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8.15 이산가족 방문단의 북측 대표가 최덕신씨의 부인 류미영씨(천도교청우당 위원장 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남한의 언론들은 의외의 인물이라는 데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북한측의 의도에 촉각을 세우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최덕신씨는 왜 북으로 갔을까

최덕신씨는 휴전협정 남한대표, 외무부장관, 서독 대사 등을 역임한 사람이라 한다. 국회도서관 싸이트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해보니 남한에서 저술한 책이 5권, 북한에서 나온 저서가 1권 나오는데, 후자의 경우 제목이 <만고의 위인 김정일>(특수자료로 분류)이다. 언뜻 봐서 (<조선일보>의 표현이 아니더라도) 황장엽씨 생각이 난다. 왜 어떻게 해서 그는 북으로 넘어가게 된 것일까.

언론의 관련 기사에서 그와 관련된 부분을 찾아보았다. 표현이 조금씩 다르다.

- 남편 최씨가 공금횡령 등의 비리에 연루되자 남편과 함께 지난 77년 9월 체류중이던 일본에서 미국으로 망명해 미주지역에서 반정부활동을 벌이다 86년 4월 북한으로 갔다. (<연합뉴스> 8월 8일자)

- 군 장성 출신인 최씨는 5·16직후 군사정부에서 외무부장관, 서독 대사, 통일원 고문 등을 지냈으나 이후 민정이양 과정에서 소외되자 아내 유씨와 77년 미국으로 망명, 반정부활동을 벌이다 86년4월 북한으로 넘어갔다. (<대한매일> 8월 9일자. 옮긴이주: 민정이양은 63년)

- 유씨는 남편이 박정희(朴正熙)정권에 대항해 반정부활동을 벌이다 월북하자 그 해 9월 바로 뒤따라 북한행을 택했다. (…) 유씨는 남한에 두명의 여동생을 비롯해 가족과 친척이 살고 있으며 5명의 자녀 중 장남 건국(建國·58)씨는 독일에서 범민련 해외본부 업무를 맡고 있어서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동아일보> 8월 9일자)

- 남편 최덕신은 지난 61년 5·16 직후 남한에서 외무부장관으로 재직했으며 동백림 사건 이후 77년까지 천도교 교령을 지내다가 공금횡령 등 비리로 교단의 의혹을 받자 그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에서 지내던 그는 86년 4월 부인과 함께 월북했다. (<국민일보> 8월 9일자)

- 76년에는 다시 미국으로 정치 망명을 했는데 그의 외국행에는 천도교 교령 재직시 거액을 횡령했기 때문이라는 설과 박 전 대통령이 자신의 공을 알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조선일보> 8월 9일자)

- 그는 70년대 2대에 걸쳐 천도교 교령을 지낸 남편과 함께 77년 9월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86년 4월 북한으로 갔다. (<한겨레> 8월 9일자)

- 류씨는 1921년 1월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남편 최씨가 공금횡령 등의 비리에 연루되자 남편과 함께 지난 77년 9월 체류중이던 일본에서 미국으로 망명했다. (<경향신문> 8월 9일자)

<조선일보>는 남북방문단 명단발표 사실을 (다른 신문들과 달리) 1면
이 아닌 다른 면으로 돌리면서 <팔면봉>이란 코너에선 "越北 崔德新씨 부인이 北 이산가족 서울 방문단장. 우리 측 訪北 단장은 脫北者 시켜?"라고 하더니, 10일에는 <만물상> 칼럼에 등장시켰다. 그 글에서 표현된 최덕신씨 망명 경위는 이렇다.

- 그는 지난 76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해 반한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망명한 동기는 천도교 교령 재직시의 공금횡령이 문제되자 "박대통령이 봐줄 줄 알았으나 봐주지 않자 토라져 망명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망명 후 미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박 대통령 비난에 앞장섰던 그가 역시 장군 출신인 반한 운동가 최홍희를 만나면서 '북행길'이 열렸다. (<조선일보> 8월 10일자)
(<조선일보> 9일자 4면에 실린 기사에서는 "천도교 교령 재직시 거액을 횡령했기 때문이라는 설과 박 전 대통령이 자신의 공을 알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고 썼다---편집자)


망명 이유를 적시하지 않은 <한겨레>를 제외하고서, 언론들이 거론한 월북 이유는 대강 ▲정권소외설 ▲공금횡령설 ▲반정부활동설 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분야에 대해 잘 모르는 나로서는, 게 중에 정답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가 함께 작용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런데 9일자 <연합뉴스>에 바로 최덕신-류미영 부부의 아들 최건국씨의 인터뷰가 실렸다. 그 기사의 일부분이다.

[연합뉴스] 최덕신씨 아들 인터뷰(부분)

<기자: 부친은 외무장관을 지냈고 독일 대사를 역임했다. 부모님이 북한에 영주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최건국: 김일성 주석과의 만남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던 것 같다. 아버지는 군단장을 지냈고 외무장관을 거쳐 박정희 정부에서 서독 대사를 지낸만큼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으나 미국에 나가 살면서 김일성 주석의 통일토론 제의를 수락해 76년 처음 북한을 방문했다. 아버지는 2년뒤인 78년 다시 북한을 방문했으며 그 뒤부터는 거의 매년 방북하면서 김 주석을 만났고 북한 체제를 목격하게 된 것 같다. 직접적인 계기는 김주석의 '인력(引力)' 때문이었다고 본다.

기자: 부친이 남한을 떠난 동기는 무엇인가.

최건국: 유정회 사건 등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당시 청와대측이 박정희 대통령과 친했던 부친에게 '잠시 외유'를 권고 내지는 종용했던 것 같다. 당시 나는(최건국씨) 삼성물산 프랑크푸르트지점에 근무했는데 박 정권 당시까지만해도 회사를 떠날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회사를 떠나야했다.

기자: 일부 언론에서 부친이 '동백림사건'에 가담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최건국: 전혀 사실과 다르다. 일부에서는 부친이 북한에 살고 있는 아버지(최건국씨 조부)를 만나려 북한과 접촉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동백림사건 직전인 63년 6월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직접 우리 신당동 자택을 찾아와 북한에 살고 있던 나의 조부가 사망했음을 전해줬다. 돌아가신 줄 알고 있는데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만나러 북한과 접촉했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또 아버지가 동백림사건으로 독일 대사 근무 3년 11개월만에 송환돼 독일 정부가 현지에서 4년을 근무한 외교관들에게만 수여하는 '대십자훈장'을 받지 못했으나 2년뒤 독일 정부가 그 사건과 아버지가 무관하다는 사실을 알고 뒤늦게 훈장을 수여한 바 있다.>

정설: 이론의 여지가 없는?

남한 언론이 '정설'로 또는 그에 준해서 보도하고 있는 '공금횡령설, 박정희에 대한 토라짐설'에 대해서 물어보았더라면 어떻게 대답했을지가 궁금하다.

최건국씨는 현재 독일에서 남북무역에 종사하고 있고, 위의 어느 기사와는 달리, 자주 서울과 평양을 오가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또 <조선일보>의 <만물상> 칼럼이 최덕신씨가 첫 방북을 했다고 말한 시기(81년 6월)도 아들의 말과 다르다.

남한에서 금기시되었던 인물이고 가족이었을테니 사실관계가 다소 혼선을 빚을 수 있다는 점은 이해 못할 바 아니다. 하지만 그 어떤 혼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최덕신씨가 북에 가게 된 이유만큼은 확고부동한 '정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일까.

최건국씨는 아버지가 북한에 간 계기로서 '김일성 주석과의 만남과 인력' 및 '타의에 의한 외유'를 들고 있다. 거기에 다른 사유가 결합해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어쨌든 북행길 이유에 대한 '다른 식의 설명'이다. 그런 이견이 존재할 수도 있음은 애초부터 상정할 여지가 없었던 것일까. '아들의 아버지 감싸기'일텐데 무슨 증거능력이 있느냐고 치부해버리면 그만일까. 아니 그렇다면 오히려 '당사자의 주장'이란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

나는 최덕신씨 망명에 대해서 정확히 판단할 능력이 없거니와(다른 판단 근거가 있으신 분은 글을 올려주시길), 북한의 단장 인선이 가져올 영향이 어떠할지에 대해서도 잘 가늠할 수 없다. 그것을 분명히 해두면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이제는 예전과는 달리 '북한에 대한 보도'도 정확성과 균형성을 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이다.

당장 최덕신씨 아들도 인터뷰가 가능한 것으로 드러났고, 8·15 때는 류미영씨도 취재 범위 안에 있을 것 아닌가. 예전에는 북한 관련 보도는 어차피 확인도 안 되거니와 항의나 반론을 받을 일도 없으므로 '뭐라고 써도 안전하다'라는 말이 돌기도 했다는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갈 것이라는 거다.

그리고 또 한가지 드러나는 사실. 그동안 남한의 보수세력들이 북한을 향해, 이산가족 문제는 정치적 사안이 아니라 인도주의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일 뿐이라고 강조해 왔는데, 정작 이산가족 상봉이 실현되는 국면이 오자 남한에서도 정치적 측면에서 부각되는 면이 있다는 점, 아니 보수세력들이 더욱 정치적으로 민감해한다는 점이다. (사실 '민감한 문제들' 많다. 의용군, 부역자, 월북자…등. 그걸 제기하면 '50년만의 상봉 드라마'에 딴죽거는 것처럼 보여서 자제하고 있는 것일 터이다.)

이번 문제의 제기는, 다른 사람은 다 인도주의로 대한다 하더라도, 그들만큼은 인도주의로 대할 수 없는 '정치적 이산가족'이 존재한다는 것을 외치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남북간 화해무드의 전개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이 일은 그러나 앞으로 하나둘씩 불거질 '예기지 못한, 하지만 50년동안 잠복해온' 문제 중 작은 하나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