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08 09:17최종 업데이트 22.11.08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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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의 매력을 표현하기 위해 흔히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말을 쓴다. 그래서 이야기를 먹고 사는 문화산업에서 종종 스포츠를 소재로 활용하려고 시도해왔지만, 생각보다는 성공률이 높지 않다.

말 그대로 스포츠가 주는 긴장과 감동의 원천은 '각본 없는' 생생함에 있는 반면 영화나 만화 혹은 TV 드라마의 생명은 '각본'이기 때문이다. 잘 짜여진 각본을 통해 각본 없는 드라마를 재현한다는 것은, '꾸몄지만 안 꾸민 것 같은' 멋내기만큼이나 난이도가 높은 일이다.

1960년대, 권투의 시대

한국에서 가장 먼저 영화의 중심 소재로 활용된 스포츠는 권투였다. 1959년 노필 감독이 연출하고 최무룡과 문정숙이 주연한 <꿈은 사라지고>가 처음이었다. 사랑하는 연인이 캬바레 종업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실의에 빠졌던 권투 선수가 코치의 설득으로 다시 마음을 다잡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는 내용의 그 영화는 7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했는데, '초대박'의 기준이 관객 수 10만 명으로 통하던 당시로서는 상당한 성공이었다.
 

피묻은 대결 김묵 감독의 1960년작 <피 묻은 대결>은 대한권투연맹의 제작 지원을 받아 경기 장면을 제대로 재현한 본격적인 스포츠 영화의 시작이었지만, 흥행에는 실패하며 전문가와 대중을 함께 만족시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었다. ⓒ 우주영화사


그 성공의 영향으로 1960년에 김묵 감독이 연출한 <피 묻은 대결>은 대한권투연맹으로부터 현역 코치의 기술지도와 선수들의 보조출연 지원까지 받으며 경기 장면을 제대로 재현한 '본격적인' 스포츠 영화의 출발점이었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반항적인 제자(박노식)가 못다 이룬 자신의 꿈을 제자를 통해 대신 이루게 하려는 엄한 스승(김승호)과의 긴장관계, 그리고 그 코치의 딸(엄앵란)과의 로맨스 속에서 동양챔피언에 도전하는 여정을 그린 그 영화는 한국 권투의 메카 장충체육관에서 촬영하며 관심을 모았지만 흥행에는 참패하고 말았고, 한동안 스포츠 영화가 제작되지 못하는 원인이 됐다.


공백기를 지나 한국 스포츠 영화의 명맥을 이은 것은 1966년, 한국 최초의 세계 챔피언에 오른 김기수를 주연으로 기용해 화제를 모은 김기덕 감독의 <내 주먹을 사라>와 같은 해 최고의 흥행 배우 신성일을 주연으로 기용한 임권택 감독의 <나는 왕이다>였다.

당시 정부가 직접 발탁하고 훈련시키고 기록적인 대전료까지 지불해가며 타이틀전에 올려 챔피언으로 만든 김기수는 국가적 사업의 성과물이었다. 그는 챔피언 벨트를 들고 장충체육관 특별석을 향해 뛰어올라 박정희 대통령과 부둥켜안은 뒤 서울 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벌이며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올랐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투의 열풍이 영화계까지 휩쓸었던 것이다.

영화가 가장 먼저 권투를 주목한 이유 중에는 부족했던 제작비와 제작 여건도 있었다. 좁은 사각의 링에서 1대 1로 펼쳐지는 권투 경기의 특성상 출연자 수도 많을 필요가 없었고 촬영 장비도 많이 투입될 필요가 없었다. 대부분 실내 촬영으로 해결할 수 있어 더 짧은 시간 안에 만들 수 있다는 점도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런 여건을 고려할 필요가 없는 만화도 마찬가지였다는 점에서 당시 권투가 한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박기정 화백이 1964년에 발표한 한국 최초의 스포츠만화 <도전자>는 권투 만화였다.

권투의 뒤를 이어 대중문화와 결합한 스포츠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랑받는 종목이며 한국에서도 다르지 않았던 축구였다. 1968년 김수용 감독이 연출한 <맨발의 영광>은 한국 최초의 축구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신발과 공을 살 돈이 없어 맨발로 헝겊을 기워 만든 공을 차며 연습한 보육원 축구부가 전국대회에서 우승한 실화를 소재로 만든 영화로서 베니스영화제에 출품되었고 그 해 전국의 많은 학교에서 단체상영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1974년에는 이원복의 <불타는 그라운드>가 생생한 동작 묘사로 축구 경기의 역동적인 장면들을 재현해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축구 만화의 효시가 되었다.

하지만 축구를 영화로 재현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꽤 까다로운 일이었다. 우선 넓은 공간에서 양 팀 22명이 뛰는 모습을 포착하려면 카메라도 많이 동원돼야 하고 편집도 복잡했다.

게다가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축구팀은 국가대표팀이고, 그 팀의 활약을 그리자면 국제전을 배경으로 해야 했다. 그러자면 해외 촬영까지는 몰라도 외국인 배우 캐스팅 정도는 해야 했는데, 그 모든 것이 제작비 부담을 키우는 요소였다. 그 무렵 제작된 몇 편의 축구 영화들이 대부분 '가난한 어린이들의 고난 극복 스토리'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1970년대, 야구 시대의 개막

야구만화가 등장하는 것은 역시 고교야구가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기 시작한 1970년대였다. 1971년 이상무 화백의 <주근깨>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야구선수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이름과 모습을 바꾸고 마운드에 오르는 고교생 이야기인데, 그 소년의 이름이 바로 '독고탁'이었다.

이상무 화백의 후속작 <우정의 마운드>(1976)와 <달려라 꼴찌>(1983) 등에서도 활약한 독고탁은 키도 작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많은 상처를 입지만 늘 밝은 모습으로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며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성장기를 보낸 당대의 작고 가난한 소년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전해준 영웅이었다.

그리고 그 영웅의 활약은 또 다른 영웅들을 일깨웠고, 1976년 <강속구를 쳐라>를 시작으로 <태풍의 다이아몬드>(1982), <10번 타자>(1982) 등으로 이어진 허영만 화백의 '이강토', 그리고 단행본 120만 부를 판매해 역대 만화책 최다 판매부수 기록을 세운 <공포의 외인구단>(1982)의 '설까치'(혹은 '오혜성') 등 1980년대 한국만화를 대표하는 캐릭터가 등장하게 된다.
 

달려라 꼴찌 이상무 화백의 대표 캐릭터 독고탁은 '강하고 멋진' 주인공의 전형을 깬, 작고 가난하고 컴플렉스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온갖 고난을 이겨내는 과정은 그 시대 소년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 요요코믹스


'독고탁'과 '이강토', '설까치'는 한국 야구만화를 대표하는 3대 캐릭터인 동시에 한국만화사를 통틀어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위상을 굳히고 있는데, 그것은 역시 1982년에 창설된 프로야구의 폭발적인 인기와 결합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 사이 동네 만화 가게에서는 '읽고 가면 50원, 빌려 가면 100원'에 만화책 한 권을 볼 수 있었고, 손님의 90% 이상은 하루 100원 정도의 용돈을 받아 만화가게 문턱에 앉아 머리통 서너 개를 부대껴가며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서너 권을 함께 읽던 '국민학생' 남자 어린이들이었다. 바로 그로부터 40년간 프로야구의 가장 강력한 팬 집단이며 웹툰을 통해 자녀들 세대와 공감하는 오늘날 50 안팎의 세대다.

군산상고와 경북고의 스크린 맞대결

영화에서 야구가 주목받은 결정적인 계기는 1972년 군산상고의 황금사자기 대회 역전 우승이었다. 낙후된 지방 소도시의 이름 없는 상업고등학교에 모인 가난한 소년들, 천재적인 투수였지만 어깨 부상으로 20대의 젊은 나이에 은퇴해야 했던 감독, 그 감독의 열정적인 지도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의 말썽 때문에 닥친 팀 해체의 위기, '잘못 가르친 내 잘못이니 나를 때리라'며 말썽을 일으킨 선수들에게 배트를 쥐여주는 감독의 희생을 통해 해체의 위기를 넘기고 다시 분발한 끝에 이룬 전국대회 역전 우승의 기적. 그 해 군산상고의 우승은 극적인 순간들로 가득한 '각본 없는 드라마'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그 이야기에 주목한 것은 사회인야구의 명포수로 활약하며 '야구팬클럽(BFC)'이라는 모임을 조직해 해마다 야구협회 시상식에서 상을 받지 못한 선수들 중 큰 기여를 한 선수를 선정해 상을 수여할 만큼 대단한 야구광이었던 김기덕 감독이었다.

1964년 <맨발의 청춘>을 연출하며 최고의 흥행 감독으로 떠오른 그는 군산상고 최관수 감독과 만나 군산상고의 역전 우승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기로 약속을 하고 제작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뒤늦게 같은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 연방영화사가 김기덕 감독과 최관수 감독이 구두 약속을 한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군산상고 교장에게 야구부 지원을 약속하며 기획을 가로챘다. 그렇게 만든 영화가 군산상고 야구장에서 군산상고 선수들을 엑스트라로 활용하며 촬영한 정인엽 감독의 1977년작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야>다.

하지만 먼저 고교야구 영화를 구상했던 김기덕 감독이 군산상고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소문을 들은 경북고의 서영무 감독이 나섰고, 김기덕 감독은 경북고 야구장에서 경북고 선수들의 도움을 받아 경북고 출신의 배우 신성일을 주연으로 기용해 <영광의 9회 말>을 제작해 맞불을 놨다.

김기덕 감독은 파트너가 바뀌자 준비하고 있던 시나리오의 결말부를 약간 고쳐야 했는데, 어깨 부상으로 젊은 나이에 은퇴한 스타플레이어 출신 감독이 희생적이고 열정적인 지도로 팀을 전국대회 결승까지 이끈다는 내용까지는 같지만, 기적적인 역전승으로 끝나는 <고교결전>과 반대로 마지막 순간 선수를 보호하기 위해 팀의 패배를 감수하는 내용으로 마무리했던 것이다. 한국 스포츠 영화의 전형을 깬, 승리가 아닌 패배를 통해 스포츠의 깊은 맛을 곱씹는 새로운 영화의 등장이었다.
 

군산상고와 월명상고 1977년 정인엽 감독은 군산상고의 1972년 황금사자기 역전우승 이야기를 영화화한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야>를 제작했다. 극중 등장하는 선수들은 '월명상고' 유니폼을 입었다. 월명산은 군산상고 선수들이 하체를 단련하기 위해 뛰어서 오르내리던 산이다. (사진 가운데가 군산상고 최관수 감독, 그 오른쪽이 정인엽 감독) ⓒ 오성자(최관수 감독 부인)


그렇게 1970년대 초반 고교야구의 라이벌 군산상고와 경북고의 촬영 지원을 각각 받아 제작된 두 편의 야구 영화가 1977년 나란히 흥행 대결을 벌이며 야구영화의 시대를 열었다.

1982년 최고의 흥행작인 이현세 만화 원작의 <이장호의 외인구단>까지 야구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계속 흥행에 성공해 제작 편수와 관중 규모 모든 면에서 권투와 축구 소재 영화들을 압도하며 대체했다. 그리고 '국민스포츠'로서의 입지를 만들고 또 굳힌 야구와 함께 스포츠 영화에서 차지하는 야구 영화의 비중 역시 꾸준히 유지되었다.

만화와 영화, 야구장의 문턱을 낮추다

야구를 소재로 한 만화와 영화의 양산은 야구 인기 상승을 반영하는 현상이었지만 동시에 야구 인기 확산을 촉발한 요인이기도 했다. 경기방식과 규칙이 직관적이지 않은 야구는 관전을 위해서도 학습의 과정이 필요했고, 만화와 야구는 가장 흥미롭고 친절한 학습 도구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기가 아닌 만화와 영화를 통해서도 야구를 접하는 어린이들이 늘어나면서 야구에 입문하는 선수와 야구 경기 관전을 원하는 관심층이 모두 늘어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꾸준히 제작된 것에 비해 흥행에 성공한 작품의 비율은 그리 높지 못했다. '드라마'가 너무 약하거나 뻔했던 작품도 있었고, 반대로 '각본'의 느낌이 너무 짙었던 작품도 있었다. 야구팬들을 만족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야구 모르는 사람까지 이해시키는 데는 실패한 작품도 있었고, 두루 보기는 편하지만 정작 야구팬들의 눈은 거슬리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야구 영화는 어차피 또 만들어질 테고, 야구팬들은 어차피 또 투덜대면서라도 보긴 볼 것이다. 매일 매일 똑같은 모양으로 전개되는 가운데서도 또 기발한 방식으로 울고 웃고 감탄하고 분노할 이야깃거리들을 만들어내는 야구라는 요물에 홀릴 영화 제작자와 감독이 사라질 리도 없고, 11월부터 3월까지, 야구 없는 겨울을 야구 영화라도 보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야구팬도 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장호의 외인구단(1982) 이현세 화백의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은 1982년 이장호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그 해 최고의 흥행작이 되었다. '공포'라는 단어가 대중들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킨다는 검열 당국의 지적에 따라 제목은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바뀌었다. 남녀 주인공 '까치'와 '엄지'는 최재성과 이보희가 연기했다. ⓒ 판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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