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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형제와 50여년 넘게 헤어져 있었으니 이제라도 꼭 가야지. 여긴 친척도 없고... 아내를 두고 가야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떠나는 내 맘이 너무 아파"

9월 2일 북송을 희망한 비전향 장기수는 모두 62명, 꿈에서만 그리던 또 하나의 조국을 찾아 간다는 설렘도 컸지만 그에 못지 않게 제2의 이산가족이 되어야 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도 있다.

김영달 씨(67)는 "결혼한 지 10년밖에 되지 않은 아내를 남녘 땅에 남겨두고 북송을 결정하기란 쉽지 않았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나 그는 끝내 송환을 신청했다. 그에게는 50여년을 생사도 모른 채 헤어져 살아야 했던 부모, 형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엔 더 더욱 아내 백학년 씨(65)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제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8월 25일, 전북 부안에서 살고 있는 김씨는 송환절차에 필요한 신체검사를 마치고 오후 3시가 다 되어서 전주에 도착했다. 물론 옆에는 이제 곧 이별을 해야 할 아내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전주고백교회에서 준비한 '북송 희망 장기수 송별회'에 참석하기 위해 왔지만 떠나기 전에 남녘 땅에 남게 될 장기수 동료들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보겠다는 마음이 더 컸다.

경북 영덕이 고향인 김씨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가족들과 함께 만주 하얼빈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1957년 남녘 땅으로 내려와 활동을 하다 23세 때 수감되었고 32년의 수감생활 끝에 1989년 출소했다.

1991년 논산에서 박씨를 만나 새로운 둥지를 틀고 살면서 김씨는 늘 만주 하얼빈에서 헤어진 부모, 형제를 잊지 못했다. 막내 여동생이 죽지 않고 생존해 있다면 벌써 48살이다.

김씨는 "아버지께서는 올해 104살이 되셨으니 돌아가셨을지 모르지만 어머니는 92살이므로 다행히 살아 계실지도 모른다"며 희망을 가지고 있다. 생존도 확인되지 않은 가족을 위해 그는 시계며 카메라 등 선물도 준비했다.

하지만 김씨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김씨는 "개인적으로는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기쁘지만 아내 놓고 가는 맘이 많이 아프다"고 말한다.

송별회 내내 교회당 한 쪽 구석을 지키고 앉아 있던 백씨는 행사가 끝나자마자 김씨 옆으로 다가와 앉으며 김씨의 무릎을 꼭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사진을 함께 찍었으면 좋겠다는 기자의 부탁을 한사코 거절하면서 박씨는 고개를 돌렸다.

"간다고 하는 사람 잡을 수는 없잖아요. 보내 줘야죠. 그저 가족도 함께 보내줬으면 좋겠는데 그게 힘든가 봐요." 그의 주름진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떠나시기 전에 아내에게 정표로 남겨 주신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김씨는 아내를 한번 돌아보고는 "내 마음 주고 가면 됐지 더 뭐가 필요하겠어?"라며 미소를 띄웠다.

김씨는 "이대로 간다면 머지 않아 북남 간에 면회소도 만들어지고 서신교류도 될 것"이라며, "몸은 헤어져 있지만 마음만은 늘 남녘에 있는 아내와 함께 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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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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