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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공화국의 민낯

강남 8학군의 탄생, 이렇게 시작됐다
[강남공화국의 민낯12] 교육특구, 강남 8학군의 탄생

17.09.17 11:15 | 글:전상봉쪽지보내기|편집:장지혜쪽지보내기

▲ 1980년 발표된 7.30 교육개혁 조치로 대학 문턱이 낮아지긴했지만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는 대학 서열 구조는 여전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학벌체제의 벽은 높아졌다. ⓒ 전상봉

문교부는 ​1968년 7월 15일 중학교 입학시험을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학생들의 신체 발달 저해', '이기적이고 비협동적인 성격 형성', '학교 격차의 조성', '사교육비 부담', '학교 교육 불신' 등이 폐지 이유였다. 1969년 서울을 시작으로 1970년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인천, 전주에서 중학교 입학시험이 폐지된 데 이어 1971년 전국으로 확대됐다. 중학교 입학시험이 폐지되면서 서울 소재 5대 공립 중학교(경기, 서울, 경복, 용산, 경동중)가 문을 닫았다. 

"공부는 고등학교에서 더 시키고 중학교의 어린 학생에게는 과도한 입시경쟁에서 벗어나 심신을 고루 발달시키도록 하라." - 국정브리핑 특별기획팀, <대한민국 교육 40년>, 169쪽

대통령 박정희의 이 같은 지시에 따라 문교부 장관 민관식은 1973년 2월 28일 고등학교 평준화와 추첨입학제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해가 바뀐 1974년 2월 14~15일 서울과 부산에서 고등학교 배정을 위한 컴퓨터 추첨이 시행되면서 중학생들이 고교 입시에서 해방됐다. 고교 평준화는 서울과 부산을 시작으로 1975년 대구, 인천, 광주, 1979년 대전, 전주, 청주, 마산, 수원, 춘천, 제주, 1980년 성남, 원주, 천안, 군산, 이리, 목포, 안동, 진주 등의 도시로 확대됐다.

7.30교육개혁 조치

중학교 입시 폐지와 고교 평준화로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입시 경쟁이 사라졌다. 그러나 고교 평준화는 대학 입시라는 극심한 경쟁을 3년간 유예한 것에 불과했다. 베이비붐세대가 대학 입시생이던 1970년대 대학문은 좁았고, 좁은 문(대학 입시)을 통과하기 위한 경쟁은 과외 열기를 부추겨 가계에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즈음 문교부 관련 교육연구기관의 자료에 따르면 개인 및 집단 과외비로 연간 2조1000억 원, 학원비로 1조1000억 원이 지출됐다. 이 같은 과외비용은 정부 예산의 6%, 전체 교육예산의 30%에 달하는 액수였다.

당시 항간에는 '과외 잡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겠다'는 말이 떠돌 정도로 과외비 부담이 컸다. 전두환 신군부는 이 같은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 1980년 7월 30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이름으로 교육개혁 조치를 발표했다. '교육정상화 및 과열 과외 해소방안'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7.30교육개혁 조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사설 학원의 학생 출입 엄금 △위반 학원 인가 취소 △과외교사 등록 의무화 △교육방송 실시 △과외 소득의 세금징수 등이 과열 과외 해소방안이었고, △대학 본고사 폐지 △대입 학력고사 실시와 고교 내신 성적의 반영 △대학입학 정원 증원과 졸업정원제 실시 △대학 주야간 구분제도의 폐지가 대학 교육 정상화 방안의 골자였다.

교육개혁 조치가 발표되자 이른바 4대 일간지는 '교육정상화의 길'(동아일보), '전국민적 호응을!'(조선일보), '획기적인 교육계획'(중앙일보), '영단(英斷)적인 교육혁신'(한국일보)이라는 환영 일색의 기사를 실었다. 전두환 신군부는 7.30교육개혁 조치를 통해 국민들의 환심을 사는 한편, 대학을 체제 순응형 기능인을 길러내는 양성소로 개편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7.30교육개혁 조치는 과외비 부담 해소와 대학 문턱을 낮추는 효과가 없지 않았다.

"그해 광주항쟁이 있었고, 2학기부터 과외가 금지되고 본고사가 폐지됐습니다. 그 조처에 담긴 '마법'은 놀라웠습니다. 2년이 지난 뒤 3학년이 되자 '성적 게시판'에는 새로운 이름들이 등장했습니다. 가난한 동네에 사는 친구들 이름이 부쩍 늘었습니다. 제 동기생들의 입시 성적표는 더욱 놀라웠습니다. 고교평준화 전 '깡패 학교'로 이름난 학교에서 재수생까지 합해 30명 가까이 서울대에 진학했습니다. 한 해에 한두 명 가량을 서울대에 보내던 학생수 600여 명의 지방 고등학교는 단숨에 입시 명문고가 됐습니다." - 권복기, '전두환 정권이 그리운 단 한 가지 이유', 한겨레, 2007년 6월 29일

7.30교육개혁 조치로 대학 문턱이 낮아진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는 대학 서열구조는 여전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학벌체제의 벽은 높아졌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고교 평준화 정책과 7.30교육개혁 조치는 교육의 평준화가 아니라 경쟁의 평준화로 귀결됐다. 여기에 더해 서울 도심의 명문고들이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강남 8학군이라는 교육특구가 탄생하게 되었다.

강남 8학군의 탄생

고교 평준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학군(學群)제도가 도입됐다. 학군이란 중학교 졸업생을 추첨으로 고등학교에 배정하기 위해 서울을 몇 개의 구역으로 구분한 제도이다. 고교 평준화가 시행된 1974년 서울은 6개 학군으로 편성됐다. 서울시청을 중심으로 반경 3㎞이내 지역은 공동학군으로, 나머지 지역은 5개의 일반학군으로 구분되었다. 당시 공동학군에는 서울시내 인문계 고등학교 87개교 가운데 46개교가 밀집돼 있었다.

학군제 시행 이후 큰 폭의 제도 변화는 1980년 2월 19일 단행됐다. 서울시 교육위원회는 이날 고등학교 학군 설정에 관한 조례를 개정하여 종전의 출신 중학교 중심의 고등학교 배정 방식을 거주지 중심으로 개편하였다. 이때의 개편으로 거주지에 관계없이 진학이 가능한 서울 도심의 공동학군이 폐지되고, 거주지 중심의 완전학군제가 시행되었다.
▲ 1980년 전기대학 입학 시험날, 대학 재학생 선배들이 출신 고등학교 후배 수험생들을 격려하기 위한 펼침막. 이미지는 대한뉴스(제1274-5호)를 캡쳐했다. ⓒ 국가기록원

1974년
고교평준화 등장(공동학군 1곳, 일반학군 5곳)
1975년
공동학군 1곳, 일반학군 5곳
1976년
경기고 강남 이전
1977년
공동학군 1곳, 일반학군 7곳
1978년
8학군 등장(공동학군 1곳, 일반학군 9곳)
1980년
거주지 중심 배정 완전학군제(일반학군 9곳)
1996년
시내 중심 공동학군제 부활
1999년
자치행정구에 맞게 11개 일반학군
2010년
광역학군제(고교선택제) 도입

      - 출처 : 국정브리핑 특별기획팀, <대한민국 교육 40년>, 227쪽

완전학군제의 도입은 학생들을 가급적이면 걸어서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하자는 취지에 따른 것이었다. 문제는 좋은 취지가 반드시 선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강북의 명문고들이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강남 8학군은 서울 도심의 공동학군을 강남에 옮겨 놓은 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8학군은 강남에 거주하는 학생들만 입학할 수 있는 배타적인 학군이 되었다.

명문고들이 강남 이전을 시작하던 1970년대 후반 강남에는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면서 중상류층의 이주가 급증했다. 강남 8학군이 교육특구로 부상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교육 당국은 이에 대한 대책은 세우지 않고 더 많은 고등학교를 강남으로 이전시키는 데 급급했다.

1980년대가 되자 강남의 인구가 급증하여 8학군 고등학교의 모집 정원을 초과하게 됐다. 이런 가운데 강남 8학군 고등학교들은 명문고로 도약하기 위한 무한경쟁을 펼쳤다. 고교평준화 세대가 처음으로 대학에 진학한 1977년 강남 소재 고등학교 가운데 서울대 합격생을 가장 많이 배출한 학교는 영동고(17명 합격)였다.

강남 8학군 고등학교의 약진은 완전학군제가 시행되면서 두드러졌다. 완전학군제 세대가 처음으로 대학에 진학한 1984년 강남 8학군 고교의 서울대 합격생은 영동고 78명, 경기고 74명, 상문고 58명, 서울고 54명, 휘문고 37명, 세화여고 31명, 경문고 30명, 서문여고 27명, 정신여고 25명, 영동여고 24명, 숙명여고 20명이었다. 그야말로 강남 8학군 고등학교의 놀라운 약진이었다.

불과 몇 년 사이 서울대 합격생이 부쩍 늘어난 요인은 우수 교사의 초빙, 스파르타식 교육을 꼽을 수 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우수한 신입생을 많이 배정받았기 때문이다. 이즈음 강남 8학군 고등학교 교장들은 연합고사 성적이 우수한 신입생(200점 만점에 180점 이상)을 더 많이 배정받기 위해 서울시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엄청난 로비를 벌였다. 사정이야 어찌됐건 서울대 합격생을 많이 배출하게 되면서 고교 평준화 정책으로 해체된 고등학교 서열체계가 강남 8학군이라는 지역으로 대체되었다.

8학군 열풍과 위장 전입

▲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영동고등학교는 완전학군제 세대가 처음으로 대학에 진학한 1984년 78명의 서울대 합격생을 배출했다. ⓒ 전상봉

강남 8학군 열풍은 위장전입이라는 사회적 병폐를 동반했다. 1981~1985년 사이 서울시민은 평균 30%가 이사를 다녔다. 반면 강남구의 이사 비율은 89%였다. 1980년대 중반 서울의 가구 증가율은 7.9%, 고교생 증가율은 1.2%인데 반해 강남 8학군의 가구 증가율은 23.4%, 고교생 증가율은 57.5%에 달했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위장전입은 아파트 당첨을 위한 투기용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가 되자 위장전입의 용도에 강남 8학군 고등학교 진학이라는 쓰임새가 더해졌다. 그 결과 장관급 이상의 고위공직자 청문회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5대 비리(병역면탈, 부동산투기, 탈세, 위장전입, 논문표절)'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인구 급증과 위장전입으로 강남 8학군 고등학교 주변의 집값 또한 폭등했다. 바야흐로 교육과 부동산이 맞물리면서 '돈 있으면 강남 가고, 강남 가면 명문대 간다'는 등식이 성립됐다. 이 시기 강남 아파트 단지로 이주한 사람들은 고위 공무원, 변호사, 의사, 기업 임원이 대부분인 고소득층이었다. 고학력 전문직인 이들에게 강남 8학군은 자녀들을 더 높은 신분으로 상승시킬 수 있는 계층이동의 통로로 인식되었다.

위장전입이 사회적인 이슈로 부각되자 1982년 경찰과 사회정화위원회를 비롯한 관계기관은 강남 8학군에 대한 합동 단속을 벌였다. 단속 결과에 따르면 3965명의 조사 대상자 중 1653명(42%)이 위장전입자인 것으로 밝혀졌다. 한해 뒤인 1983년 경기고와 서울고 등 10개교 주변 47개동 3212명을 단속한 결과 238명이 위장전입자로 적발됐다.

관계 당국의 단속에도 강남 8학군으로의 위장전입은 막을 수 없었다. 당시 강남구 대치동 한 아파트 주민들은 반상회에서 '친척 친지들의 허위전입 부탁을 받지 말자'는 색다른 건의를 하고 관할 동사무소에 허위 전입자를 철저히 가려줄 것을 요청하는 일도 있었다. 1980년대 중후반을 거치면서 강남 8학군으로의 전입은 더욱 늘어나 해마다 연초가 되면 학교 주변의 아파트 값과 전셋값이 폭등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강남 8학군으로 학생들이 몰려들자 서울시 교육위원회는 1986년부터 완전학군제에 또 다른 조건을 추가했다. 고등학교 배정 기준에 거주지와 함께 거주기간을 반영키로 한 것이다. 8학군 장기 거주자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전입 가정을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 거주기간을 처음 반영한 1986년 8학군 고등학교를 배정받으려면 1년 이상 강남에 거주해야 했다. 거주기간이 1년 미만이던 527명의 학생들은 강북의 고등학교에 배정되었다.

그럼에도 강남의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해가 지날수록 강남 8학군에 배정받으려면 오랜 기간을 거주해야 했다. 거주기간이 가장 길었던 해는 1993년으로 40개월 이상 거주한 학생들이 8학군 고등학교에 배정되었다. 이 기간을 채우지 못한 학생들은 한강 건너 강북에 위치한 고등학교를 다녀야 했다.

강남 8학군의 적체에 따른 비극적인 사건은 1994년 10월 21일 발생했다. 그날 아침 7시 38분께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숨진 8명의 여고생은 8학군 지역인 강남구 압구정동에 살면서 강 건너인 성동구 행당동 소재 무학여고를 다니던 학생들이었다. 만약 이들이 강남 8학군에 배정됐다면 당하지 않았을 참변이었다.

덧붙이는 글 | 전상봉 시민기자는 서울시민연대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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