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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카라카 보려다 폭행 당한 학생들-이치헌 기자

* 5.18에 응원제를 연 것은 '관행' 때문, 응원제 예산은 공개할 예정-성낙선 기자

* 나는 어제 두 통의 전화를 받았다-성낙선 기자

쓰레기 하치장에 가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매캐한 냄새, 먼지바람과 함께 날아오르는 종이조각들. 그리고 물컹물컹 짓밟히는 쓰레기더미들.

그 곳에 가 본 사람들이 있다면, 심한 불쾌감으로 한시라도 빨리 그 곳을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그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연세대는 지금 쓰레기 하치 중이다. 캠퍼스 여기 저기에 누군가 엉덩이 밑에 깔고 앉았던 스티로폴 조각과 신문지 조각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다. 벗겨지고 찢겨진 쓰레기들이 여기 저기 굴러다니다 못해 곳곳에 수북하게 쌓여 있다.

그러나 정작 이 곳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쓰레기더미가 아니다. 쓰레기더미는 발 디디고 넘어갈 수 있지만, 끊임없이 앞을 가로막아서는 사람들은 정말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멈춰 서 있거나, 혹은 서로 가로질러 가려는 사람들 사이에 뒤섞여 있다 보면, 앞으로 나아가는 일조차 쉽지가 않다.

이 곳에서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는 일은 쓰레기 하치장을 헤매다 쓰레기더미에 걸려 넘어지는 것만큼이나 괴로운 일이다. 어깨와 어깨가 부딪히고, 자칫 한눈이라도 팔라치면 가슴과 가슴이 부딪히고 만다.

5월 18일, 오후 3시 40분. 현재 기자가 서 있는 이 곳은 그 이름도 유명한 연세대 백양로이다. 백양로는 연세대 캠퍼스를 관통하며 가로지르는 대로이다.

이 곳에서는 지금 한창, 연세대 115주년 대동제 기간을 맞아 장터가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백양로 중간에서부터 차량이 통제되고, 그 긴 길을 따라 양쪽으로 장터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장터라고 하지만, 사실상 끝없이 늘어선 포장마차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하고, 술병과 안주를 들고 사람들 사이를 오가는 학생들의 무리로 정신이 없다. 오후 4시경에 벌어지고 있는 술판이 이 지경인데, 해가 지고 밤이 깊으면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장터 사이로 일찍이 본 적이 없는 많은 수의 학생들이 거대한 무리를 지어 백양로를 걸어 올라가고 있다. 어떻게 보면, 백양로를 서성이는 학생들 모두가 조금씩 뒤 밀려 어디론가 한꺼번에 떠밀려 가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그들이 이렇듯 길게 무리를 지어 걸어 올라가고 있는 곳은 노천극장이다. 기자가 그 무리에 떠밀리다시피 해서 걸어 올라가고 있는 곳 또한 노천극장이다.

그 곳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이 많은 사람들이 이렇듯 한꺼번에 몰려가고 있는 것일까? 5월 18일, 광주항쟁 2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그 곳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미리 말하지만, 기대는 금물이다. 그 곳에서는 단지 연세대 대동제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아카라카 응원제'가 펼쳐지고 있을 뿐이다.

오후 4시. 노천극장은 이미 학생들의 무리로 발 디딜 틈 없이 꽉 들어차 있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계속해서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고, 그 학생들 역시 계속해서 노천극장 어디간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언뜻 보아도 만여 명이 넘는 관중이다.

그들에게는 5월 18일이 아카라카 응원제를 즐기며 젊은 날의 하루를 만끽하는 화려한 축제의 날일 뿐이다. 이곳에도 역시 쓰레기는 지천으로 널려 있다. 쓰레기가 아스팔트 위를 덮어 발바닥에 부드러운 이물질이 눌리는 탄력이 느껴질 정도이다. 그 쓰레기를 짓밟고, 그 쓰레기들이 뿜어내는 먼지를 호흡하며 젊은 학생들의 무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보다 십여 분 앞선 시간, 연세대 정문 앞에서는 연세대 통일연세조국통일위원회(이하 조통위) 주최로 '5.18광주민중항쟁 정신계승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조통위 소속 학생들은 그 시간 그 자리에서 "학살원흉 미군철거"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내걸고, 연세대 앞길을 지나가는 차량과 사람들을 향해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모여 있는 인원은 불과 50여명.

김규남(연세대 천문기상학과 4년) 조통위 위원장은 하필이면 5월 18일을 맞아 아카라카 응원제가 열리고 있는데 불쾌한 낯빛을 드러냈다.

"가슴이 아프다. 도덕성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막고 나설 수도 없는 문제이다. 날자 조정을 위해 (응원단과) 대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거부당했다" 그들 50여명은 계속해서 정문 앞 아스팔트에 앉아 행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그들 말고, 그들에게 관심을 나타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코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천극장에서는 그 순간, 만여 명 이상이 모여 앉아 웃고 떠들며 그들만의 즐거운 향연을 펼치고 있는데 반해, 연대 정문 앞에서는 단지 5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 앉아 20년 전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극히 대조적이다.

숫자에 의해서 그 의미가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가 남아 있다. 왜 하필이면, 온 국민이 20년 전 광주의 아픔을 기억하며 경건한 마음을 가져 주기를 바라는 이 날에 명문사학으로 이름 높은 연세대에서 학생들이 아카라카 응원제로 희희낙락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5월 18일이 아닌 다른 날을 택해 행사를 진행할 수는 없었을까?

노천극장에서 지축이 울리는 것 같은 함성이 터져 나온다. '아파트', 연세대생이 응원가로 즐겨 부르는 노래 중의 하나이다. 한 순간, 반원형의 거대한 노천극장이 사람들의 물결로 일렁인다. 만여 명이 한 몸짓으로 움직이는 모습은 장관이다. 마치 노천극장 자체가 거세게 일렁이는 파도 위에 떠 있는 대형 유조선 갑판처럼 보인다. 그 와중에도 학생들은 계속해서 노천극장으로 몰려든다.

그들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무리다. 그들은 대부분 "바빠서"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에겐 오로지 이 한 순간 좀 더 빨리 노천극장에 자리를 확보하는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노천극장 앞에 길게 목을 빼고 서 있던 이 모군(연세대 00과 3년)는 조금 초조한 얼굴빛이다. 노천극장으로 밀려 올라오는 사람들 사이로 누군가를 찾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자신이 5월 18일에 노천극장 앞에 서 있는 것에 대해 약간 난처한 입장을 보인다. "예전에는 대중집회 하면 몇 천 명이 모였다고 하지만, 지금은 많이 변했다. 총학(총학생회) 궐기대회 때도 얼마 모이지 않았다. 생각이 다른 거다.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각자 의견이 다르고 주장이 다른데 어쩔 것인가? 그 쪽(조통위)에서도 이제는 직접적으로 대놓고 비난하지 않는다. 각자 관심사가 다른 것이다"

연대생들뿐만 아니라, 노천극장을 찾아 올라온 학생들은 대부분 5.18과 아카라카를 연관짓는 일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다.

처음 아카라카 응원제에 오게 되었다는 한 이화여대생은 아카라카 응원제를 보며 그냥 "재밌다."라고만 대답한다. 만여 명이 한 무리가 되어 만들어 내는 율동과 함성이 신기한 듯 그녀는 내내 흥겨운 웃음을 짓고 있다.

백양로를 올라오는 길에 만났던 문모 군(연세대 00과 4년)는 "복학을 하고 나서 보니, 축제가 좀 더 상업화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노천극장으로 몰려드는 인파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대신 "2, 3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좀 더 어수선해지기는 했지만, 뭐 축제가 다 그런 것 아닌가"라고만 말했다.

이번 대동제를 기획한 총학생회 관계자를 만난 자리. 그는 행사 준비물 속에 파묻혀 있다가 기자 일행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가 말하는 대동제 기획 방향은 5.18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는 이번 대동제의 주요 개념이 '5.18의 의미를 되살리는 대동제, 지역 사회와 부모 등 모든 계층을 아우르는, 함께 하는 대동제'라고 밝힌다.

그렇다면, 왜 대동제 행사가 상업적인 분위기로 흘려 버렸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통제가 불가능하다. 통제를 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노름 등으로 사행심을 조장하는 잡상인들의 출입을 막고 있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하게 한계가 그어져 있다. 애초에 우리가 기획했던 대로 대동제가 진행되어 주지 않는 것은 5.18 행사가 학생들에게서 관심을 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제(17일) 5.18기념 강연회를 개최했는데 겨우 50여 명 정도가 모였을 뿐이다"

그는 또한 대동제가 상업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지역주민과 함께 하는 대동제를 만들기 위해 지역 내 노점상이나 장애인연합회 등에게 장터의 일부를 내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대동제를 계기로 그들처럼 소외된 계층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 장터에서 천막을 치고 장사를 하고 있는 단체들은 '노숙자 쉼터', '000 사회복지관'이나 '000열사 기금 마련' 등의 표지를 내걸고 있다. 비난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장려할만한 일도 아니다.

그는 말한다. "5.18과 관련해서 나름대로 다양한 행사를 마련했다. 그러나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그들로 하여금 5.18을 되새기게 하는 것은 무리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만이라도 5.18에 집중할 수 있는 행사를 마련했어야 할 것이다. 그에게 왜 하필이면 오늘 아카라카 응원제를 갖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자 그는 "그건 그들(연세대 응원단)만의 행사라 자신들도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말하고는 심상한 표정을 짓는다.

기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연세대 응원단은 총학생회와는 별개의 조직으로서, 대동제 기간 동안 별도의 일정에 따라 움직인다.

아카라카 응원제가 대동제 행사 중의 백미인 것은 분명하지만, 다른 대동제 행사와는 다르게 총학생회에서 관리하고 조정할 수 있는 행사가 아니다.

아카라카 응원제는 이미 연세대 응원단과 학교 당국의 일정한 협의 하에 날자가 잡혀져 있었다. 거기에 총학생회가 끼여들 여지는 조금도 없었다.

이름을 밝히기 꺼린 한 취재원은 "그들과 몇 번 대화를 시도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그들은 '남의 아버지 제삿날 왜 우리가 슬퍼해야 하느냐'는 말까지 했다. 그들에게 5.18을 피해 일정을 잡아야겠다는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설득이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연세대 응원단은 아카라카 행사 하나만으로도 막대한 수익금을 거둬들이고 있다.

아카라카 응원제의 진행을 맡고 있는 한 관계자는 "노천극장을 꽉 메운 인원이 약 만여 명에 달하고 그들 모두가 5천원짜리 티켓을 사서 입장했다"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순수하게 매표만으로 5천 만원 가량을 거둬들인 셈이다. 그리고 행사준비를 위해 학교에서 나온 지원금과 행사 안내 팜플렛(24면 중 12면이 광고지면이다, 반면 총학생회에서 만든 대동제 안내 팜플렛은 20면 중 광고지면이 겨우 2면뿐이다)을 제작하면서 기업체로부터 받아들인 후원비 명목의 광고비까지 고려하면 그 수치는 더 늘어난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그 취재원은 "그들이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는 건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수익금이 어디에 쓰이는지는 "며느리도 모른다"고 말했다.

오후 7시 넘어 아카라카 응원제는 절정에 다다르고 있다. 5시 정식 행사가 시작된 지, 2시간이 흐른 셈이다. 그런데도 표를 구하지 못한 학생들이 입구에 넓게 진을 치고 서 있는 것이 보인다. 그때쯤 노천극장의 관중은 2만여 명에 가까워 보인다.

이제 그들은 모두 일어서 있다. 앉아 있기에는 너무 장소가 비좁은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미처 입장하지 못한 고대생들이 그 기질을 십분 발휘해 깃발을 앞세워 노천극장 측면의 산비탈을 기어오르고 있고, 표도 없고 깃발도 갖지 못한 나머지 학생들은 입구에서 서서 그저 발만 동동 구른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노천극장으로 몰려드는 학생들의 발길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캠퍼스를 빠져 나오면서 깃발을 들고 앞서가는 한 고대생에게 지금 어디를 향해 가느냐고 물어 본다. 대답은 단 한마디, "노천극장요"이다. 그 또한 오늘 하루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안암동에서 신촌동까지 그 먼 길을 찾아온 것이다.

밤이 깊어가고 있다. 연세대 대동제에서 5.18과 관련해 그 어떤 특별한 일을 기대하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다.

정문 앞의 조통위 행사를 지나쳐, 그리고 연세대 도서관 앞에 전시되어 있던 초라한 몰골의 '5.18 기념사진전'을 지나쳐 한사코 노천극장으로 몰려드는 학생들에게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고 물어보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짓이다.

그때까지도 캠퍼스 내 어디에선가 조촐하게 치러지고 있을 여타의 5.18 관련 행사 따윈 전혀 안중에도 없는 그들에게 5월 18일에 왜 하필 아카라카 응원제를 열어야만 하느냐고 따져 묻는 것은 그야말로 '시대정신'에 엇나가는 '지금이 어느 땐지도 모르고 깝죽대는' 멍청한 짓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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