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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공화국의 민낯

보수정치 1번지 강남이 '부동산' 때문에 갈라졌다
[강남공화국의 민낯 17] 보수의 온상이 된 강남

17.11.05 20:07 | 글:전상봉쪽지보내기|편집:장지혜쪽지보내기

한때 여촌야도(與村野都)는 한국의 정치 지형을 함축하는 말이었다. 농촌에서는 여당이 우세하고 도시에서는 야당세가 강하다는 의미의 여촌야도 현상은 제4대 총선(1958. 5. 2) 때 처음 등장했다. 당시 선거 결과 여당인 자유당은 농촌에서 우세를 보인 반면, 야당인 민주당은 대도시에서 압승을 거뒀다. 선거구가 16곳이던 서울의 경우 민주당이 14석, 자유당이 1석(서대문을)을 차지했고, 선거구가 10곳이던 부산에서는 민주당이 7석, 자유당이 3석을 확보했다.

여촌야도 현상은 한국 사회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1950년대 한국 사회는 높은 교육열을 바탕으로 초등학교 취학률이 90%를 넘어섰고 중·고등학교 또한 대폭 신설됐다. 공교육 체계가 확대되는 가운데 미국식 자유민주주의가 급속하게 유입되면서 대도시를 중심으로 야당을 선호하는 정치 성향이 형성됐다.

여촌야도 현상의 또 다른 배경은 양당 구조의 정립이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2월 대통령 이승만을 당수로 하는 자유당이 창당된데 이어 1955년 9월 신익희를 대표로 하는 민주당이 창당됐다. 이로써 여당인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이라는 양당체제가 형성되면서 여촌야도 현상이 나타날 수 있게 됐다.

양당체제가 정립되기 전까지 정당 정치의 토대는 매우 취약했다. 그 결과 무소속 후보들이 대거 당선되어 국회에 진출했다. 제헌의회 선거(1948. 5. 10)의 경우 200명의 국회의원 중 85명이 무소속이었고, 2대 총선(1950. 5. 30)에서는 210명 중 126명이 무소속으로 당선됐다. 한국전쟁 직후 치러진 3대(1954. 5. 20) 총선에서도 202명 중 67명이 무소속으로 당선될 정도로 정당 정치의 토대는 허약했다. 그러나 양당체제가 구축되면서 선거 결과는 사뭇 달라졌다. 제4대 총선 결과 전체 233명의 국회의원 중 정당 소속이 207명(자유당 126명, 민주당 80명, 통일당 1명)이었고 무소속은 26명에 지나지 않았다.

▲ 당시 대선에서 ‘40대 기수론’을 앞세운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가 혁신적인 공약으로 돌풍을 일으키자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는 색깔론과 함께 영호남 지역감정을 부추겼다. 김대중도서관에 전시된 사진을 촬영했다. ⓒ 전상봉

여촌야도 현상에 더해 지역구도가 처음 등장한 선거는 제7대 대선(1971. 4. 27)이다. '40대 기수론'을 앞세운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는 향토예비군 폐지, 대중경제론, 4대국(미일중소) 안전보장론과 3단계 통일론 등의 혁신적인 공약으로 돌풍을 일으켰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는 색깔론과 함께 영호남 지역감정을 부추겼다. 그 결과 영남과 호남이라는 지역구도가 한국의 정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3당 합당과 강남의 정치 지형

▲ 1987년 12월 16일 민주정부 수립의 열망 속에 치러진 13대 대선은 양김(김영삼, 김대중)의 분열로 군부독재가 연장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종로구에 위치한 선거연수원 외벽에 그려진 포스터를 촬영했다. ⓒ 전상봉

1987년 12월 16일 6월항쟁의 성과로 16년 만에 국민들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가 실시됐다. 민주정부 수립의 열망 속에 치러진 13대 대선은 양김(김영삼, 김대중)의 분열로 군부독재가 연장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1노3김(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4파전으로 치러진 선거 결과 노태우 후보가 36.6%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선 패배 후 4개월 만에 13대 총선(1988. 4. 26)이 치러졌다. 선거 결과 전체 299석 중 민정당(민주정의당)이 125석, 평민당(평화민주당)이 70석, 민주당(통일민주당)이 59석, 공화당(신민주공화당)이 35석, 무소속이 9석, 한겨레민주당이 1석을 차지하면서 헌정 사상 최초로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이 조성됐다.

13대 총선의 또 다른 특징은 지역구도의 심화였다. 노태우의 민정당은 대구·경북에서, 김대중의 평민당은 호남에서, 김영삼의 민주당은 부산·경남에서, 김종필의 공화당은 충청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지역 분할 구도가 만들어졌다. 지역 분할 구도 속에서 평민당은 호남과 서울의 지지세를 바탕으로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 반면 민주당은 전국 득표율 23.8%로 평민당 19.3%보다 앞섰지만 의석수에서 11석이나 적은 제2야당으로 전락했다.

여소야대로 정국운영에 부담을 느낀 대통령 노태우는 3당 합당을 추진했다. 제2야당으로 전락한 김영삼의 민주당은 정국을 반전시키기 위해 3당 합당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1990년 1월 22일 노태우의 민정당, 김영삼의 민주당, 김종필의 공화당이 3당 합당을 선언했다.

유권자가 만든 여소야대의 정치지형은 거대 여당(민주자유당)과 군소 야당(평민당)으로 재편됐다.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은 대구·경북(민정당)과 부산·경남(민주당)이 결탁, 영남 패권을 결성하고 충청권(공화당)이 합세한 세력 재편이었다. 정치적으로는 보수세력이 민주세력을 포위하는 전략이었고, 지역적으로는 호남(평민당)을 고립시키는 전략이었다. 그 결과 6월항쟁의 주요 거점인 부산·경남이 급격하게 보수화되어 정치인 노무현은 선거 때마다 패배의 쓴잔을 들어야 했다.

3당 합당의 영향으로 강남의 보수화는 가속화됐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강남은 김영삼에 대한 지지가 높은 보수적 자유주의 성향을 띠었다. 중선거구제였던 12대 총선(1985. 2. 12)의 경우 강남구(강남, 서초)에서는 야당 후보(신민당 김형래, 민한당 이중재)가 당선됐고, 강동구(송파, 강동)에서는 신민당 김동규, 민정당 정남 후보가 당선됐다. 소선거구제가 처음 도입된 13대 총선(1988. 4. 26) 결과 강남(강남, 서초, 송파)에서는 민주당 3석, 민정당 1석, 평민당 1석, 무소속 1석을 차지할 정도로 야당세가 강했다.

그러나 3당 합당 이후 치러진 14대 총선(1992. 3. 24)의 결과는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선거 결과 김대중의 민주당이 3석을 차지했고, 김덕룡(민자당), 박찬종(신정당), 김동길(국민당)이 당선됐다. 언듯보기에 야권 강세가 지속되는듯 하지만 선거 결과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강남의 보수화가 본격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된 지역은 송파갑(김희완), 송파을(김종완), 강남을(홍사덕)이었다. 송파구는 강남의 주변부이고, 강남을에서 당선된 홍사덕은 경북 영주가 고향인 보수성향의 후보였다.

1990년대 중반이 되자 강남은 보수 정치의 1번지로 탈바꿈했다. 15대 총선(1996. 4. 11) 결과 신한국당 5명, 민주당 1명, 무소속 1명이 당선됐다. 무소속 당선자는 강남을의 홍사덕 후보였고, 국민회의 김병태 후보는 서울의 동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송파병에서 당선됐다.

외환위기와 김대중 정부 하에서 강남은 한나라당의 아성으로 굳어졌다. 16대 총선(2000. 4. 13)의 경우 시민단체들의 강력한 낙천낙선운동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은 강남을 석권했다. 강남 6개 선거구에서 한나라당이 5석, 새천년민주당이 1석(송파을 김성순)을 차지했다.

부동산 계급동맹

강남의 보수화는 원초적인 것이었다. 1975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강남구와 서초구에 전입한 이주민은 회사원이 40%로 가장 많았고, 공무원 16.4%, 상업 16.4%, 사업 10% 순이었다. 당시 서울시민 월평균 근로소득이 9만2천 원인데 비해 강남 이주민은 10~20만 원이 36.6%, 20만 원 이상이 17.7%로 고소득자가 많았다.

이들은 강남으로 이사를 하게 된 주된 이유는 쾌적한 환경(35.2%)과 지가 상승의 기대감(33.5%)의 컸다. 조사 결과에 반영되진 않았지만 이즈음 도심 명문고의 강남 이전은 강북 주민의 강남 이주를 촉진시킨 매개체였다.

정치적 보수화를 의미하는 부동산 계급동맹은 1990년대 중후반을 거치면서 더욱 굳건해졌다. 사상 초유의 탄핵 사태 속에서 치러진 17대 총선(2004. 4. 15)에서도 한나라당의 강남벨트는 요지부동이었다. 당시 선거 결과 서울 48개 선거구 중 한나라당 후보는 16곳에 당선되는데 그쳤다. 그럼에도 강남에서는 한나라당 후보 6명이 당선됐고, 과반의석을 차지한 열린우리당은 고작 송파병에서 당선자를 냈을 뿐이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민심이반이 극심한 상황에서 치러진 제4회 지방선거(2006. 5. 31)와 17대 대선(2007. 12. 18)에서도 한나라당은 강남에서 압승을 거뒀다. 2006년 지방선거의 경우 서울시장은 물론 서울 25개 구청장을 한나라당이 석권할 정도로 보수화의 열풍이 거셌다.

▲ 2008년 12월 18일 치러진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는 서울 평균 53.23%의 득표율을 얻었다. 종로구에 위치한 선거연수원 외벽에 그려진 포스터를 촬영했다. ⓒ 전상봉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는 서울 평균 53.23%의 득표율을 얻었다. 무소속 이회창 후보의 득표율은 11.80%로 두 후보의 지지율을 합치면 65.03%에 달했다. 보수성향의 이명박, 이회창 후보가 강남에 얻은 합산 득표율은 강남구 77.41%, 서초구 75.51%였다. 파워팰리스 단지 내에 설치된 투표소(강남구 도곡2동 4투표소)의 경우 이명박 후보가 86.4%, 이회창 후보가 8.3%를 득표했다.

2010년 6월 2일 실시된 서울시장 선거(5회 지방선거)는 강남의 위력을 극적으로 보여준 선거였다. 민주당의 한명숙 후보는 개표 중반부터 한나라당의 오세훈 후보를 줄곧 앞서나갔다. 판세가 뒤바뀐 것은 6월 3일 새벽 4시 무렵이었다. 개표기 고장으로 중단됐던 서초구의 개표가 재개되면서 오세훈 후보가 1위로 올라선 것이다. 최종 개표 결과 오세훈 후보는 19개 자치구에서 한명숙 후보에게 패하고도 강남 3구의 몰표에 힘입어 0.6%(25,793표차) 차이로 승리할 수 있었다.

강남의 정치 성향은 변화하고 있나

강남 3구는 대한민국의 보수 정치를 상징한다. 대구·경북(TK)이 보수 정치의 지역적 거점이라면 강남은 계급적 거점이다. 이런 연관관계 때문에 15대 총선부터 20대 총선까지 강남 3구에서 당선된 32명의 국회의원 출신지역을 살펴보면 영남이 15명으로 절반에 가깝다. 그 밖의 출신지역은 서울이 9명, 충청이 3명, 호남이 2명, 인천과 경기가 각 1명이다.

강남의 보수화가 고착된 1990년대 중반 이후 서울의 정치 구도는 '강남 대 비강남'으로 짜여졌다. 강남의 고립을 의미하는 이 같은 정치 구도는 2011년 10월 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한층 선명해졌다. 전체 득표율 53.4%를 얻은 박원순 후보는 강남 3구에서 42%를 획득하는데 그쳤다. 반면 전체 득표율 46.21%를 얻은 나경원 후보는 강남구에서 61.33%, 서초구에서 60.12%, 송파구에서 51.12%로 우위를 점했다.

난공불락의 요새 같았던 강남의 정치지형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2011년 4월 27일 분당을 보궐선거이다. 당시 선거에서 민주당의 손학규 후보는 51.0%를 득표하여 한나라당의 강재섭 후보(48.3%)를 누리고 승리했다. 분당은 강남에 인접한 한나라당의 아성이었으나 집값이 떨어지고 전세금이 오르자 하우스푸어인 30~40대가 한나라당에 등을 돌린 것이다.

부동산 계급동맹에 기초한 강남의 정치적 균열은 2014년 6월 4일 지방선거에서도 지속됐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박원순 후보는 송파구에서 53.41%를 득표하여 새누리당 정몽준 후보(45.88%)를 앞질렀다. 강남구와 서초구에서도 박원순 후보는 정몽준 후보와의 차이를 좁혔다. 강남구의 경우 정몽준 후보가 54.32%, 박원순 후보가 45.04%를 얻었고, 서초구에서는 정몽준 후보 52.25%, 박원순 후보 47.17%로 전에 비해 격차가 줄어들었다.

강남 최대 이변은 20대 총선(2016. 4. 13) 때 일어났다. 강남을에서 더불어민주당 전현희 후보(득표율 51.46%)가 새누리당 김종훈 후보(득표율 44.41%)를 누르고 당선된 것이다. 강남구에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된 것은 24년 만의 일로 이명박-박근혜 정권에 대한 피로도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부동산을 매개로 한 계급동맹에 일종의 피로 균열이 발생했다.

덧붙이는 글 | 전상봉 시민기자는 서울시민연대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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