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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늦게 올려 죄송합니다. 이번 글의 주된 질문 내용은 <조선일보>의 성격 규정에 대한 정과리 선생님의 판단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정과리 교수님께 드리는 공개질의서(1)

첫번째 글에서도 보셨다시피, 저의 글쓰기 전략은 정 선생님과 '비판적 지식 집단'의 차이점을 부각시켜 정 선생님께 비난을 집중시키고자 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최소한의 합의점이라도 찾아내고, 정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합리적인 개입 방식이 무엇인지 들어보기 위함입니다.

선생님과 위의 '지식 집단' 사이에 엄청난 괴리가 존재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조선일보> 안에 극우 이데올로그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아직 답변을 안 하셔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의견이 종종 사설과 같은 지면을 타고 노출된다는 것 인정하시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 제가 의도하는 바는, 차이점만을 가지고 유사성을 무시해 버리거나 유사성으로 차이점을 은폐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정도에 그칠 뿐입니다. 정 선생님이 취하신 정치적 선택의 문제는 이 글에서 논외로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살피고자 하는 부분은 글의 중반부, 그러니까 정 선생님이 "(c)는 제가 굳이 대답할 문제는 아닙니다"라고 말씀하시며, '극우 신문이 아니라면 <조선일보>는 과연 어떤 신문인가'라는 의문에 대해 답해 나가시는 부분입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조선일보>가 극우 신문이라고 생각했다면 저는 아마 동인문학상이 아무리 개혁적이라 하더라도 심사위원직을 수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라는 문장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지점에서 선생님은 이미 <조선일보>에 대한 극우적 단죄를 허용치 않고 계십니다.

다만 명백한 보수 이념을 표방하는 신문이라고만 판단하시며, 그나마 이 보수세력의 영향력마저 감소하는 추세라고 생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지금의 정권은 엄격히 정의하면 중도 우파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그 전의 정권들에 비해 개혁적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보수 이념은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약화되었습니다."

이러한 논리 전개는 다음과 같은 함의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설령 <조선일보>에 몇몇 극우 이데올로그들이 있다 하더라도 남한 사회에서 보수주의가 쇠퇴하고 있는 이상 그 영향력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의문 부호로 점철된 뒤이은 반문들은 그러한 선생님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현실에서 여전히 (극우) 보수주의가 득세하고 있다는 판단은 87년 이후 남한 사회가 획득한 민주화의 성과와 정권교체의 의미를 지나치게 축소 조작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계신 것이지요. 따라서 '일군의 비판적 지식 집단'이 보여주고 있는 '안티조선' 운동은 정세 판단의 오류로부터 기인된 것이라 비판하고 계신 듯합니다.


여기서 저는 세 번째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한국사회의 정치, 이념적 정세에 대한 정 선생님의 판단은 아직 더 많은 토론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남한 사회의 (극우) 보수주의 문제는 그렇게 넓은 의미에서의 정세적 판단을 요구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정 선생님께서 이제 현실적 가능태의 모습으로 도래한 '통일'이라는 구체적 정세하에서 남한의 (극우) 보수주의를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묻고 싶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여쭤 보자면, 통일 논의의 정국에서 보수 이데올로그들이 가질 수 있는 정치적 영향력을 정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저의 단견을 말씀 드리자면, 역사적으로 볼 때 (극우) 보수주의의 세확대는 당시 정치인, 지식인들의 정치적 판단 '착오(착오라기에는 너무 큰 실수이지요)'로부터 기인된 면이 큰 것으로 보입니다. 국가사회주의의 발흥을 대한 스탈린의 극좌 선회도 이러한 예가 될 수 있겠고, 당시 바이마르 정부와 의회의 혼란상도 일례가 될 수 있겠습니다.

정 선생님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1920년대와 30년대를 걸친 세계적 대공황기는 극좌-극우 세력의 충돌을 불러왔습니다. 특히 독일에서는, 1차 세계대전 패배 후 전승국에 의해 짊어져야 했던 경제적 부담과 공황의 결과가 맞물려 극우 세력에 대한 국민의 동조가 가속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 시기에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은 극히 미미하였습니다. 대부분의 비판은 히틀러가 권좌에 오르는 과정과 그 이후 '제3제국'의 팽창기에 집중되어 있었지요. 어쩌면 큰 실수처럼 보이지 않는 정치인, 지식인들의 비판 유보가,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오류로 남아있는 경우라 하겠습니다.

이같은 역사적 사례들로 미루어 볼 때, 시급하게 다루어져야 할 문제는 지금 이 시점이 (극우) 보수주의에 대한 제세력의 반격이 필요한 때인지 판단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저의 판단은 '그렇다' 입니다.

너무 극단적인 비교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남한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 즉 '통일 정국'은 그렇게 만만하게 볼 경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동춘 교수가 종종 지적하듯이 통일은 남한사회에서 '혁명'과 같은 정도의 구조적 변화를 촉발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즉, 남북한 사회가 가진 내부 모순들이 통일 과정에서 외면화되어 폭발할 수 있다는 말이겠지요.

물론 어떤 통일 과정을 거치느냐가 관건이겠지만, 현실적으로 선택 가능한 통일 정책이 김대중 정권의 '햇볕 정책' 뿐이라는 점을 상기해 볼 때 이러한 우려는 충분히 고려할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흡수통일론에 대해 현 정부의 '햇볕 정책'이 가지는 우위성은 명백한 것이지만, 정치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 '햇볕 정책' 역시 남북한 지배세력 모두를 통일 한국의 지배 세력으로 연착륙시키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는, 설령 김대중 정권의 통일 정책이 앞으로 계속 유지될 수 있다 하더라도, 통일 과정에서 남북한 지배세력과 기층 민중과의 갈등을 어느 정도 불가피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할 것입니다.

극우 이데올로기가 이념적 위협으로 등장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본격화될 통일 과정에서 그러한 이데올로기는 위에서 지적한 남북한 지배 세력과 기층 민중 사이의 갈등을, 남북한 민중 간의 갈등으로 왜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통일 논의 전반부에 불과한 지금까지는 극우 이데올로그들의 비판이 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북한 정권에 머물러 있지만, 정작 본격적인 통일 과정에서 남북한이 가진 모순점들이 '통일의 부작용'이라는 이름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면, 그들은 비판의 대상을 '섣부른 통일시도' 혹은 '통일 그 자체', 더 나아가 '북한 민중'으로까지 확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남한 민중과 북한 민중 간의 갈등은 '분단 민족의 이질성'이라는 외피적 분석을 덮어쓴 채 정당화될 지도 모릅니다.

만약 통일 과정이 이런 시나리오를 거친다면, 남북한 지배 세력은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은 채 통일한국의 지배 세력으로 온전히 자리 매김될 것이며, 통일의 후유증은 남북한 민중만의 몫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극우 이데올로그들에 대한 제 세력의 반격이 '지금부터'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현 남한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극우 보수주의이기때문에 그들을 비판해야 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러 저러한 특정한 정세에서는 이들을 비판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에서 '비판적 지식 집단'의 주장은 의미를 갖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현재 통일 후유증에 대해 가장 많이 걱정하고 있는 듯 보이는 그들이지만, 정작 그 통일 후유증의 최대 수혜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 역시 바로 그들, 극우 이데올로그들이기때문입니다.

정 선생님께서는 이어서 <조선일보>에게 남한 보수주의의 모든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시며, 현재 남한에서 지배적인 보수주의의 지반은 다른 곳에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를 위해 두 가지 근거를 들고 계신데요, 그 첫번째가 바로 '일상적 보수주의'입니다.

일상적 보수주의의 작동 방식은 이미 잘 알려진 것이므로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지적해야 할 것은 정 선생님이 이 일상적 보수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예를 도입하시는 방식입니다.

"정치적 진보주의는 일상적 보수주의의 한 표현일 수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일군의 비판적 지식집단"에게 오히려 보수주의의 혐의를 걸고 계시거든요. 물론 정 선생님께서는 예 속에서 "어떤 공격적 지식인의 공격적 발언이 지극히 사적인 동기에서 출발했다는 것"만을 언급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정 선생님 글의 뒷부분으로 넘어가면, 전술한 "정치적 진보주의는 일상적 보수주의의 한 표현일 수 있다"는 문장이 확대 적용되면서, "비판적 지식 집단"의 이미지가 앞에서 예로 드신 이 공격적 지식인의 이미지와 정확하게 겹쳐집니다. 정 선생님께서 의도적으로 이렇게 글을 배치하신 것이라면 저로서는 성공적이었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정 선생님께서 다른 무엇보다 먼저 일상적 보수주의의 예로 들고 싶으셨던 것이 이 '비판적 지식 집단(선생님께서는 친절하게도 '패거리'라는 속어 표현까지 곁들여 놓으셨습니다)'의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저 역시 그러한 정 선생님의 판단에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일상적 보수주의의 혐의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으며, 그것은 정 선생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정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시듯이, "한국에서의 보수주의는 경계선이 불분명하고 편재적이며 지배적"이며 "그것이 지배적이라는 것은 그 보수주의에 의해 손해를 보는 사람조차 보수적이라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 선생님 글에서 나타난 일상적 보수주의는 일단 그 개념적 층위에서조차 상당히 애매모호합니다. 다시 말해 <조선일보>가 보여주고 있는 '정치적' (극우) 보수주의와 정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일상적 보수주의 사이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정 선생님께서는 일단 일상적 보수주의의 기원으로 <조선일보>를 지목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십니다. 오히려 그 역으로 <조선일보>의 보수주의가 일상적 보수주의를 바탕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여기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네 번째 질문입니다. 정 선생님께서는 위와 같은 발언을 통해 권력의 기능태에 대한 거시적 분석을 미시적 분석으로 완전히 대체하겠다는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조선일보>의 보수주의와는 구별되는 '일상적 보수주의'가 현재 남한사회에서 지배적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으신 것입니까.


전자의 경우라면, 일상적 보수주의 위에서 <조선일보>의 보수주의가 기능하는 방식을 미시적 관점에서 간략히 개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만약 후자라면, 두 보수주의가 작동방식에서 어떤 식으로 관련을 맺고 얽히며 갈라서는지에 대한 더욱 성실한 분석이 필요하겠지요.

저는 이 지점에서 '안티조선'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강준만 교수와 정 선생님 사이의 유사점을 발견합니다. 일단 두 분 모두 권력의 기능장소로서의 '일상성'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시면서도 그에 대한 명확한 의미 규정을 없이 개념을 사용하신다는 점 때문입니다. 먼저 강준만 교수의 예를 간략하게 들겠습니다. 임지현 교수와 강준만 교수 사이에 갑론을박이 오간 것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임지현 교수의 글에 대한 답글에서 강준만 교수는, 임지현 교수의 '일상적 파시즘'이라는 이론적 표현을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임지현 교수가 <조선일보>에 투고를 하며 그 신문사가 주최한 행사에 참가했다는 의미에서 그를 역비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비판의 그림자에는 임지현 교수가 사용한 개념, 즉 '일상적 파시즘'이 어른거립니다. 일상적 파시즘의 혐의가 강준만 교수에 의해 임교수 자신에게로 되돌려져 있는 것이지요.

문제는 강준만 교수의 비판 방식입니다. 강준만 교수가 차용하고 있는 '일상성'의 이론적 층위가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비판에서는 '<조선일보>에 대한 임지현 교수의 태도'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 적용은 다분히 위험한 것입니다. 이 경우 '일상성'이란 말은 유홍준 교수의 권위주의적 태도와도, 혹은 선생님의 '동인문학상' 참여와도 아무런 매개없이 곧장 연결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식인들의 '일상'이 그동안 비판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무의식' 자체가 이론적 작업의 결과물이었던 것처럼, '일상성' 역시 그러한 작업의 결과물이어야 합니다. 저는 르페브르나 마프졸리의 책 어디에서도 '일상성'을 이론적 작업이 필요 없는 직접적 경험의 소여로 받아들이는 경우를 보지 못했습니다.

강준만 교수가 일으키고 있는 일련의 해프닝들 속에서 정녕 이해하기 힘든 것은, 보기와는 다르게 그가 논쟁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논쟁의 가능성을 없애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대다수의 진보적 지식인들과 소통하며 '안티조선'의 다양한 운동방식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운동방식을 절대화해서 그를 잣대로 상대를 재단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안티조선'의 운동'방식'에 찬성하지 않는 진보적 지식인의 경우도, 무의식적인 혹은 일상적인 '친조선일보 인사'라는 이름표를 달게 되는 기묘한 현상까지 나타나는 것입니다.

물론 '일군의 비판적 지식 집단'에 대한 정 선생님의 비판 근거는, 강준만 교수의 것에 비하자면 상대적으로 설득력을 가지는 편입니다. 하지만 선생님 역시 그 '지식 집단'을 비판하는 방식에 있어 몇 가지 문제점을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이 정 선생님께서 위의 '지식 집단'을 비슷한 이념적 성향을 가진 지식인들의 '패거리'로 판단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이념적 전망을 상실한 채 문화산업이라는 호소기반과 급속도로 타협하기 시작한 '지식 집단'이, 자신들의 "박탈감과 무기력, 원한, 꺼지지않는 욕망 그리고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고지(조선일보)가 바로 저기다"라고 외치는 과정, 그것을 정 선생님께서는 '안티조선' 운동의 본질이라 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 같은 분석은 한 때 유행했던 것이라 더 이상 그에 대해 부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는데요.

다만 예전에는 이런 종류의 사회심리학적 접근이, 80년대 후반으로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지속된 '사구체 논쟁'에 참여했던 일군의 진보적 지식인들을 그 비판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는 것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성명서에 서명한 지식인들의 면면을 살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직간접적으로 '사구체 논쟁'에 관여했던 분들도 계시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상실할 '전망'을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은 분들도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조선일보>에 대해서는 이념적 다양성이 존재한다고 말씀하시면서도, 이 '비판적 지식 집단'의 이념적 다양성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언급도 없는 정 선생님의 태도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비판적 태도의 불균형이라 보여집니다. 저는 지금부터 '비판적 지식 집단'이라는 정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지 않겠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위에서 제가 강준만 교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언급했던 '일상성'에 관해 정 선생님이 취하신 태도입니다.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정 선생님께서는 일상적 보수주의의 일례로 '안티조선'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지식인들을 지목하시는 듯 합니다. 하지만 정 선생님의 글 어디에서도 이 지식인들이 가진 보수주의의 일상성을 분석하는 부분을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예로 언급하신 한 '공격적 지식인'과 이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의 이미지 교차가 있을 뿐입니다. 정 선생님께서 사용하고 계시는 사회심리학적 접근은 정작 보수주의의 일상성을 드러내는 데 하등 효과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정 선생님의 설명을 그대로 빌려 <조선일보>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문명 속의 불안>을 인용하셨는데요. 프로이드가 언급한 '문명'은 이 경우에는 '통일 정국(반공 이데올로기의 점진적 와해)'으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며, '과학과 테크놀로지에 대한 원한'은 '극좌 이데올로기=일부의 지식인에 대한 원한'으로 치환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일보> 역시 선생님께서 갈파하시는 일상적 보수주의의 일례가 되는 셈인데요. 심리적 불안을 외부의 대상에게로 투사한다는 식의 프로이드적 설명틀은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일상적 보수주의와 같은 정치적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상성'에 기반한 분석이란 "일상적으로 보수주의가 모든 이에게 존재한다"는 가정을 넘어서 특정한 장에서의 구체적인 발현 양태에 대해 체계적으로 언급하실 때만 의미를 가지는 것 아닐까요. 그리고 이 지적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강준만 교수에게도 고스란히 돌려져야 할 것입니다.

이제 정 선생님의 두 번째 근거, <조선일보>에게 남한 보수주의의 모든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제기하신 두 번째 근거에 대해 논의해 보겠습니다.

정 선생님은 "문제의 틀이 달라졌다"고 말씀하시면서 남한사회 보수주의의 진정한 문제점은 사회 전체에 만연한 '상업주의'일 수 있다고 주장하십니다. 그리고 이 상업주의적 호들갑의 토대로서 '신자유주의'와 '남한 자본주의의 천민성'을 꼽고 계십니다. 글이 이미 충분히 길어졌으므로 간략히 언급해 보겠습니다.

남한사회에 만연한 상업주의적 풍토가 과연 '신자유주의'를 기원으로 하고 있는지, 혹은 '남한 자본주의의 천민성'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인지는 더욱 논의가 필요하겠습니다. 그러나 정 선생님께서 이를 남한의 보수주의와 관련 지어 설명하시는 대목에서 몇몇 기이한 논리전개가 발견됩니다.

정 선생님 글의 한 대목을 인용하겠습니다. "...신자유주의도 엄격하게는 보수 이념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한국 언론에서 신자유주의의 적극적 추수자는 <조선일보>가 아닙니다. 또한, 보수 세력의 일부 인사들에 의한 극우적 발언은 별개의 것으로 이해되고 분석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수 이념의 영향력 약화에 직면한 위기의 표현 이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섯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한국 언론에서 신자유주의의 적극적 추수자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또한 <조선일보>는 그의 적극적 추수자가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제 눈에 비친 <조선일보>의 전반적인 논조는, 오히려 정치적 (극우) 보수주의와 경제적 신자유주의의 두 이념이 서로 길항하면서 나타나는 것이라 보여집니다. 여기서 '신자유주의'란 선택가능한 여러 이념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구조화된 이데올로기'로서 강제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요.

이렇게 본다면 <조선일보>의 정치적인 극우 발언은 '신자유주의'라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결합하면서만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선생님께서는 그것을 별개의 것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정 선생님의 답변이 저의 궁금증을 풀어줄 것이라 믿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선생님께서 극우 보수주의자들의 발언을 한국의 상업주의 풍토와 별개로 이해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상업주의는 보수 진보를 막론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남한 자본주의의 천민성'을 이러한 현상들의 기원으로 고려한다면 지금의 보수세력은 비판 받아야 마땅하지만, 지금의 상업주의적 풍토는 좌우를 막론하여 득세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비판은 온전치 못하다는 말씀인데요. 저는 정 선생님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다만 정 선생님께서 극우 보수주의자들의 발언을 별개의 것으로 이해하고 계시다면, 이번 진보적 지식인들의 현실 개입 역시도 그 상업주의적 속성과 별개로 취급, 분석돼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정 선생님께서 제기하신 의문, "오늘의 진보 세력은 보수로 변신한 것일까요?"라는 의문은 그 뒤에나 유효성을 인정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글이 너무 장황해지고, 길어졌는데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 선생님의 글에 대한 저의 인상을 잠깐 덧붙이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저는 글을 읽는 내내 정 선생님께서 당황하고 계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요. 강준만 교수와 '안티 조선'에 대한 대안적 비판이 필요한 시점에서, 남한의 극우 이데올로그들에 대한 과소평가로 글의 논조를 결정하셨다는 것이 그러한 정 선생님의 당황함을 잘 보여주는 예라 생각됩니다.

즉, "<조선일보>에 적대할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사람들을 모두 적으로 몰아세우는" 진보적 지식인들에 대한 정 선생님의 분노가, 오히려 정 선생님의 '친조선일보적' 성향으로 이해되는 것에 대한 당황함 말입니다.

저는 정 선생님이 '친조선일보 인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다만 이번 상황에서 선생님이 취하신 균형적 태도는 그렇게 균형잡힌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정 선생님의 막대기 구부리기를 제가 잘못 이해한 탓일까요.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덧붙이는 글 | 기사라고 하기에는 글이 너무 길어져 죄송합니다. 2번의 기사로 마무리 하려던 저의 욕심 탓입니다. 그리고 제가 넷맹인 탓에 아직 <문학과지성사> 사이트의 게시판에 제 글을 링크하지 못했는데요. 혹시 제 글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시는 독자분이 계시다면, 저 대신 링크를 걸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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