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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공화국의 민낯

삼풍백화점 붕괴, '골든타임'은 있었다
[강남공화국의 민낯16] 재벌의 백화점 사업은 적은 세금 내는 훌륭한 재산증식 수단

17.10.21 17:30 | 글:전상봉쪽지보내기|편집:김준수쪽지보내기

▲ 1979년 9월 압구정동에 한양쇼핑센터가 문을 열면서 강남에 백화점 시대가 개막됐다. 명품백화점으로 알려진 압구정동 현대백화점은 1985년 개관했다. ⓒ 전상봉

"백화점이 하나 들어오면 아파트 시세는 껑충 뛴다. 반대로 아파트 주민들은 백화점에 가서 돈을 써댄다. 자기네 집값 올려준 생명의 은인인데 뭔들 갖다 못 바치랴. 거대한 소비 상업 구도가 방구석에서부터 도시 중심에 이르기까지 종합선물세트처럼 우리를 공고히 지배하고 있다. 이런 물신의 지배를 단군 이래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준 은인이라며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 우리의 자화상이다." - 임석재, <건축, 우리의 자화상> 82~83쪽

1980년대 이래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백화점은 부동산 투기와 소비문화가 맞물린 공생관계였다. 아파트 입주민 입장에서는 백화점이 집값을 올려주는 호재였고, 백화점 쪽에서 보면 아파트 단지에 밀집된 입주민은 관리하기 용이한 고객이었다.

강남에 백화점 시대가 개막된 것은 1979년 9월 압구정동에 한양쇼핑센터가 문을 열면서다. 그 후 1980년 12월 반포동에 뉴코아백화점이, 1985년에는 압구정동 현대백화점과 도곡동 그랜드백화점이 개관했다. 1988년 9월 삼성동에 문을 연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은 대규모 문화센터와 금융, 부동산, 여행 등의 정보를 제공하는 정보센터를 운영하면서 백화점 영업의 새장을 열었다.

재벌들에게 백화점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무엇보다 높은 현금 수익이 재벌들을 매료시킨 것이다. 1988년 전국 26개 백화점의 총매출액은 1조 8316억 원을 기록, 전년도에 비해 40.4% 증가한 신장세를 보였다. 1989년 주요 백화점의 총매출액을 살펴보면 롯데 5868억 원, 신세계 3187억 원, 현대 1714억 원, 미도파 1084억 원이었다.

재벌들이 백화점 사업에 뛰어든 또 다른 이유는 부동산 투자를 통해 큰 재미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재벌들은 백화점 영업으로 벌어들인 자본을 밑천으로 부동산을 사들여 엄청난 시세 차익을 남겼다. 백화점협회가 전국 26개 백화점을 대상으로 분석한 '백화점업계의 자산변화'에 따르면 1988년 백화점 총자산은 1조 6359억 원으로 전년도에 비해 52.5% 증가했다. 재벌들에게 백화점 사업은 "가장 적은 세금을 내면서 가장 값비싼 땅을 보유하고 또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훌륭한 재산 증식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비리와 부실로 지은 삼풍백화점

1989년 12월 1일 서초구 서초동에 삼풍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지상 5층, 지하 4층으로 지어진 삼풍백화점의 매출액은 1992년 937억 원, 1993년 1188억 원, 1994년 1646억 원으로 전국 백화점 순위 7위에 해당했다. 강남 부유층 주부들을 대상으로 수입 의류와 호화 가구 등 고가의 제품을 판매하는 삼풍백화점은 강남의 명품백화점으로 이름이 자자했다.

삼풍백화점은 탐욕과 비리가 얽힌 복마전의 산물이었다. 원래 삼풍백화점이 건설된 부지는 아파트지구로 묶여있어 신축 허가를 받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1986년 5월 건설 예정 부지가 지구중심지역으로 용도 변경되면서 신축이 가능해졌다. 당시 항간에는 부지 용도 변경에 대해 삼풍그룹이 뇌물을 주고 관계자들을 매수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돌았다.

삼풍백화점 건설공사는 1987년 9월 시작됐다. 설계와 감리사는 우원건축이었고, 시공사는 우성건설이었다. 애초 삼풍백화점은 지상 4층에 지하 4층으로 설계됐다. 공사가 시작되자 삼풍 측은 매장을 한 평이라도 늘리기 위해 끊임없이 설계변경을 요구했다. 급기야 삼풍 측은 4층으로 설계됐던 건물구조를 바꿔 5층까지 매장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견디다 못한 우성건설은 1989년 1월 시공권을 삼풍건설에 넘겼다. 삼풍그룹 계열사인 삼풍건설이 시공사로 참여하면서 건물은 5층으로 설계 변경됐다. 관계 전문가의 검토를 거치지 않은 불법적인 설계 변경이었다.

▲ 영화 <논픽션 다이어리>의 한 장면. 삼풍백화점 참사를 담은 모습. ⓒ 영화사진진

이런 우여곡절 끝에 1989년 11월 삼풍백화점이 완공됐다. 애초 설계와 달리 지어진 건물에 준공승인이 날 리 없었다. 준공승인 받기가 여의치 않자 삼풍은 가사용 승인이라는 편법으로 1989년 12월 1일 백화점을 개장했고, 준공 승인은 9개월이 지나서야 받을 수 있었다.

개관 후에도 매장 확대를 위한 건물 구조변경은 계속됐다. 공간의 확대를 위해 수시로 벽을 헐었고, 설계에 없던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기 위해 각층 바닥을 뚫었다. 그 결과 삼풍백화점의 안정성은 더욱 취약해졌다. 증축과 구조 변경에 따른 처벌은 벌금 몇 푼을 내면 그만이었고, 담당 공무원들은 뇌물로 입막음했다.

총체적인 비리와 불법 위에 지어진 건물이 멀쩡할 리 없었다. 삼풍백화점은 개장한 순간부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개장 직후부터 원인 모를 미세한 진동이 발생했고, 천정에서 물이 새는 등 위험 징후가 나타났다. 그러나 회장 이준을 비롯한 삼풍백화점 경영진은 돈벌이에만 몰두할 뿐 고객의 안전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탐욕 위에 쌓은 허망한 붕괴

1995년 6월 29일 목요일 오후 5시 57분, 삼풍백화점이 붕괴했다. 붕괴의 조짐은 두 달 전부터 감지됐다. 1995년 4월 삼풍백화점 A동(북관) 5층 천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한 달 후인 5월 균열은 더욱 심해졌다. 심상치 않은 징후가 나타나자 삼풍백화점 측은 기본적인 안전검사를 실시했고, 결과는 건물 붕괴의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쯤 되면 건물을 폐쇄하고 정밀한 안전진단과 후속 대책을 세우는 것이 상식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탐욕에 눈이 먼 삼풍백화점 회장 이준은 이를 무시하고 돈벌이에만 몰두했다.

사고 하루 전인 6월 28일 삼풍백화점 A동 옥상에 '펀칭 현상'이 일어났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옥상 바닥이 기둥과 분리되면서 천천히 내려앉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운명의 6월 29일이 밝았다. 아침 8시 붕괴 조짐은 곳곳에서 발견됐다. 5층 식당가 천장에서 물이 쏟아지는가 하면, 바닥이 주저앉으면서 식탁이 기울어지고 주방조리대가 넘어졌다. 불길한 징후를 보고 받은 회장 이준과 사장 이한상은 균열이 발생한 현장을 통제하고 고객들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숨기기에 바빴다.

▲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께 삼풍백화점이 붕괴했다. 서울도서관 3층 전시실 사진을 촬영했다. ⓒ 전상봉

오후 2시, 회장 이준을 비롯한 임원 11명이 참석한 대책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경비조장 김종철이 5층이 무너질 것 같다고 말하자 전무 이격이 힐책하면서 경비원 보안유지 교육을 지시했다. 백화점은 정상영업을 하고 날이 어두워지면 보수공사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회의를 마친 다음 사장 이한상은 5층으로 올라가 문제의 현장을 손님들이 보지 못하도록 가리라고 지시했다. 참사를 막을 마지막 '골든타임'은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갔다.

오후 5시 40분, 현장을 점검하던 시설부장 이영철이 대책회의장에 전화를 걸어 "붕괴가 진행되는 것 같다"고 보고했다. 이준과 이한상을 비롯한 경영진은 안내방송도 하지 않은 채 황급히 백화점을 빠져 나갔다. 건물을 빠져나간 이들이 무전기로 내린 마지막 지시는 '빨리 물건을 밖으로 옮기라'였다.

오후 5시 57분, 삼풍백화점 A동 옥상이 요란한 파열음을 내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은 지 만 6년이 되지 않은 지상 5층, 지하 4층 건물이 폭삭 주저앉는데 걸린 시간은 20초에 불과했다.

붕괴의 순간 굉음과 강풍이 일면서 먼지와 파편이 허공으로 튀었다. 사고의 현장은 아비규환이었다. 건물 잔해 더미 속에서 구조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아우성쳤고, 피투성이가 된 부상자들의 비명과 신음소리가 가득했다. 사람들의 생사가 엇갈리는 참사의 순간 건물 잔해를 뒤적이며 백화점 상품을 훔치는 사람도 목격됐다.

사고의 현장은 지옥이었다. 붕괴 사고로 502명이 죽었고, 6명이 실종됐으며 937명이 다쳤다. 사망자를 성별로 살펴보면 여성이 396명이었고 남성이 106명이었다. 연령별로는 21~30세가 258명, 31~40세가 80명, 11~20세가 71명, 10세 미만의 아동이 14명이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한국전쟁 이래 가장 많은 인명피해(1445명)가 난 기록적인 참사였다.

강남공화국의 부끄러운 민낯

▲ 붕괴 현장을 방문한 조순 서울시장 모습. 조순 서울시장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직후인 7월 1일 민선 1기 시장으로 취임했다. 서울도서관 3층 전시실 사진을 촬영했다. ⓒ 전상봉

"여보쇼. 무너진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손님들에게도 피해가 가지만, 우리 회사의 재산도 망가지는 거야."

붕괴 사고 이틀 후인 7월 1일 서초경찰서에 출두한 이준은 기자들을 향해 이렇게 내뱉었다. 그 순간 일제의 밀정이었고, 중앙정보부의 창설 멤버로 돈의 단맛에 중독된 그의 이력이 얼굴을 스쳤다.

삼풍백화점의 붕괴는 설계, 지반공사, 시공, 감리, 설계변경, 가사용, 준공검사, 증축의 과정에서 누적된 비리와 부실이 빚어낸 결과였다. 국민들의 분노와 질타가 쏟아지는 가운데 붕괴 사고의 책임을 물어 25명이 구속됐다. 이들의 혐의는 업무상과실치사, 업무상횡령, 뇌물공여 및 뇌물수수, 허위공문서작성 등 다양했다. 회장 이준에게는 업무상 과실치사, 뇌물공여 등의 혐의가 적용됐다.

해가 바뀐 1996년 8월 23일 피고인들에 대해 대법원은 확정 판결을 내렸다. 삼풍그룹 회장 이준은 업무상과실치사상죄가 적용돼 징역 7년 6월이 확정됐다. 2심에서 징역 7년형을 받은 사장 이한상은 상고를 포기하여 이미 형이 확정된 상태였다. 뇌물을 받고 삼풍백화점의 설계변경을 승인해준 전 서초구청장 이충우와 황철민에게는 뇌물수수죄가 적용됐다. 이충우에게는 징역 3년에 추징금 1300만 원이, 황철민에게는 징역 2년6월에 추징금 1200만 원이 선고됐다.

삼풍백화점 붕괴는 국민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김영삼 정부 하에서 연속적으로 발생한 대형 참사로 국민들의 공포와 불안감은 커진 상태였다. 이런 가운데 김영삼 정부는 1980~1990년대 초반에 지어진 건물들에 대한 안전 진단을 실시했다. 진단 결과 안전한 건물은 2%에 불과했고, 나머지 대부분의 건물은 보완공사가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3년 4월 삼풍백화점 회장 이준이 7년 6월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다. 당뇨와 고혈압, 신장병으로 투병 중이던 그는 출소 후 6개월이 지난 2003년 10월 사망했다. 탐욕에 눈이 멀어 돈벌이에 혈안이 된 그의 삶은 그렇게 끝났다.

▲ 서울 서초구 양재동 시민의숲에 위치한 삼풍참사위령탑은 삼풍 참사 3주기를 앞둔 1998년 6월 27일 세워졌다 ⓒ 전상봉

이준의 둘째 아들 이한상은 2002년 10월 출소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삼풍 사고가 영적인 전쟁의 한 사건"이라면서 "저와 함께 고난을 받으신 많은 분들의 고난과 헌신이 귀하게 쓰여 하나님 이루시는 일에 진보가 있다면 감사할 뿐"이라고 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도 진정어린 반성과 사과가 없는 그의 넋두리는 악마의 주술과도 같았다.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는 돈을 위해서라면 시민의 안전과 목숨은 간단히 외면되고 마는 대한민국의 극단적인 단면을 보여줬다. 동시에 강남이라는 돈과 권력의 성채가 얼마나 허망한 탐욕 위에 지어졌는가를 드러낸 강남공화국의 부끄러운 민낯이었다.

덧붙이는 글 | 전상봉 시민기자는 서울시민연대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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