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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부터 어제(6월2일)까지 최근 세간의 화제를 모으며 상영되고 있는 한국영화 3편을 보았다.

박신양과 안성기라는 걸출한 연기파 배우의 호연이 돋보인다는 '킬리만자로'(감독 오승욱)와 칸느 영화제에서도 인정한 걸물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 재론의 여지없이 한국 청춘스타의 한 축을 이루는 배우인 유지태, 김하늘이 주연한 '동감'(감독 김정권)까지.

2000년 봄 현재 한국영화에 대한 낙관적 미래인식은 누구랄 것 없이 보편적이다.

스크린 쿼터 폐지, 혹은 축소라는 미국의 계속적인 압박이 없진 않지만, 우리의 예쁜 여배우들이 눈물 글썽이며 붉은 머리띠 질끈 동여매고 광화문에 집단적으로 나타났다고 치자.

언제라도 우리 관객들은 동정과 연민을 실어 "스크린 쿼터 철폐 결사반대!"를 덩달아 외쳐줄 것이고, 21세기 최고의 문화강자가 될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영화를 향한 자본의 구애도 갈수록 집요해지고 있다. 좋은 일이다.

늘어난 영화 홍보.마케팅 비용으로 인해 많은 이벤트와 TV.신문광고를 할 수 있다는 것과 품질이야 논외로 두더라도 '부산국제영화제'를 필두로 도시마다 경쟁적으로 국제 영화제를 유치해 타국에 한국영화를 알리고 있는 것도 '자국 영화 시장 점유율 40% 육박'이라는 '한국영화 전성시대'를 예견하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외부적 환경은 거세시키고 냉정히 한번 보자. 한국 영화산업의 소프트웨어라 할 한국영화, 그 작품 자체는 어떠한가? 야박하다할 사람도 많겠지만 위 세 편을 두고 보자면 낙제점이다.

물론 '오! 수정' '동감' '킬리만자로'라는 영화에 건져낼 게 하나도 없다는 말은 아니다. 감동이 됐건, 성찰의 계기를 제공했건, 단순히 즉물적 재미를 주었건 분명히 세 영화에는 나름의 미덕이 있다. 그러나 세 작품 공히 영화를 보기 전 관객이 가지기 마련인 '기대 심리'의 절반도 만족시키지를 못한다. 내가 낙제점이라 말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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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영화에 덧씌워진 칭찬일색의 현란한 신문 전면광고와 친구 아들 결혼식에서나 내뱉을 말을 평론 혹은, 기사로 쓴 주례비평은 많이 보았을테니, 나는 위 영화들의 장점은 접어두고 만지면 쓰라린 약점 몇 개만 지적하겠다.

자, 시작한다.

"그 설산(雪山)엔 더 이상 표범이 살지 않는다."- '킬리만자로'

"스포츠 신문을 보고, 재밌을 거라고 생각해서 왔어요. 근데 이게 뭐예요. 다시는 신문기사만 보고 영화 안볼래요"
기자의 옆에서 함께 '킬리만자로'를 관람한 조창현 씨(경기 과천. 26세)의 말이다.

'킬리만자로'는 상영시간 90분을 맞추기 위해 억지로 끼워 맞춘 초등학생용 퍼즐같은 영화다. 편집의 어색함으로만 보자면 이 영화는 한국영화의 시계를 80년대로 돌려놓은 것 같다. 보는 내내 신경을 써 영화에 집중하지 않으면 대체 스토리가 어디서 어디로 튀는지 알 수가 없다.

박신양의 '소리만 내지르는 오버 연기'도 눈에 거슬린다. '국민배우'라는 이상한 조어(造語)의 주인공 안성기도 3류의 시나리오와 어처구니없는 상황설정까지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었던지 동선과 대사가 어색하기 그지없다. 그 어색함과 과장된 고함소리, 뻔한 결말 속에서 '명보 아트홀' 30여명의 관객 중 10명은 졸고 있었다.

이런 영화를 두고 '핏빛 느와르의 진수'라고 광고문구를 뽑은 카피라이터에게 묻고 싶다.
"당신, 대체 '느와르 영화'가 뭔지나 아는가?".

'일상은 가장 아름다운 행복'이 아니다? 홍상수 감독은 싸르트르를 싫어한다?- '오! 수정'

흑백으로 보는 서울의 겨울은 디스토피아다. '황량함'과 '쓸쓸함', '환멸'이란 단어가 절로 떠오르는. 홍상수는 그 속에서 늘상 같은 곡조와 목소리로 우울한 노래만 부른다.

'오! 수정'은 한 마디로 하자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3편'이다. 아니면 '강원도의 힘 재탕'이든지. 감독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계속적으로 그 세계에 침잠해 '한 우물'에 관해 꾸준히 연구하는 것에 시비를 걸 생각은 없다. 그러나 홍상수 감독은 "당신은 이런 영화 너무 잘 만드는데... 계속 해보지 그래"라는 외부의 평에 지나치게 고무 받거나 함몰되어 있는 게 아닌가라는 혐의는 벗을 수 없다.

'예술은 언제나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에 다름 아니다'라는 명제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젊은 예술가가 '실험 정신'과 '새로운 도전'이란 단어를 잊어버리고 겉늙는 것은 홍 감독에게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구차하게 잉그마르 베리만이나 베르톨루치 감독의 예를 다시 들지 않더라도.

'오! 수정'? 기억나는 거라곤 흑백필름이라 더욱 도드라져 보이던 어린 여배우 이은주의 새하얀 젖가슴뿐이다.

"재미만 있고, 동감(同感)은 없다."- '동감'

나는 '동감'을 보며 크게 세 번, 작게 수십 번 실소했다.

실소 하나.
79년. 그 유신말기의 살벌한 상황에서 자칭 운동권이라는 작자(박용우 분)가 'TBJ'라 대문짝만한 로고가 가슴에 새겨진 점퍼를 입는다? 그리고 그 살벌한 79년도에 "독재 타도 민주 쟁취"라는 플래카드가 교내에 아무 제지 없이 걸려있다?

실소 둘.
79년도 대학을 다니는 윤소은(김하늘 분)의 머리칼이 고운 붉은와인 색깔이다?(당시에 머리를 염색하는 한국여자는 동두천이나 용산에서 미군을 상대하던 양공주 정도가 전부였던 걸로 알고 있다.)

실소 셋.
김하늘과 박용우가 79년도에 보는 '언제나 세상사가 그러했듯 모두들 박수칠 때 떠나자'라는 장황스럽게 긴 제목의 연극은 그 시절 작품이 아니라 이윤택 연출의 99년도 서울연극제 출품작 '바보 각시'다.

김하늘의 어색하기 짝이 없는 '예쁘게만 보이려는 덜 떨어진 연기'에다, 연기의 기본이라는 '팔 처리'도 안 되는 유지태까지 거론하지 말자. 수십 번의 작은 실소도 더 이상 언급 말자.

0점 짜리 핍진성에 즉흥적 웃음만 남발하는 '동감'을 '반감'만 가지고 본 뒤 시나리오를 쓴 사람을 확인했다. 장 진.('간첩 리철진'의 감독) 실소와 반감은 더해졌다. 하기야 수준이하의 말장난으로 사람 웃기는 말재주 외에 그에게 뭐가 있었던가?

별로 좋아하는 어법이 아니지만 '공자 말씀' 하나만 하자.
"아이에게 물고기를 잡아 주면 하루가 해결되지만, 물고기를 잡아 주는 방법을 가르치면 평생이 해결된다". 한국영화 한 편을 6000원 지불하고 보는 게 능사가 아니다.

'한국 사람이니 한국 영화 발전을 위해, 다소간 거슬리더라도 비판은 접어두고 한국영화를 봐주자'라는 말(言)은 이제 하지 말자. 말(馬)에겐 당근과 더불어 채찍도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오늘 내가 휘두른 채찍이 거슬린다면 언제든, 누구든 나에게 '돌을 던지라'. 나는 무조건적인 '비난'과 애정 섞인 '비판'을 가려 듣고 움직일 것이다. 한국영화와 영화인들도 제발이지 그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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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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