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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틀리 인생학교

내 나이 열여덟 살, 인생 학교에 입학했다
한국형 에프터스콜레 꿈틀리 인생학교 1기 임이수현 학생의 이야기

18.02.14 21:04 | 정대희 기자쪽지보내기

교과서가 아니라 행복한 인생을 배웁니다. 학력보다는 학생 스스로 주인이 되는 삶을 가르칩니다. 한국형 에프터스콜레(Efterskole) 꿈틀리 인생학교의 이야기입니다. 이 글은 꿈틀리 인생학교 1기 졸업생 임이수현(20) 학생이 쓴 수기와 인터뷰를 1인 시점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편집자말]
▲ 내 나이 열여덟, 꿈틀리 인생학교에 입학했다. (사진 왼쪽이 임이수현 학생) ⓒ 꿈틀리 인생학교

내 나이 열여덟 살, 인생학교에 입학하기로 했다. 공부를 위한 삶이 아니라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빠가 먼저 "꿈틀리 인생학교에 가볼래"라고 제안을 했다. 깜짝 놀랐으나 주춤거리진 않았다.

나만의 길을 가기로 선택했다. 책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오마이북)를 읽고 막연히 꿈꿨던 인생학교에 입학원서를 접수하고 면접을 봤다. 이런 결정을 스스로 고민하고 나의 의지로 결정했다는 게 내겐 큰 의미였다. 이렇게 지난 2016년, 난 한국형 에프터스콜레(Efterskole) 꿈틀리 인생학교의 1기 학생이 됐다.

옆을 볼 자유

▲ 꿈틀리 인생학교 체육대회 모습 ⓒ 꿈틀리 인생학교

1년간 '옆을 볼 자유'를 얻었다. 과거엔 집과 학교, 학원을 오가며 앞으로 달려야만 했다. 짝꿍에게 뒤처지지 않으려, 반 친구들과 경쟁하느라 뛰어야 했다. 곁눈질도 못 하고, 뒤도 돌아볼 새 없이 정면만 바라봐야 했는데, 이젠 아니었다. 옆을 보기 위해 학교에 자퇴서를 내고 경주마 같은 삶과 안녕을 고했다.

걱정과 고민은 있었다. "대안학교는 사고 친 아이들이 다니는 곳"이란 남들의 시선이 부담됐다. 앞으로 진로에 대한 고민도 컸다. 하지만 공부만 강요하는 고등학교 생활은 깜깜한 터널을 끝없이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여기서 빠져나와 하얗게 빛나는 세상으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다. 집을 떠나 꿈틀리 인생학교에서 1년간 기숙하면서 살게 됐다.

"엄마, 아빠 안녕! 조심히 가세요."
"수현아! 잘 지내"

지난 2016년 봄, 짧은 인사말로 부모님과 이별을 했다. 엄마와 아빠는 강화도 꿈틀리 인생학교 운동장에 짐 가방을 내려놓고 떠났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설레고 두려운 감정이 동시에 휘몰아쳤다. 어색한 만남과 낯선 환경, 뭐하나 익숙한 게 없는 첫날이 그렇게 흘러갔다. 하지만 이런 시간도 얼마 가진 않았다.

꿈틀리 인생학교는 생활터전이 배움터였다. 과거 학교에 다닐 땐 그렇지 않았다. 그땐, 배움과 현실의 틈이 컸다. 여긴 달랐다.
 
난 음식다운 음식을 만들어 본 기억이 없다. 과거 학교에 다닐 땐, 집에선 엄마가 차린 밥상에 앉아 먹기만 했다. 학교에 가면 식판에 급식을 담는 게, 내가 하는 '밥값' 노릇이었다. 꿈틀리 인생학교에선 아니었다.

내가 먹을 음식은 "식당 엄마(학교급식 조리사)"를 도와 함께 만들어야 했다. 38명이 먹을 삼시 세끼를 준비하고 뒷정리까지 하는 건, 중노동이었다. 식당 당번이 된 날에는 녹초가 돼 밤에 기절하다시피 잠자리에 쓰러졌다. 가만히 있으면, 먹을 게 생기지 않았다.

그제야 집에 있는 엄마의 거친 손이 아른거렸다. 급식실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몇백 명이 밥을 준비하던 과거 학교 조리사분들의 노고가 떠올라 머리를 숙였다. 멀리 뒤에서 바라볼 때와 직접 경험해보는 건,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이게 다가 아니다. 스스로 빨래를 하고 청소도 해야 했다. 움직이지 않으면, 해결되는 게 없었다. 작은 일도, 큰일도, 스스로 팔을 걷어붙여야 했다. '옆을 볼 자유'엔 책임이 뒤따랐다.

노동의 대가는 이랬다. 땀 흘려 일하는 뿌듯함.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난 조금이나마 '노동'이란 무엇인지 생각했다. 공교육에선 글로 배운 걸, 여기선 몸으로 배웠다.

수업도 몸을 움직여야 하는 '노동'과 다를 바 없었다. 책상에 앉아 교과서를 달달 외워야 하는 게 아니라 직접 발로 뛰며 자료를 찾아보고 정리해 친구들 앞에서 발표해야 했다. 의무교육과정을 받아온 나로선 얼떨떨한 수업 방식이었다.

글이 아니라 몸으로 배우다

▲ 꿈틀리 인생학교에서는 글이 아니라 몸으로 배운다. ⓒ 꿈틀리 인생학교

수업은 크게 3가지로 진행됐다. 모든 학생이 다 함께 참여하는 수업, 몇몇 학생이 모둠을 이뤄서 하는 수업, 그리고 각자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수업. 이렇게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진행됐다.

'모두 다 함께 수업' 중 기억에 남는 건, 민주시민 교육이다. 선생님의 입에서 "페미니즘"이란 소리가 나왔다. 내가 얼핏 알기론 '여성주의'를 뜻하는 말이었다. 속뜻이 '성 평등'에 있고 나아가서는 '보편적 인권'을 가리킨다는 걸, 이때 알았다.

"우리나라가 성 평등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 들어볼까요."

선생님의 질문에 몇 명의 친구들이 손을 올렸다. "여성상위 시대"라고 손을 든 친구들도 있었다. 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잘 모르겠다"에 손을 들었다. 선생님은 "페미니즘은 남녀 한쪽의 지위를 높이는 게 아니라 '남자라면', '여자답게'란 말로 성별을 규정하지 않고 성 평등을 추구하는 말이다. 나아가서는 보편적인 인권을 뜻하기도 한다"라고 했다.

난 놀랐다. 평소에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에 의문이 생겼다. '페미니즘'이란 개념을 더 알고 싶어졌다. 인터넷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자료를 찾아 읽었다. 공부는 받아쓰는 게 아니라, 두 발로 찾아 쓰는 거였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우리나라 대통령이 전쟁용 무기로 수많은 국민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군사독재에 저항했던 국민들은 자체적으로 치안과 질서를 유지했다. 진실이 이런데도 당시 왜곡 보도로 지금까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게 가장 마음이 아프다."

'역사·시사' 모둠에서 내가 발표한 내용이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대략 이런 내용을 친구들 앞에서 설명했다.

나는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일어난 구체적 일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 띄엄띄엄 이어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이런 빈 공간을 스스로 공부하고, 자료를 찾으며, 채울 수 있었다.

과거 학교는 달랐다. 긴 역사를 짧은 시간에 배웠다. 시험성적을 위해 배우고 외워야 했다. 총칼에 죽어간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도 딱 거기까지 가르쳤다. 여기선, 아니었다. 시험이 없으니 성적 고민도 하지 않았다. 관심이 있는 건, 마음껏 공부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가 궁금해 '소설'로 들여다보기로 했다.

'대하소설 <태백산맥> 정독'을 개인 프로젝트 주제로 삼았다. 8~9개월간 책을 읽고 등장인물과 역사 흐름을 정리했다. 모르는 내용이 나오면, 자료를 찾고 주변에 조언을 구했다. 이렇게 했는데도 대하소설을 읽고 이해하는 건, 어려웠다. 줄거리를 이해하고자 중간에 다시 한번 읽기도 했다.

누구나 스스로 학습이 중요하다고 한다. 과거 학교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말이 쉽지 행동하긴 힘들다. 이런 환경을 조성해주지 않고 입으로 "빨리빨리"만 외쳤다. 여긴 달랐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좌절할 때도 있었지만 날 기다려줬다. 이런 과정에서 정해진 방식대로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 나만의 방식으로 나만의 대답을 찾아야 했다. 막막했으나 값진 경험이었다. 나 자신과의 약속, 친구들과의 약속, 꿈틀리 인생학교 모두와의 약속을 지켰다는 성취감도 맛볼 수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공부는 혼자 하는 게 아니었다. 개인 프로젝트로 3개월간 '설탕' 공부를 할 때도 그랬다. 설탕이 몸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설탕 끊기'에 도전했다. 학교가 작으니 소문이 빨랐다. 설탕 끊기를 한다니 옆 친구가 꿀을 선물해주고, 또래 친구가 설탕 없는 볶음밥을 만들어줬다. "식당 엄마"는 설탕이 안 들어간 김치를 따로 만들어 주고 대체할 반찬도 해줬다. 사람들의 격려와 배려로 그렇게 무사히 프로젝트를 끝냈다.

친구들과 함께한 프로젝트도 있었다. 1학기엔 목공부 그룹 '피노키오'에서 활동하며, 공동으로 사용하는 컴퓨터 받침대와 노트북 보관대를 만들었다. 태어나 처음 톱질을 하고 전동 드릴로 나사를 조여 만든 '작품(?)이었다. 내겐 신기한 경험이었다.

2학기엔 사진부 '시나브로'에서 서툰 솜씨로 사진을 찍었다. 친구들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담고, 동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카메라에 일상과 세상을 담았다. 이렇게 차곡차곡 카메라로 담아낸 사진을 모아 작은 사진첩을 냈다. 직접 지은 시를 서너 장의 사진 밑에 적었다.

놀기도 열심히 했다. 미술 동아리 '반카소'와 야구동아리에서 친구들과 함께 신나게 뛰어놀았다. 풍물 동아리 '얼씨구 사신성'을 만들어 친구들을 모으고, 선생님에게 가락을 배우기도 했다. 가장 즐거운 건, 북 치고 장구 치는 거였다. 난 장구 치는 선생님이 멋있어 보여 장구재비가 됐다. 처음엔 악기가 달랑 2개여서 애를 먹었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나중엔 추수 감사 운동회, 저녁모임에서 공연할 정도로 악기도 실력도 늘었다. 연습을 놀이 삼아, 노는 걸 연습 삼아 한 덕분(?)이었다.

좋은 추억이 있으면, 힘들고 어려웠던 기억도 있다. 좁은 공간에서 여러 명이 생활하다 보니 부딪히는 일이 잦았다. 사소한 것까지 하나하나 맞춰야 했고,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도 있었다. 기숙사 생활원칙처럼 전체가 논의할 사항은 학생자치회의 '다 모임'을 통해 결정했다. 친구 사이 갈등은 당사자끼리 서로 대화를 나누다가 해결이 안 되면, 주변 친구가 돕거나 선생님이 상담을 해줬다. 이런 일을 경험하면서 난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게 더 중요하단 걸, 알게 됐다.

인생학교서 1년... "넘어지고 깨지면서도 행복"

▲ 꿈틀리 인생학교 1기 학생들 ⓒ 꿈틀리 인생학교

끝으로 누군가 내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1년간 옆을 볼 자유를 얻었는데, 무엇을 배우고 왔나요?"

하나, 다른 사람과 함께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웠다.
둘, 글이 아니라 몸으로 배우는 공부를 했다.
셋, 꿈틀리 식구들과 함께 신나게 웃고 떠들면서 재미있고 행복하게 학교 생활을 했다.
넷, 남들이 말하는 대로 살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알았다.
다섯, 마음껏 고민하고 스스로 질문하면서 진심으로 괴롭고 즐거웠다.

이렇게 넘어지고 깨지면서도 행복한 열여덟 살의 인생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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