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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월간 <말> 9월호에 실린 '김명인의 문학에세이-조선일보에 줄 선 문인들의 모순과 궤변'의 전문입니다. 월간 <말>과 필자의 동의를 얻어 <오마이뉴스>에 게재합니다.

지난 8월 7일 154명의 지식인들이 '<조선일보>에 기고와 인터뷰를 거부하는 지식인 1차 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결의문을 통해 "<조선일보>가 과거를 반성하고 국민과 민족 앞에 사죄할 것"을 촉구했고, "이 같은 요구가 실현될 때까지 <조선일보>에의 기고와 인터뷰를 하지 않을 것"을 선언했다. 이로써 반<조선일보>운동, 혹은 '<조선일보> 제 몫 찾아주기 운동'은 보다 본격적인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선언에 참여한 154명의 면면들을 보면 학계와 시민운동권, 그리고 인터넷 운동 관련인사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 사실상 <조선일보>의 기만적인 문화면 정책과 직접 관련이 있는 문화예술인들의 참여가 상대적으로 빈곤하다.

내 이름도 들어 있는 문인 30명의 명단 중에 명망과 영향력을 갖춘 문인들은 송기숙, 문순태 두 분 정도이고 대부분이 신인급의 이름들이다. 연락이 잘 안 된 탓도 있을 것이고, 이차, 삼차로 가면서 더 많은 참여가 있겠지만 한편으로 동인문학상과 <조선일보> 문화면의 당근전략이 문인들의 참여를 제약했거나 제약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레 씁쓸해진다.

내 안으로 들어오는 <조선일보>

나는 <조선일보>에 기고나 인터뷰를 한 적이 없다. 그것은 내가 일부러 조선일보를 기피한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일보>가 나를 기피했거나 아니면 굳이 원고청탁을 할 만한 영향력을 가진 필자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 그 동안 나는 <조선일보>에 절대로 기고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조선'이나 '동아'나 '중앙'이나 '한국'이나 뭐 그리 특별히 다를 것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난 5월 경 <조선일보>에 기고를 하거나 인터뷰를 하는 일, 짧은 코멘트를 제공하는 일 등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게 만든 일이 생겼다. 그것은 <말>지 6월호 <문학에세이>에서 강준만 등의 '아웃사이더'들에 대한 내 입장을 정리하면서였다.

나는 이 아웃사이더들의 비판적 글쓰기를 "좁다란 담론 유통의 폐쇄회로 속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걸게 된" 자칭 진보적 지식인들의 위선과 실천적 무기력에 대한 하나의 문제제기로서 아프게 받아들였고, <조선일보>와의 싸움을 우선 가능한 지식인적 실천의 장으로, 작금의 정세에 적합한 '계몽 투쟁'의 현장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애초에 <조선일보>와는 어울리지 않았던 나로서는 별로 손해볼만한 선택도 아니기도 했고, <조선일보>를 당장 공격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가능성도 없는 원고 청탁을 거절하는 일 따위의 수동적인 실천이야 도무지 어려울 게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선일보>에 관해 신경을 더 쓰게끔 하는 일들이 자꾸 생겼다. 일주일에 한번씩인가 볼 수 있는 <조선일보>의 문학면은 그 신문의 다른 지면들이 그렇듯 다른 경쟁 신문들보다 조금 더 디자인이 잘 된 광고지면이거나 가십란 이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러던 <조선일보>가 갑자기 자기들이 운영하는 동인문학상을 '개선'한다는 사고(社告)를 냈다. 7인의 종신 심사위원을 두고, 중 단편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기간된 장편, 혹은 작품집 등 단행본을 대상으로 한다는 등 "<조선일보>의 성가에 걸맞는, 조선일보이기에 가능한 세계적 문학상을 지향" 운운하는 '닭살 돋는' 나르시시즘을 논외로 한다면 확실히 '개선'은 '개선'이다.

이왕 주고받는 상이라면 좀더 엄격한 절차를 거쳐서 주고받는 것이 낫고, 이왕 상 받았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수상 작가에게 좀더 많은 경제적 도움이 되는 것이 나으리란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기존의 문학상제도 속에서 조금 '개선'되었다는 정도이지 그렇게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다. 동인문학상의 이런 개선이 현행 문학상 제도의 본질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상을 주최하는 것이 출판사건 신문사건 영리집단이 운영하는 문학상은 그 주체에게 상업적 이익을 제공한다.

그리고 상의 규모가 클수록 심사위원들에게는 더 많은 문단적 권력이 부여된다. 동인문학상이 개선된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상업주의와 문단권력의 집중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기존 문학상의 폐해를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확대재생산하는 것이 된다.

이상적인 문학상이란 비영리 주체에 의해 운영되고 진정 그 권위를 두루 인정받는 인사들의 공정하고 성실한 심사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모든 문학상은 상업주의와 문단정치의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특히 신문사는 문학상을 운영해서는 안 된다. 문학에 대한 신문사의 기여는 문학면을 일상화하여 더 많은 작가들과 작품들을 소개하고 문학계의 이슈들을 더 많이 다루어 문학이 보다 독자 대중에게 친근한 것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즉 신문 자체의 내적 체제 속에서 문학의 지위를 높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 노력은 아랑곳하지 않고 문학상 따위나 만들어 생색이나 내고 그 열매나 따먹겠다는 상업주의적 발상에 침윤된 신문이 문학의 발전을 말하는 것은 위선이거나 몽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조선일보>에 그런 것을 바랄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으며 더 이상 이에 관한 내 생각을 발전시키지도 않았다.

황석영의 '마지막 한 방울의 물'

그러던 중 지난 7월 20일, <한겨레> 지면을 통해 문제의 황석영 '선언'이 터져 나왔다. 이 '선언'이 중요한 것은 동인문학상의 '개선'을 단순히 상업주의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만 본 것이 아니라 <조선일보>의 문화적 패권 전략의 일환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정치·사회면에서의 극우 보수성의 관철, 문화면에서의 다양성을 내세운 유화 전략의 구사, 그리고 자매지 스포츠신문에서의 선정주의 선도 등이 구세대와 신세대, 지식인 독자와 대중 독자들을 모두 끌어들이려는 언론 불가사리 <조선일보>의 전방위적 상업주의 전략일진대 이 동인문학상 제도 개선 역시 상금 인상과 권위의 의장을 동원하여 기왕의 상업적 권력을 유지 확장하려는 일종의 패권 전략이라는 사실을 이 선언은 환기시켜주었던 것이다.

물론 황석영의 '선언'에는 문단 후배가 더 많이 포함된 종신 심사위원진들에 의해 자기 작품이 함부로 취급되고 있다고 생각한, 그리고 "현대문학에서의 김동인의 위치에 대하여도 이견"을 가진, 사실은 김동인의 이름으로 된 상을 받는 것이 그리 탐탁치 않은, '대작가' 황석영의 문학사적 자의식과 자존심이 더 많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의 <조선일보>에 대한 판단과, 그 판단을 뒤따르는 단호한 선언이 지니는 의미는 아무리 중시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

그저 동인문학상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그 심사 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선에서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문단 내에서의 그의 상징적 역할은 충분했을 것인데, 그는 동인문학상을 매개로 한 <조선일보>의 오만하고도 교묘한(사실은 교묘하다기보다는 적나라한) 패권 전략을 문제삼음으로써 문제가 동인문학상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일보>의 문제임을 다시금 환기시키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다.

또한 황석영이라는 막강한 대중적 영향력을 지닌 작가가 <조선일보>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선 것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특히 문인을 비롯한 지식인들로 하여금, <조선일보> 문제를 남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여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즉 <조선일보> 문제를 둘러싸고 이제는 지식인 사회에서 하나의 전선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며, 친<조선일보>든, 반<조선일보>든 아니면 그 사이 어디에선가 동요하든 많은 지식인들은 이 문제와 관련한 자신의 입장에 관해 성찰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 반향은 크고 또 빠르게 확산되었다.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의 한 명이면서 스스로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을 동인문학상 후보로 추천한 장본인이라고 밝힌 이문열은 <한겨레 21> 지면을 통해 한편으로는 선배 작가 황석영에게 누를 끼친 것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하면서도 이것이 '안티조선' 운동 측에 힘을 실어주게 될 것이 두려워 <조선일보>에 대한 적극 방어(그 특유의 '균형 없는 균형감각의 발로'이겠지만)에 발빠르게 나섰다.

반면 같은 지면에서 '안티조선' 운동의 이론적 실천적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강준만은 "황석영 씨에게 뜨거운 감사와 존경을 보낸다"면서 그의 행동이 잔을 넘치게 하는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었으면 좋겠다는 감격 어린 기대를 보내고 있다.

이처럼 황석영의 이 선언은 반<조선일보> 전선에 결정적인 힘을 실어주면서 이 싸움을 그저 소수세력의 힘겨운 국지전에서 지식인사회 전반이 참여하는 전면전으로 전환시킬 매개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문두에서 말한 '<조선일보>에 기고와 인터뷰를 거부하는 지식인 1차 선언'도 황석영의 이러한 선도적 실천에서 결정적으로 힘을 받았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양귀자의 모순과 자가당착

하나의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지난 7월 29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양귀자의 '아침생각' 역시 '황석영 선언'이 작가들을 얼마나 불편하고 곤란하게 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양귀자는 황석영과 이문열이 '특정 신문'에 대한 입장 표명과 관련한 줄 세우기를 부추기고 있다는 요지의 비판을 했다. 언뜻 보기에는 양비론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인터뷰 기사만으로 한정해 본다면 오히려 줄세우기를 압박한 것은 확실히 황석영쪽이고 이문열은 그에 대해 방어적일 뿐이었다.

황석영은 자신이 <조선일보>에 기고하지 않고 어떤 빌미도 주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것은 다른 작가들에게는 굉장히 윤리적인 압박으로 다가올 것이 틀림없는 말이다.

반면 적어도 그 인터뷰에서의 이문열은 <조선일보> 반대 운동에 대한 일종의 공격적 방어를 수행했을 뿐이며 그것이 기왕에 <조선일보>와 내남없이 지내는 작가들을 약간 안심은 시켰을지언정 그렇지 않은 작가들에게 어떠한 윤리적 압박감을 준 바는 없었던 것이다.

양귀자로 하여금 '소설가'의 자리를 굳이 벗어나 '작가'의 소리를 내게 만든 사람은 이문열이 아니라 황석영이었다. 황석영의 윤리적 압박에 대해 양귀자가 심한 불편함과 반감을 느꼈다는 것은 그가 '동아'도 '한겨레'도 '중앙'도 한국도 아닌 황석영이 적대시한 바로 그 <조선일보>에 기고를 했다는 사실에서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가 바로 <조선일보>에 기고함으로써 그의 황석영, 이문열의 '작가' 노릇에 대한 양비론적 비판의 근거는 창졸간에 붕괴하고 만다. 한때 내가 진심으로 그의 작가적 존재를 소중히 여겼던 양귀자는 왜 이 시점에서 그냥 '소설'의 뒤에 줄 서 있지 않고 나와 <조선일보>의 뒤에 줄을 선 것일까? 궁금함과 씁쓸함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정과리와 <조선일보> 커플?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곤경에 빠진 사람은 이문열도 양귀자도 아닌 평론가 정과리이다. 알다시피 그는 '개선된' 동인문학상의 최연소 종신 심사위원이다.

매사에 반응이 느린 내가 그 사실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두 개의 상반된 생각이 머리 속을 언뜻 스쳐가는 것을 그대로 방치한 것 뿐이다. 그 두 개의 상반된 생각이란 "정과리가 드디어 <조선일보>도 장악했군!"하는 생각과, "<조선일보>가 드디어 정과리도 포섭했네!"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거기 정과리 대신에 '문지'를 넣어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어진 생각은 "잘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한다 하는 언론권력과 한다 하는 문단권력이 잘 만났다는 생각. 내게는 문화자유주의 신문과 자유주의 문학동인 간의 만남이 어울려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는 것은 이맛살 깨나 찌푸려야 할 일이고, 그건 아직 살롱 의자의 안락함에서 몸을 제대로 일으키지 못한 내게 당장의 발등의 불은 아니었다.

정작 정과리에게 문제제기를 한 것은 '문학과지성사'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조심스럽게 글을 올린, 정과리를 무척 아끼는 익명의 팬들이고 독자들이었다.

그들의 생각은 간단하다. 정과리와 극우 보수신문 <조선일보>와의 동거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거기서 빠져나오라는 것. 이들의 문제제기는 정과리와 <조선일보>가 어울린다는 내 생각이 너무 나간 것이거나 그럼으로써 내가 정과리를 쉽게 포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그들의 충심어린 문제제기를 접하면서 나의 정과리에 대한 그간의 냉소주의를 스스로 비판했다. 최소한 정과리가 <조선일보>에 편안하게 안주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정과리는 과연 그답게 대단히 길고도 언뜻 대단히 정치해 보이는 자기해명의 글을 문지 홈페이지에 올렸다. 나는 그 글이 구차한 자기변명이 될 것이 분명하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그의 글을 정독했다. 예상대로 그의 글은 나의 선입견을 깨뜨리지 못했다.

지난 1988년 그가 쓴 '민중문학의 인식구조'라는 한편의 글을 역시 그와 입장이 달랐던 나는 당연히 전투적 선입견을 가지고 읽은 바 있다. 그런데 그때는 그의 글은 나의 선입견을 보기 좋게 깨뜨렸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과리의 글솜씨는 여전하건만 그때 나를 일정하게 설득했던 그가 이번에는 나를 설득하지 못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불순함 그리고 구차한 변명

그 차이는 한 마디로 불순함에서 오는 것이다. 민중문학론의 맹점을 비판했던 80년대 정과리의 글은 문학적 사유 특유의 근본화하는 힘에 의해 추동되고 있었다면 <조선일보>와의 유착을 자기 변호하는 2000년대 정과리의 글은 그렇지 못하다. 그의 이번 글을 지탱하는 사유는 근원에 가 닿아 있지 못하다.

정과리의 글답지 못하게 일차원적이고 세속적이다. 자신의 잘 짜여진 글로써 하나의 근원적 사유가 전개되어 나가는 고도의 비의적 과정을 곧잘 드러내 보여주던 일급의 비평가 정과리가 저토록 근원에 가 닿는 성찰을 결여한 구차한 글을 쓰게끔 되었다는 것, 그것은 안타깝지만 그의 비문학적이고 불순한 사유가 낳은 필연적 귀결이다.

그의 글이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구차한 자기변명과 궤변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그의 글이 누구라도 간단하게 무너뜨릴 수 있는 너무나 허약한 거짓명제들을 기본 전제로 하고 있다는 데서 필연적이다.

그의 전제 중 하나는 <조선일보>와 동인문학상은 별개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문학과사회> 동인과 비평가 정과리는 별개라는 것이다. 간단한 문제엔 간단하게 대답하는 게 좋다. 우선 동인문학상이 <조선일보>와 독립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상금 5천만원은 어디서 오는 것이며 사고에 실린 "<조선일보>의 성가에 걸맞는, <조선일보>이기에 가능한 세계적 문학상" 운운하는 표현은 무엇인가?

정과리는 동인문학상의 공정하고 객관적인 운영이 곧 동인문학상의 <조선일보>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고 강변했지만 바로 동인문학상을 장식하게 될지도 모를 그 객관성, 공정성, 권위 등의 액세서리가 <조선일보>의 패권주의적 영향력을 강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저들이 상금과 일곱 명의 종신 심사위원에게 걸맞게 적지 않을 거마비를 도대체 왜 내놓겠는가?

또 하나 과연 비평가 정과리는 <문학과사회> 동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분리될 수 있는가? 그는 종신 심사위원 위촉의 수락이 '문학과 사회' 동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문학평론가로서의 정과리의 선택이라는 점을 알아달라고 했다.

나는 그의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정과리를 선택했을 때도 일개 비평가 정과리로서 선택했을까? 미안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비평가 정과리와 동인이자 문학계간지인 '문학과 사회', 한국 유수의 문학출판사 '문학과지성사'의 정체성은 관념적으로는 분리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분리 불가능하다.

정과리는 <조선일보>의 초빙에 개인 자격으로 응했다고 착각할 수 있겠지만 정과리를 <문학과사회>의 핵심적인 일부로서 불러들인 <조선일보>의 판단에는 그런 관념적이고 순진한 착각 같은 것은 발붙일 여지가 없다.

만일 다행히도 정과리의 순진하고 관념적인 두 개의 전제가 맞는다면 정과리는 자신이 낙관적으로 피력한 대로 심사위원 참여는 비교적 잘 마련된 무풍지대에서 한국의 잘못된 문학 풍토를 개혁하는 데 일정하게 기여하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이의가 없지 않다. 동인문학상 하나 개혁해서 정상적인 문학상 제도를 만드는 게 얼마나 한국적 문학풍토의 개질에 도움이 된다는 건지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문학상이 잘못된 문학제도의 가장 문제적 고리인가? 백보 양보해서 문학상제도가 문제라서 정말 제대로 된 문학상을 만들고자 한다면 이를테면 대한민국문학상 같은 출판사나, 신문사, 특정기업의 상업주의와 무관한 문학상에 권위와 대표성을 부여하는 데 노력하는 편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그런데 만일 그의 두 가지 전제가 모두 틀렸다면 어떻게 될까? 그는 개인적으로 <조선일보>의 패권주의적 상업주의에 부역하는 결과가 될 뿐만 아니라 그를 매개로 해서 <조선일보>가 그 이름에 '문학과지성-문학과사회'의 이미지까지 스스럼없이 곁들이는 결과가 될 것이다.

처음에 밝힌 바 나의 냉소주의적 판단은 그것이 그럴 수도 있고, 그렇게 안 어울리는 일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70~80년대 민주화운동이나 변혁운동에 복무했던 많은 사람들이 정부 관료도 되고 각종 정부기관의 이사도 되고 하는 판에 문학과 사회가 <조선일보>와 가까워진다고 해서 무슨 큰 흠결이 될 것인가 하는 생각도 전혀 엉뚱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정과리의 행보에 문제제기를 했고 정과리가 그에 대해 구차한 답변을 함으로써 일이 커진 것이다. 만일 정과리가 그토록 구차한 변명을 하지 않고, 자신이나 <문학과사회>, <조선일보> 등에 비판적인 사람들에 대해 신경질적인 마타도어를 퍼붓지 않고, 자신의 일개 문학상 심사위원 참여에 '안으로부터의 저항' 운운하는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지 않고, 그저 솔직하고 소박하게 동인문학상의 상대적 자율성에 기대를 걸고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고 개인적으로 해명했다면 나는 문제가 이처럼 복잡해지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조선일보>와 동인문학상이 별개라고 생각하는, 단지 개인 비평가 자격으로 그 상의 심사위원 중의 하나가 된 사람으로서는 현명하지 못하게도, 좀더 신중하게 근원적 사유의 힘을 작동해서 힘들여 해 나가야 할 이야기들을 당장의 면피를 위해 되는대로 늘어놓은 것이 문제이다.

"저항의 유일한 장소는 안에 있을 뿐"이라고 말한 것은 동인문학상에 참여해서 <조선일보>의 부정적 측면들과 <조선일보>의 안쪽에서 싸우겠다는 전의를 표명한 것일텐데 불행하게도 그 출사표 격으로 쓰여진 글이 오히려 정작 맞서 싸우고 비판해야 할 <조선일보>를 위한 궤변적 옹호로 가득하고, <조선일보>를 변화시키겠다는 뜻을 가지고 '밖'에서 다른 방식으로 싸우는 '동지'들에 대한 "야수적", "야만적" 운운하는 폭언을 실어나르게 되는 이 아이러니를 정과리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정과리가 말하는 '안'은 그처럼 눈을 뜨고 있기조차 힘들 정도로 너무 깊은 곳이다. 우리는 그냥 이 타락한 세계에서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안'에 있다. 이 보통의 '안'에서 정신차리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큰 일이고 더구나 비판하고 싸우면서 살아가는 일은 그것만으로도 전존재를 거는 일이다.

나는 이제까지 정과리가 섰던 자리면 충분히 '안'이라고 생각하고 그가 했던 역할 역시 훌륭한 싸움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투쟁이 부족했던가? 적진 한 가운데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할 정도로?

아직 시간은 있다

변명은 변명을 낳고, 합리화는 합리화를 낳고,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다는 것은 일상적인 상식이다. 밑그림을 한번 잘못 그리면 자꾸 덧칠을 하게 되어 있다. 작은 실수를 가리기 위해 온갖 무리한 논리를 동원하는 것은 일상의 속인들도 늘 저지르는 과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것을 알고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지식인이 그런 합리화와 변명의 악순환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그는 그 변명과 합리화를 위해 자기가 아는 이론과 지식을 갈수록 더 많이 동원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지식과 논리의 왜곡과 비이성화가, 또 그를 통한 대중의 치명적 오도가 저질러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일러 곡학아세(曲學阿世)라고 하지 않던가. 과연 명민하고 치밀한 비평가 정과리가 자기 자신을 그런 수렁 속에 그대로 방치할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어떻든 아직 시간은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외에도 월간 <말> 9월호에는 '의사의 난을 해부한다'라는 심층기획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기획기사는 김명일 전공의 비상대책위원장의 인터뷰, 의료사회학자(조병희 씨)의 시각에서 본 '의사폐업 사태' 등 심도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월간 <말> 9월호에는 '한국 태권도 문제 있다' '매향리 반미 투사 전만규' '비전향 장기수 좌담' 등 다양할 읽을거리가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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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오마이뉴스 정신을 신뢰합니다. 2000년 3월에 오마이뉴스에 입사해 취재부와 편집부에서 일했습니다. 2014년 10월부터 영국에 3년간 살다가 돌아와 오마이뉴스 정치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