 것은 당면의 북한 외교정책의 최대목표가 미국과의 관계개선인데다 그것이 남북관계에 '걸림돌'로 작용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상회담 이후 남한에서 '반미운동'이 왕성하게 고취되고 있다. 그런 판국이니 북한이 세가지 주장을 새삼 들먹일 필요가 없어졌다. 그것을 '양보'로 보는 대통령의 인식은 너무 안일하다.>

'정부가 북한의 주장을 사실상 이행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논거들 역시 다분히 자의적인 비판이라는 혐의를 지울 수 없습니다. 단편적인 정황이나 산술적인 비교에 의존하고 있을 뿐, 남북의 협상이 평화와 통일이라는 대의를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 합리적이고 다각적인 판단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식의 주장이라는 거죠. 현실은 결코 1+1=2 식의 산수가 아니라는 점을, 사회생활에 막 눈뜨기 시작한 코흘리개들도 직감으로 배우는 협상의 ABC를 조선일보는 간과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조선일보는 현 상황 자체가 그럴 가치 조차 없다고 판단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 정부가 북한의 주장을 사실상 이행하고 있다'고 볼 정도라면, 지금 이 땅 위에서 협상은 존재하지 않고 있는 것일 테니까요. 그렇다면, 조선일보는 이처럼 김대중 대통령의 '인식'을 두고 공허한 비판만을 되뇌고 있을 게 아니라, 대대적인 반정부운동이라도 벌여야 할 터인데, 그렇지를 않으니 오히려 이상합니다. 자연히 설득력 또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조선일보의 인식이 맞다면,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지금 정부는 명백히 '이적행위'를 하고 있고, 조선일보는 그 '사실'을 알고도 명백한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있으니, 당장 불고지죄로 기소당할 지경에 있으니까요.
어쩌면 이 사설에 나타난 일련의 모순들은 심하게 말하면 최근의 남북 현실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는데 있어서 조선일보가 심각한 '혼란'에 빠져 있다거나 '어지러움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일종의 '부적응' 상태에 있다는 반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입장이 정리될 때까지는 말을 아껴야 하겠죠.

또 어쩌면, 조선일보가 정부와 우리 사회의 특정 '흐름'을 상대로 '속도'와 입지를 두고 모종의 저울질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조선일보는 문제의 초점을 흐리는 모호한 비판으로 조선일보 독자들이나 국민들을 더 이상 우롱할 것이 아니라, 저 김영삼 전 대통령이나 자유민주민족회의 이철승 씨처럼 입장을 떳떳하게 밝히고 목청을 높이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줄타기에 미련을 두지 말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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