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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일자 <조선일보> 사설 제목은 '보안법이 유례 없다니'였다.

제목에서부터 '색깔'이 선명하다. 제목에서 쉽게 유추되는 것처럼 사설의 요지인 즉, 국가보안법은 한국에만 있는 유별난 법이 아니라는 거다. 구체적으로 '독일 미국 등 선진국'의 예를 들고 있다. 당연히 '한국만 그런 것도 아닌데 웬 난리들인가'하는 항변과 공격의 뜻이 읽혀진다.

우리는 보통 어떤 유별난 존재를 강조할 때 '유례가 없다'란 말을 쓴다. '유례(類例)'란 뭘까. 한자 뜻 그대로 '비슷한 사례'를 의미하는 말일 것이다. 모르면 몰라도 지구상 어느 나라 치고 '체제의 안전과 질서를 확보하고자 하는 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라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또 그 전부가 '국가보안법과 같은 법'을 갖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비슷하면 '유례'에 포함되며, 어느 정도 색다르면 '유례가 없다'라고 할 수 있는 걸까? 과연 한국의 국가보안법은 다른 사례들과 어느 정도 비슷하고 어느 정도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국가보안법 유례 존재론'이라는 것

그것을 살펴 보기 앞서 '국가보안법 유례 존재론'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보자. 이제까지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국가보안법 존치론'의 주장을 보면 '한국은 남북대치라는 특수한 상황에 처해있다' '북한의 태도가 아직 변하지 않았다' 등 특수론적 정황 논거가 주된 근거였고, 이번 사설과 같은 '다른 나라도 유사한 법제가 있는데 뭘'이라는 설명(보편론적 명제?)은 보조 논거로 사용된 것이 아닌가 한다.

<조선일보>와 한나라당이 기회만 있으면 강조하는 '상호주의' 즉 '노동법 규약 개정과 연계된 국가보안법 논의'라는 것도 전자(前者)에 기반을 둔 것으로서, 특수주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국가보안법은 1948년 제정 당시부터 이미 한시적인 성격이 표방되었던 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 사설에서 '독일 미국 등 선진국'의 사례를 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남북관계의 특수성이 변화하는 양상에 대응하는 수세적인 논리인가. 아니면 남북관계가 어떻게 변하든 '국가보안법 류'는 보편적으로 필요하다는 적극적인 주장인가.

얼마 전 '자유경제원' 홈페이지에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모임' - 이 단체는 <조선일보>의 이른바 최장집 사상 검증을 적극 지지했던 곳이다 - 의 한 변호사가 '통일 후에도 필요한 국가보안법'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던데, 그와 상통하는 장기 포석인 것인가.

그리고 한 가지 더. 외국의 사례를 한국의 상황에 끌어들이는 것에 대해선, 어떤 사안이든 일단 주의를 요한다 할 것이다.

예컨대, 외국에 주둔한 미군이 범죄를 저지른 사건이 발생했다고 하자. 동서의 고금을 뒤지면 엄청난 수의 유례가 나올 것이다. 그보다 심한 사례도 있을 것이요, 그냥 어물쩡 넘어간 사례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미군 범죄인데 일본에선 클린턴이 사과를 전했다'는 것도 유례로 쓰일 수 있다. 외국의 예라는 것은, 좋은 것은 취하고 좋지 않은 것은 반면교사로 삼아 취하지 않을 때에라야 그 의미가 있는 것일 터이다.

더욱이 한국같이 '외국을 끌어들이는 장난'이 횡행하는 곳에선, 외국 사례들의 정확한 실상과 맥락을 잘 파악하는 게 중요할 것이며, 또 외국에 무엇이 있냐 없냐가 국내에서의 적절성보다 우선시되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이 글에서도, 외국의 사례가 어떠하냐와 국가보안법을 어떻게 해야 하나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직접적 연결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님을 먼저 분명히 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조선일보> 보안법이 유례 없다니

각설하고 이제 구체적으로 <조선일보> 사설을 살펴보자.

"16대 국회에서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가 주요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18일 국회 토론회에서 한 논자는 "7조의 고무, 찬양, 동조 규정은 위헌성이 있으며 세계 어디에도 없는 시대착오적인 법"이라며 폐지를 주장했다.

보안법 폐지론자들은 보안법이 반인권적이고 남용될 소지가 있다는 등의 이유를 내세워 개정이 아닌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법은 남용의 소지를 안고 있다. 그것은 법의 존재 가치와는 별개의 문제다. 인권침해요소나 남용소지가 있다고 해서 국가보안법 자체를 폐지할 수는 없는 이치다."


이 첫 문단도 비판의 여지가 충분히 있지만 - 국가보안법은 운용상 남용의 소지가 있어서만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가 문제인 것이므로 - 사설의 중심 내용은 다음에 나오므로 일단 넘어가자.

한 가지, 위에 나온 국회 토론회의 '한 논자'는 바로 참여연대 박원순 사무처장이다. 박원순 변호사로 말하면, 참여연대와 총선시민연대 간부 이전에 변호사이며, 국가보안법에 관한 한 한국의 그 어느 법학자보다 탁월한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이미 방대한 자료와 치밀한 분석을 바탕으로 도합 1200여 페이지에 달하는 <국가보안법연구> 시리즈를 출판한 바 있다. - 1권 변천사(1989) 2권 적용사(1989) 3권 폐지론(1992).

따라서 이번에 <조선일보> 사설의 직격탄 대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박원순 씨가 어떻게든 반박을 가하지 않을까 생각되며, 또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믿는다. 지난 총선 때 <조선일보>가 주도한 총선연대 음모론에 대해 수세적으로 대응했던 모습을 다시 보이지 않기를 기대한다.

"독일 미국 등 선진국도 우리 보안법과 같은 체제수호법을 오래전부터 유지해 왔다. 일부 조항은 우리 보안법보다 훨씬 엄격하고 가혹하다."

"우리 보안법과 같은 체제수호법..." 여기서 <조선일보>가 말하는 '국가보안법의 유례'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한국의 '체제수호법'은 유엔 인권이사회로부터 폐지 권고까지 받았는데, '독일 미국 등 선진국'의 경우도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다. 안 그렇다면 유엔이 약소국이라고 차별하는 건가.

독일의 경우

"우리의 보안법과 같은 조항을 형법 속에 포함시켜 운용하고 있는 독일의 경우 조문도 우리의 2배(80조에서 152조까지)에 달할 정도로 많을 뿐만 아니라 내용도 다양한 상황에 대비할 수 있도록 훨씬 구체적이다.

예를 들면 보안법 반대론자들이 대표적으로 폐지를 주장하는 고무찬양죄, 불고지죄 등도 엄연히 포함되어 있다. 우리의 반국가단체에 해당하는 '위헌 조직'의 찬양, 선전물 제작·반포는 물론 인터넷에 띄우는 행위에 대해서도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했으며, 위헌 조직의 표지 사용도 금지하고 있다.

남북정상회담 후 우리 대학가에는 인공기가 공공연히 걸렸어도 단속이 되지 않았다. 불고지죄도 우리는 친족의 경우 경감조항이 있지만 독일은 그런 것이 없을 뿐더러 불고지에 대한 처벌 범위가 우리보다 훨씬 넓다.

침략전쟁 예비, 내란, 간첩죄에 대해 고지하지 않을 때 처벌하는 것은 말할것도 없고 화폐·유가증권·신용카드 위조, 중한 인신매매 등에도 이 조항을 적용하고 있다.

공산당 불법화 이후 생겨난 '후계기관'에 대해서는 헌법보위청이 지속적으로 감시해 위반 사항이 적발될 때는 처벌하고 위헌조직의 태업행위를 훈련하거나 훈련시키는 행위, 탐지행위, 예비행위 등도 형사처벌의 대상이다."


나는 법률 전문가가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부터는 주로 박원순 변호사 등 관련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를 재구성하는 방식을 따르겠다. 인용한 자료는 맨 밑에 밝혀놓겠습니다.

그런데 가만, "우리의 보안법과 같은 조항을 형법 속에 포함시켜 운용하고 있는 독일의 경우..."라는 말에서부터 독일이 한국과 과연 유사한지 의아해진다.

국가보안법의 특징 중 하나는 무엇보다도, 일반 형법과 상당한 중복에도 불구하고 '특별법' 형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입법 형식상 차이는 '유사성'을 조각하는 사유가 못 될 정도로 사소한 것인가?

그렇다면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관련 조항을 형법으로 대체하자는 민주당 일부 의원을 비롯한 '형법흡수론자'의 의견에 대해선 <조선일보>는 어떻게 보는지?

어쨌든 독일(서독)의 경우 '위헌 조직'에 대한 '독특한 입법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박원순 변호사도 인정하는 바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었을까. 바로 바이마르공화국을 파괴했던 나치즘 때문이다.

2차대전 이후 그 나치즘에 대한 경각심 속에서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본질서'를 파괴하는 '위헌 조직'에 대한 처벌을 법제화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법이론이 유신헌법에서부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용어로 도입되면서, 한국에서 반공국시론의 법률적 근거로 기능하게 된 것이다.

서독의 연방헌법재판소가 나치즘만 불용(不容)한 것이 아니라, 좌익세력인 사회주의국가당(1952년)과 독일공산당(1956년) 등에 대해서도 위헌 판결을 내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68년 독일공산당의 대체조직이 탄생하여 활동 중이고, 통독 이후에는 동독 공산당의 후신인 민주사회주의당 역시 1998년 연방의회 선거에서 40여석을 확보하는 등 정치활동을 벌이고 있다. "서독의 위 법률들이 생성되고 활력을 가졌던 것은 냉전이 격화되었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독일의 형법과 결사법(結社法)은 ▲"선전수단 또는 선전행위가 국민계몽, 위헌적 계획의 방지, 예술 또는 학문연구, 학설, 시사경과, 역사에 대한 보고 또는 이와 유사한 목적에 공(供)하는 것인 때에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조항 등의 엄격한 제한이 있고 ▲위헌정당 또는 조직으로 판결난 기관의 선전수단에 대해서만 처벌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보안법과 같은 광범한 기본적 제약이 있을 수 없으며 ▲현실적 운용 면에서도 지극히 제한적이고 합리적이라는 것이다(박원순 변호사).

다음으로, 사설에서 "우리는 친족의 경우 경감조항이 있지만 독일은 그런 것이 없을 뿐더러 불고지에 대한 처벌범위가 우리보다 훨씬 넓다"고 언급된 불고지죄 조항을 보자.

불고지죄 조항은 다른 나라의 법제에도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나 박원순 변호사에 따르면, 독일의 경우 "(불고지죄 조항상) 신고 의무의 대상이 정권안보적인 정치형법조항이 아니라 사회생활의 중대한 법익으로 되어 있으며, 신고의무의 예외가 합리적으로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과 같은 문제점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한국의 경우 '국가비밀'이 너무 광범한 나머지, 언제라도 주변 친척이 '국가 기밀 탐지·수집'죄로 문제가 되는 날이면 불고지죄를 면할 길이 없게 되거니와, 독일과는 다르게 '직무과정에서 취득한 비밀(변호사, 의사, 변리사, 공증인, 성직자, 기자 등)'도 보호되지 않고 있다.

미국의 경우

"미국의 수정된 사회안전법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형법과 별도로 사회안전법을 운용하고 있으며 '전체주의나 독재체제에 기여하는 행위'를 처벌하고 있다.

독일은 통일 후에도 체제수호를 위한 법운용을 과거와 같이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우리는 본격적인 남북화해는 고사하고 이제 겨우 정상회담 한번 한 것뿐인데 벌써부터 우리 체제수호 근간 중의 하나인 보안법을 폐지하자는 주장이 국회에서 나오고 있다.

게다가 '세계 어디에도 없다'는 근거없는 주장과 함께 말이다.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도 노동당규약 전문 등 북한식 보안법의 개정을 언급한만큼 우리의 보안법 개폐논의는 지금으로서는 소모적일 뿐이다."


미국의 경우 기존의 국가보안법(일명 '스미스법')이 형사법전에 원형대로 남아 있으며, 그와 별도로 사회안전법(= 국내안전법, 전복활동통제법), 공산주의자규제법 등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도 한국의 국가보안법과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다.

▲미국 형법의 간첩죄는 '국방정보' 또는 '국방기밀'에 한정되며 그 구성 요건과 행위 양태가 면밀하게 특정(特定)되어 있다. ▲스미스법, 국내안전법, 공산주의자규제법 등은 1940년대 이후 미국이 반공의 열풍에 휩싸였을 때 등장하고 효력을 발휘했으나, 1960년대 이후에는 일부 조항이 위헌으로 선언되고 적용이 자제됨으로써 사실상 사문화한 상태이다.

법 적용면에서도 보면, 매카시즘이 한창이었던 1950년대에도 미국에서는 사법부가 여러가지 중요한 위헌 선언을 내리고 사법적 절차를 보장하는 등 시민의 기본권을 방어하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러한 상황으로 인해 행정부는 많은 사건을 기소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쨌든 당시엔 '국가보안법류'가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겠는데, 지금은 당시를 어떻게 보는가. 냉전시대 민주주의의 상처, 미국 지성사의 오점이라는 그 악명높은 매카시즘과 불가분의 것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지나간 과거 역사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비판세력의 위축으로 인해 "그 결과 미국인들은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거나 대안을 마련할 기회를 놓쳤으며 미국사회는 아직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장호순 교수)"는 것이다.

유례? 유물!

이상을 요약하면 이렇다.

'독일 미국 등 선진국'의 안보 관련법은 시민의 기본권 침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많은 장치(와 엄격한 적용)가 있으며, 국가보안법과 유사해 보이는 법들은 냉전시대의 산물로서 '역사적 유물'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 미국 등 선진국'과 비교함으로써, 오히려 한국에서 얼마나 냉전형 법제가 오래 지속되고 있는가가 드러나는 셈이다. 그들의 차이가 과연 그들이 하나의 '유례'로 묶일 수 있는 정도의 작은 것일까. 국보법의 '유례'로 언급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그 법들이 억울해할지, 아니면 아직도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고 기뻐할지...

한국의 국가보안법의 유례를 찾는다면 꼭 맞는 것이 하나 있긴 있다. 바로 일제시대 치안유지법이 그것이다.

치안유지법 제1조의 '국체변혁을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한 자'는 제정 국가보안법 제1조 '국헌을 위해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그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한 자'가 되었다.

1948년 제헌의회에서 국가보안법이 논의될 때 일부 반대의원들이 내세운 "치안유지법과 똑같은 비민주적 제국주의의 잔재"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조문 내용과 형량이 유사할 뿐 아니라, 일제시대 치안유지법 하에서 경찰업무를 본 사람이 해방 후 국가보안법 피의자도 다루었을 터이니, 그 유사성을 무엇과 비기리오.

요컨대 "(국가보안법) 7조의 고무, 찬양, 동조 규정은 위헌성이 있으며 세계 어디에도 없는 시대착오적인 법"인가 아닌가. 분명한 것은, 세계 어디에 무엇이 있든 국가보안법의 위헌성과 시대착오성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며, 더구나 세계 어디에 비슷한 게 있는가 했더니 '독일 미국 등 선진국'의 역사책 속에 있더라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기사에서 주로 참고한 자료들입니다. 더 자세한 사항을 찾아보고 싶은 분들도 참조하세요.

박원순, <국가보안법연구 3-국가보안법폐지론>, 역사비평사, 1992; 장호순, <미국의 국가보안법>, 민중정치연합 기관지 <진보> 1994년 5월호; 장호순, <국가안보와 사상의 자유: Dennis v. United States를 통해 살펴 본 1950년대 미국의 경험>, <민주법학> 제7호,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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