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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공화국의 민낯

배꽃 흐드러지던 압구정, 20년만에 '욕망의 해방구'로
[강남공화국의 민낯14] 서태지와 아이들, X세대 그리고 압구정동

17.10.06 15:48 | 글:전상봉쪽지보내기|편집:홍현진쪽지보내기

"아주 먼 옛날 옛적
당신들이 생각하던 세상이 아니다
'아차'하는 사이에도
길모퉁이 한 곳에는 빌딩들이 들어선다
여자들의 옷차림은 계절 따라 뒤바뀌고
남자들의 머리칼은 길어졌다 짧아진다
점점, 더, 빨리빨리,
이것이 1990년대이다"

그룹 넥스트(N.EX.T)는 <코메리칸 블루스(Komerican Blues)>에서 1990년대를 이렇게 노래했다. 3저 호황과 시민의 힘으로 쟁취한 정치적 민주화의 뒤를 이은 1990년대는 소비의 시대였다. 1986년 2701달러였던 1인당 GDP는 1992년 7539달러를 기록했고, 1995년엔 1만 1471달러를 달성,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가 개막됐다.

호황의 물결 속에, 거리는 자동차로 넘쳐났다. 1985년 5월 100만대를 넘어선 자동차는 1988년 12월 200만대, 1990년 6월 300만대, 1991년 10월 400만대, 그리고 1992년 500만대를 돌파했다. 자동차의 증가 추세는 1990년대 초반 하루 평균 2000여대가 늘어날 정도로 폭발적이었다.

▲ 3저 호황에 힙입어 1990년 초반 하루 평균 2000여대의 자동차가 늘어났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전시돈 포니자동차 모습. ⓒ 전상봉

민주화 이후 문화, 환경, 여성, 인권, 성평등 등 다양한 담론들이 분출하기 시작했고 무선호출기, 컴퓨터, 휴대전화 등 통신기기들이 보급되면서 국민들의 일상생활에 일대 혁명적인 전환이 일어났다. 이러한 시대 흐름 속에서 다양한 장르의 대중음악이 발표되면서 시대의 변화를 선도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1992년 2월 17일 미국의 인기그룹 '뉴 키즈 온 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의 내한공연이 열렸다. 당시 10대 소녀들에게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1월 20일 예매가 시작되자 1시간만에 1만여 장의 티켓이 팔려나갈 정도였고, 공연 당일에는 10만 원을 호가하는 암표가 거래되기도 했다.

공연이 열린 올림픽체조경기장은 1만 5천여 명의 관객이 몰려들어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그날 저녁 7시 30분 '뉴 키즈 온더 블록'이 히트곡 <스텝 바이 스텝>을 부르면서 무대에 등장하자 1천여 명의 관객이 무대 앞으로 우르르 몰려들면서 예기치 않은 불상사가 발생했다. 무대 바로 앞 바닥에 앉아 있던 1백여 명의 관객이 인파에 밀려 짓밟히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일순간 공연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인파에 깔린 50여 명이 인근 병원으로 긴급 호송됐다. 예기치 않은 사태로 공연은 중단됐다. 밤 11시 30분 공연이 재개되자 또 다시 흥분한 관객들이 잇따라 졸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날 공연 사고로 1명이 사망하고, 40여 명이 부상당했다.

사상 최악의 공연 사고로 기록된 사태의 파장은 컸다. 청소년들의 호기심을 상술에 이용하면서 안전문제를 소홀히 했다는 비판이 쏟아지는 가운데 공연을 주최한 서라벌레코드사 사장이 업무상과실치사상 및 공연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해외 팝스타 내한 공연을 불허한다는 문화부의 방침이 발표되면서 예정된 공연이 줄줄이 취소됐다. 신문에서는 연일 '입시 교육에 찌든 10대들이 벌인 히스테릭한 현상'이라는 진단과 함께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그리고 달포가 지난 3월 23일 서태지와 아이들이 1집 앨범 <Yo! Taiji>를 발표한다. 4월 11일 MBC '특종 TV연예'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세상에 첫 선을 보인 서태지와 아이들은 곧바로 10대들의 우상이 되었다. 한국어 랩은 안 된다는 편견을 깨고 등장한 이들의 노래와 춤은 낯설고 생경한 것이었다. 신세대들은 열광했지만 기성세대들은 이들의 노래와 춤이 낯설고 불편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과 함께 트로트와 발라드가 주류였던 대중음악의 지형에 지각변동이 일어나 랩과 댄스 음악이 대세를 이뤘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대중음악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제4집 앨범에 수록된 <時代遺憾>의 경우 공연윤리위원회가 가사의 불온성을 문제 삼아 심의를 불허하자 이에 항의, 가사를 삭제한 채 앨범을 발매했다. 이를 계기로 음반 사전심의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되었다.

1996년 1월 31일 서태지와 아이들은 전격적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이들의 활동 기간은 만 4년이 되지 않았지만 '한국의 대중음악 역사는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큰 족적을 남겼다. 이들의 은퇴와 함께 1990년대 대중음악의 전성기는 막을 내렸고, 그해 9월 H.O.T가 데뷔하면서 아이돌이 대중음악을 선도하는 새로운 시대가 개막되었다.

▲ 1996년 1월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하면서 1990년대 대중음악의 전성기는 막을 내렸고, 그해 9월 H.O.T가 데뷔하면서 아이돌이 대중음악을 선도하는 새로운 시대가 개막되었다. ⓒ 전상봉

X세대 또는 오렌지족이라는 이름의 신세대

"1993년 12월 1일, 낯선 광고 한 편이 텔레비전 화면에 선을 보였다. 짧게 끊어지는 화면들, 천정에 매달린 채 박살나는 전구, 텅 빈 방안에서 천천히 흔들리는 샌드백, 고층빌딩 위를 날아오르는 비둘기 떼, 파편화된 장면 사이를 연결하는 자동차들의 질주. 그리고 반복되는 한 줄의 카피. '나는, 트윈엑스 세대?' (주)아모레 퍼시픽이 X세대 감성 남성화장품이라고 내놓은 '트윈엑스'의 광고였다. 같은 회사가 동시에 출시한 여성화장품 '내 나이 20과 1/2 레쎄'와 더불어 이 광고는 당시 신인에 가까웠던 이병헌과 신은경을 X세대의 아이콘으로 등극시키며 이듬해부터 우리 사회에 X세대라는 말이 창궐토록 했다." - <문화과학>, 2010년 여름(통권 62호), 92쪽

X세대의 출현은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구분하는 하나의 잣대였다. 1970년 전후에 태어나 1990년대에 대학을 다닌 X세대는 개인의 가치를 사회 공동의 가치보다 중시하는 세대였다. 컴퓨터를 통한 온라인 네트워크를 경험한 이들은 이전 세대와 달리 온라인을 통해 사회 관계망을 형성한 첫 번째 세대이기도 했다.

오렌지족이라고도 불린 이들은 386세대와 달리 학생운동에 관심이 크지 않았고, 해외 여행자유화 조치(1089. 1. 1) 이후 어학연수와 해외여행이 확산되던 시기에 대학을 다닌 세대였다. 이들이 등장한 1990년대 초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대표되는 인문학 열풍이 불었고, 트렌디드라마 <질투>와 기획 영화의 시작을 알린 <결혼이야기>가 개봉되어 흥행가도를 달렸다.

▲ 1992년 16부작으로 방영된 문화방송 미니시리즈 <질투>는 트렌드드라마의 효시였다. ⓒ 문화방송

X세대의 등장은 기성세대들에게 하나의 충격이었다. '조국 근대화의 기수'도, 그렇다고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선봉대도 아닌 X세대들에게 기성세대는 이질감을 느꼈다. 오직 놀고, 쓰는 데서 보람을 찾는 이들은 좋게 말하면 소비문화에서 자아를 찾는 세대였고, 있는 그대로 말하면 부모세대의 재산을 쓰는 데 열중한 세대였다.

더러는 부모세대의 재력에 힘입어 해외 유학길에 올랐으나 공부는 내팽개치고 향락에 빠지기도 했다. 가수 싸이가 2012년 7월 발표하여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강남 스타일>은 X세대(오렌지족)의 진화된 감성에 기초한 곡이었다.

1990년대 X세대가 벌인 한바탕의 잔치는 오래 가지 못했다. 1997년 IMF 외환위기와 함께 X세대의 황금기는 저물었고 뒤이어 88만원세대가 등장했다. 중고등 학생 시절 IMF 외환위기를 경험한 88만원세대는 폭등하는 등록금과 청년실업의 무게를 짊어지고 사회에 진출한 세대였다.

소비문화의 특구, 압구정동 로데오거리

▲ 1979년 9월에는 강남 최초의 백화점인 한양쇼핑센터 영동점(현 갤러리아백화점 압구정)이 개장하면서 압구정동 소비문화의 거점으로 뿌리를 내렸다. ⓒ 갤러리아 백화점

"압구정동은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통조림 공장이다."

시인 유하는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2>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강남구 압구정동은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배꽃이 흐드러지던 과수원이었으나 불과 20여년 만에 대한민국의 소비문화를 상징하는 장소로 탈바꿈했다.

1975년 3월 현대건설이 아파트 공사를 시작하면서 개발되기 시작한 압구정동은 1980년대를 거치면서 강남 제일의 부촌이 되었다. 1979년 9월에는 강남 최초의 백화점인 한양쇼핑센터 영동점(현 갤러리아백화점 압구정점)이 개장하면서 압구정동 소비문화의 거점으로 뿌리를 내렸다. 1979년 성수대교가 개통하고, 1985년 동호대교가 놓인 데 이어 지하철 3호선이 개통(1985. 10)하면서 압구정동은 교통 요지가 되었다.

1980년대 중반 명동에서 이주한 고급 디자이너숍과 카페가 자리 잡으면서 압구정동은 상류층 소비문화의 중심가로 번창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가 되자 갤러리아백화점 동관 앞에서 학동사거리로 이어지는 압구정동 로데오거리는 강남 상류층의 소비문화를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이때부터 압구정동은 고급 가구와 패선의류, 수입품과 외제차가 소비되고, 성형외과와 남성용 피부 관리 업소가 입지한 사치스러운 동네로 각인됐다. 오렌지족, 야타족, 여피족, 유학파 방학족, 서울대 귀족서클 등으로 불리는 젊은이들이 유흥문화를 향유하는 동네로 압구정동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한마디로 말해 1990년대 압구정동 로데오거리는 '소비의 카니발'이 벌어지는 장소였고, X세대(오렌지족)가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욕망의 해방구'였다.

덧붙이는 글 | 전상봉 시민기자는 서울시민연대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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