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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에서 백두까지 하나되는 세상이여 오라, 그래서 한백의 집.

기자가 동료 한 명과 과천 한백의 집을 찾은 것은 지난주 목요일 오후 4시 50분경. 약속시간을 30분이나 지각해 찾아간 한백의 집은 4층 연립식 건물 지하에 위치하고 있었다.

네 분이 계시는 것으로 언론에도 알려진 이 곳에는 안영기(70) 선생님 한 분만 계셨다. 일어는 기본이고 5개 국어(영어, 독일어, 러시아어, 중국어, 불어)를 하신다는 안영기 선생님. 마침 마루에 있는 책상을 보니 일본어로 된 책이 놓여 있었다.

말로만 듣던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보니 훨씬 젊어 보이셨고 건강도 괜찮으시단다.

'선생님, 생활은 어떻게 하세요.'

안영기 선생님을 포함해서 세 분(장호 선생님, 김은환 선생님, 홍문거 선생님)이 함께 운영하는 헌 책방이 있는 것을 알았지만 생계를 유지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으신 것 같기에 이런 질문을 드렸다.

'바로 근처에 한백교회가 있는 데 그 곳에서 도와줘요. 아주머니들이 오셔서 음식도 해주고 다른 단체에서도 사람들이 와요.'
'하루 생활은 어떻게 하세요?'
'근처에 계신 분들에게 침도 놓아 드리고 요즈음에는 행사에 초청돼서 다니기 바빠요.'

'말'지 통일역사기행, 민가협 총회, 비전향 장기수 송환추진위 행사 외에도 이곳 저곳에서 연락이 많이 오신단다.

마루가 약간 써늘해서 방으로 안내하신 선생님을 따라 들어가보니 방에는 그 옛날 유명한 서화가의 글처럼 가지런히 쓰여진 붓글씨가 여러장 벽에 걸려 있었다.

'이거 선생님이 쓰신 거예요?'
'감옥에 있을 때 이런 붓글씨 쓰는 것이 전향조건이었어요. 나중에 배웠지.'

때마침 같이 간 동료가 광주에 계신 류락진 선생님을 언급하자,
'류락진 선생님에게 배웠어요. 그 분은 서예에 있어서는 으뜸이시거든'
알고 보니 류락진 선생님은 입상경력이 많으셨다. 그 분에게 받았다는 붓글씨를 여러 점 보여주시면서 나중에 기자가 결혼할 때, 이야기하면 하나 주겠다고 하신다.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꼭 받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선생님 그동안 가장 힘드셨을 때가 언제인지요?'
'물론 전향 강요할 때 가장 힘들었지. 그 때가 유신시절이었는데 거의 죽을 지경까지 갖은 매와 고문이 자행되었으니까.'
'지금 행동에는 제약이 없으신지요?'
'보안관찰법 때문에 3개월마다 보고를 해야 돼요. 어디 외출할 때도 보고를 해야 하고. 그런데 우리는 안 해.'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니 온순하신 표정속에서도 보안관찰법의 부당성에 대해 당당히 이야기하신다.
'잡아가라면 잡아가라고 해'하고 이야기하지. 그러면 '위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이러는 거야. 그래도 안 하지'

'어려운 삶을 살아오셨는데 요즈음 청년들에게 인생의 선배로서 한 말씀 해주시지요.'

'다른 말은 없고 항상 소신을 갖고 생활하면 좋겠어요. 결코 뒤돌아 보았을 때 후회없는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야기 도중에 잠시 '말'지에 통일역사기행과 관련하여 팩스를 보내실 것이 있다고 하자, 같이 간 동료가 컴퓨터 이메일로 보내면 된다는 것을 가르쳐 드리는 시간도 있었다. 직접 해보시도록 하면서 이메일을 신청해서 당신의 이메일도 새로 하나 갖게 되셨다.

내용을 이메일로 보내니 '말'지 담당자에게서 곧바로 연락이 왔다. 놀란 표정으로 - 어떻게 보내셨지. 하는 마음으로.
이메일 신청을 했다고 말하니까 그 담당자도 흐뭇해하는 표정.

나이드신 분답지 않게 컴퓨터 앞에서 배우시는 선생님의 모습은 매우 진지하신 모습. 옆에서 기자는 아무말 못하고 방만 둘러보았다. 일본어와 중국어로 된 수백권의 책을 보면서 그 분이 살아온 삶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30년이 넘게 감옥에 계시면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갖은 고초를 극복하고 오늘 이 자리에서 컴퓨터를 배우고 계시는 선생님. 감옥에 있는 동안 배우시게 된 외국어 실력이지만 젊은 우리로서는 지금까지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하는 부끄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북한에 아내와 두 딸이 계시다는 선생님.
하루빨리 송환되어야 한다는 많은 사람들의 바램과 시대적 요청에도 아직 묵묵부답인 정부.
송환추진위는 얼마전 기자회견을 통해 송환추진선언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할 것을 밝힌 바 있다.

송환을 희망하시는 분들은 대략 50명이 약간 넘는다.
상호주의를 주장하는 정부의 주장에 계속 진척이 없는 이 분들의 송환문제, 남북관계의 발전을 위해서나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봐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문제이건만.

안영기 선생님이 이 시대 청년들에게 당부하신 말씀.
부딪히는 일들에 쉽게 좌절하고 자신의 소신을 쉽게 바꾸는 이 시대 젊은 청년들에게 던져주는 삶의 의미는 단순히 분단이 빚어낸 비극의 산 증인이라는 일반적인 화두를 제외하더라도 한 인간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바램과 굽히지 않는 소신.

요즈음 정치를 한다는 사람외에도 모든 사람이 한 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참고> 안영기 선생님 약력

1929년 6월 19일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 송부동에서 태어남
1950년 4월 경남상업중학교 졸업(2회)
1950년 9월 조선인민군 복무(3년)
1953년 10월 조선인민군 제대
1958년 평양건설대학 건축공학부 졸업(김책공대)
1958년 평양도시건설사업에 참여하여 옥류관 등을 건설함
1962년 평화통일을 위한 정치공작에 동원되어 활동 중 체포당함. 무기징역.
1999년 2월 15일 형 집행정지로 석방
2000년 현재 과천 '한백의 집'에서 공동체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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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우러러 한 점 없기를... 윤동주 시인의 문구를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또한 루신의 납함에 나오는 ' 희망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희망은 이 세상에 길과도 같다. 길은 태초에 이 땅위에 존재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땅 위에 길은 생긴 것이다.' 대략 이런 뜻의 문구를 가슴에 새기면서 살려고 노력하는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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