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15 05:08최종 업데이트 22.12.15 05:08
  • 본문듣기
독자가 SF를 친밀하게 느끼도록, 은밀하게 접근해 진입장벽을 슬그머니 무너뜨립니다. 이를 위해 SF 읽는 모습을 생활밀착형으로 전달합니다. [편집자말]

책 <랑과 나의 사막> ⓒ 현대문학


천선란의 <랑과 나의 사막>에는 사진과 그림을 구별하는 구절이 나온다. 소설의 화자인 로봇 '고고'는 사막을 바라보던 인간 아이 '랑'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진은 현상의 전후를 추측하게 하지만 그림은 그 세계가 실재한다고 믿게"(19쪽)한다고.

사진은 현실을 의도적으로 포착하고 여분을 소거한 결과물이다. 사진을 보는 사람은 그것이 어느 현실에서 뽑혀 나왔는지 추측하며 사진가의 의도를 해석한다. 하지만 그림은 심상에 존재하는 비현실을 구현한 것이므로 화가의 마음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그림을 보는 이는 그것이 태어난 마음을 읽는다.


고고의 말을 들은 랑은 '그렇다면 사막은 그림'이라고 말한다. 랑에게 사막의 풍경은 현실이 아니다. 바람조차 불지 않을 때 사막은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공간이다. 그러므로 랑이 정의하는 사막은 마음을 두는 바에 따라 무엇으로든 변한다. "변화한다는 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다는 것"(19쪽)이다.

<어린 왕자>의 '나'는 어린 왕자에게 아무것도 아닌 상자를 그려주며 '네가 원하는 양은 여기 있다'는 이야기를 덧붙인다. 랑은 사막을 바라보며 고고에게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는 랑이 생존을 방해하는 사막에 대항해 살아가는 방식이다.

인간 '랑'이 죽고 없는 그후

나는 이를 읽으며 영상과 소설의 차이를 생각했다. 영상은 보여줌으로써 생각하게 하지만 소설은 생각하게 함으로써 보여준다. 읽는 이가 상상하지 않으면 소설의 풍경은 구현되지 않는다. 혹은 상상하기에 따라 제각각으로 구현된다. <랑과 나의 사막>의 배경이 되는 사막은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소설다운 사막이다.

이 소설은 '아무것도'와 '무엇이든'의 사막을 만들기 위해 현실적인 요소를 생략한다. 작중의 지구는 27세기에 재난을 맞이한 이후 차차 사막으로 뒤덮였다. 배경이 되는 49세기에는 바다가 아닌 지역은 모두 사막이다.

우리의 예측 범위를 넘어가는 먼 미래의, 우리가 보지 못하는 풍경이다. 이곳의 넓이가 얼마나 되는지, 기후는 어떤지, 사람들이 어떻게 태어나 무엇으로 먹고 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역사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세계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은 최소한에 그친다.

더욱이 소설의 화자인 고고가 로봇인 탓에 현실의 많은 요소가 걸러진다. 고고는 배고프거나 졸린 경우가 없다. 모래가 얼마나 깔끄러운지, 날씨가 얼마나 덥고 추운지 알지 못한다. 햇빛에 눈이 멀거나 열기 때문에 쓰러지지도 않는다.

고고는 랑이 사막에서 생활하며 느꼈을 감각을 모른다. 고고를 통해 묘사되는 사막은 생활공간이라 보기 어렵다. 그보다는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가능성의 공간으로 작동한다. 랑이 보는 사막이 그토록 비현실적인 이유는, 고고를 거쳐 전해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고고는 랑이 죽은 다음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린 왕자>의 어린 왕자가 자신의 몸을 '나'의 곁에 두고 고향으로 떠났듯이, 랑은 고고의 곁을 떠났다. 그러니 작중 랑이 직접 말하는 장면은 없다. 고고가 아는 랑은 여기가 아니라 과거에 존재한다.

그리고 어린 왕자가 떠나면서 하늘의 별이 모두 그가 있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변하듯이, 한없이 펼쳐진 사막은 어쩌면 랑이 있을지도 모르는 공간이 된다. 전해 들은 말에 따르면 '과거로 가는 땅'이 사막 어딘가 실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고는 랑의 시체를 두고 그곳을 찾아 길을 떠난다.

애도의 여정

불가능의 가능성을 다루기 위해 사막이 단순해졌듯, 고고의 여정 역시 알레고리의 색채가 강하다. 고고는 사막을 걸어가던 중 우연히 세 명의 인물을 차례로 만난다. 인간인 버진은 어디로도 가지 않게 된 인물이다. 고고는 그에게서 과거 자신이 만들어진 목적의 단초를 얻는다. 두 번째로 만나는 알아이아이는 지금은 사라진 인간의 말을 계속해서 지키고 있는 로봇이다. 그와 대화하며 고고는 자신이 현재 무엇을 하는 중인지 확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고는 외계인 살리를 만나 미래의 가능성을 본다. 셋과의 만남을 마친 고고는 마침내 자신을 이해한다. 과거에 고고가 만들어진 목적과, 현재 고고가 이루고 싶은 목표는 합일을 이룬다. 모든 이야기는 한 점으로 집중된다. 바로 랑을 안아주고 싶다는 마음이다. 고고의 온 마음을 사로잡는, 그리고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강렬한 감정이다.

여기서 로봇에게 감정이 있느냐는 질문은 중요치 않다. 고고의 감정이 원본인지 모작인지 분류하기는 불가능하다. 고고처럼 인간도 다른 인간을 모방해서 감정을 익힌다. 타인을 통해 자신의 신체적 반응을 해석하는 언어를 배운다.

사람들은 똑같이 반응하지 않더라도 똑같은 이름의 감정을 말한다. 감정의 이름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으로 통용되는 것이다. 그러니 신체가 인간과 다르더라도 고고는 자신이 감정을 느낀다고 말할 수 있다. 랑과 같은 인간의 언어를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다. 고고의 여행은 랑을 이해하는 동시에, 랑의 사회에 편입되는 과정이다.

하나 차이가 있다면 로봇에게는 망각이 없다는 점이다. 로봇이 그리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인간의 것보다 한층 진하고 끈덕질 수밖에 없다. 고고에게는 '죽은 사람은 이제 그만 놓아주어야지'라는 생각이 없다.

오히려 메모리에 오류가 생긴 뒤로 고고는 랑의 모습이 계속 불현듯 떠오르는 문제를 겪는다. 소설이 진행될수록 고고의 몸은 랑에게서 멀어지지만, 고고의 마음은 자꾸만 랑에게 돌아간다. 그것은 소설이 끝날 무렵 비로소 그리움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사진처럼 재생되던 랑의 모습은 고고가 그리움에 그리는 그림으로 변한다.

그러니 소설은 고고의 마음이 변하는 이야기다. 홀로 사막을 걷는 고고에게는 외롭다는 글자를 쓰는 고고(孤高)가 어울린다. 그리고 불교 용어로 고고(苦苦)는 몸과 마음을 괴롭게 하는 인연 때문에 생기는 괴로움을 이른다. 고고는 상실의 고통에 시달리며 이에 대항하는 이야기를 한다.

물론 49세기에 사는 어린아이인 랑이 고고의 이름을 지어줄 때 '고고'의 뜻을 알았을 리는 없다. 하지만 사전의 뜻을 짚으며 고고를 읽으면 그림이 그려진다. 또다른 동음이의어 고고(呱呱)는 갓 태어난 아이가 첫울음을 터뜨리는 소리를 말한다. 울음소리에 비유해 '값 있고 귀중한 것이 처음으로 발족함을 알리는 소식'으로도 쓰인다. 심상의 공간에서나마 비원이 이루어지는 소식에 걸맞은 이름이다.


랑과 나의 사막

천선란 (지은이), 현대문학(202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