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05 22:04최종 업데이트 22.10.05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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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SF를 친밀하게 느끼도록, 은밀하게 접근해 진입장벽을 슬그머니 무너뜨립니다. 이를 위해 SF 읽는 모습을 생활밀착형으로 전달합니다. [편집자말]
<비밀의 화원>의 메리 레녹스는 말하자면 나의 '최애' 소녀 주인공이다. 비쩍 마르고 날카롭던 아이는 충분히 돌봄을 받으며 점점 피어난다. 이 책으로 나는 '건강하게 살이 오른다'는 개념을 배웠다.

게다가 저택에서 발견한, 남들은 모르는 화원을 한껏 가꾸는 부분은 당연히 최고였다. 덕분에 나도 온전히 나만 아는 비밀 공간을 발견한다면 무엇으로 채울지 골똘히 생각한 적이 여러 번이다.


물론 <비밀의 화원>은 옛날 소설답게 이모저모 구시대적 가치관을 담고 있다. 그래도 다시 생각해도 비밀스러운 화원을 발견한 끝에 행복해진다는 이야기는 진정으로 매력적이다.

내가 빠져드는 이야기들

그 매력에는 두 가지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바로 모험과 성취다. 저택 탐험은 작은 규모일지언정 분명 모험이다. 낯선 세상으로 발을 내딛는 일이다. 마치 바다 밖의 세계를 동경한 인어공주처럼, 이방인을 따라 떠나기로 한 포카혼타스처럼, 남장을 하고 전쟁에 나간 뮬란처럼, 기존의 자리에서 빠져나와 모르는 세상의 바람을 맞기로 하는 일이다.

물론, 안다. 디즈니 프린세스는 성차별적인 세계에 산다. 그리고 건강하고 용감하고 강하다. 내 안에는 이들에게 몰입했던 어린 시절이 남아있다. 덕분에 나는 비판적인 어른이 된 지금도 용감한 여자주인공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만다.

집을 뛰쳐나오는, 새로운 세계를 향하는, 두려워하지 않는, 그리고 소원을 이루는 이야기에 내심 열광한다. 허리케인에 날려간 도로시나 탑에서 나오는 디즈니 판 라푼젤부터, 모아나, 페넬로피, 캣니스, 그리고 밀드레드, 신더, 빈티, 힐다까지, 이들은 모험을 한다.

모험에는 성취가 수반된다. 조셉 캠벨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정리했듯, 길을 떠난 영웅은 재화나 영약을 얻어 귀환한다. 그것이 전형적인 영웅의 서사다. 소녀 주인공들 역시 물리적 실체를 지닌 보물을 얻기도 한다. 다만 가장 값진 보물은 무형의 것이다. 그녀들은 경험을 얻고 능력을 증명한다. 타인과 관계를 맺고 정신적으로 성장한다. 힘겨운 선택을 해낸 끝에 자기 확신을 얻는다.

이것이야말로 아무도 빼앗지 못할 보물이다. 메리는 버려진 화원이 싱그럽게 변하도록 곳곳을 손수 돌봤다. 그 결과 화원뿐만 아니라 기쁨을 손에 넣었다. 캣니스는 자기가 직접 싸우기를 선택했고, 세상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바꿨다. 누구도 그녀를, 그 이름을, 그 결과물을 부정하지 못한다. 아무리 흔한 패턴이라도 나는 늘 이런 이야기에 속절없이 넘어간다.

<드래곤 펄>의 주인공은 구미호 
 

이윤하의 <드래곤 펄> ⓒ 사계절


<드래곤 펄>의 '민'은 모험과 성취의 계보를 잇는 주인공이다. 민이 집을 나서는 계기는 오빠 '준'이다. 어느 날 민의 집을 방문한 조사관은 준이 부대에서 탈영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전설 속의 '드래곤 펄'을 갖고 싶어서 몰래 떠났다는 것이다. 드래곤 펄은 행성을 탈바꿈시킬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졌다는 구슬이므로 누구나 탐낼 만하다. 하지만 준이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는 어딘가 이상하다. 민은 무언가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게다가 민이 보기에는 오빠가 단순히 탐욕을 부려 탈영했을 리가 없다. 오빠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오빠는 가난한 우리 가족, 가난한 우리 세계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누리도록 돕겠다는 굳은 다짐 때문에 군에 입대했다. 그런 오빠가 아무 말도 없이 부대를 떠났다고? 민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오빠가 있을 우주로 향한다.

엄마 몰래 집을 나온 민은 온통 낯선 공간을 돌아다닌다. 소설은 '천 개의 세계'를 여행하는 스페이스 오페라다. 민은 도시로 가고, 우주선을 타고, 귀신 행성으로 떠난다. 그 여정에는 물론 친구, 악당, 조력자, 방해꾼이 등장한다. 그리고 민은 모험에 걸맞은 용기와 재치를 갖춘 여자주인공이다. 어른들의 위협에 맞서 재빨리 임기응변할 줄 아는 인물이다. 요리조리 위기를 모면한 끝에 민은 결국 오빠가 사라진 연유를 밝히는 데 성공한다. 더불어 전설인 줄 알았던 드래곤 펄을 얻는다. 예측 가능한 결말이다.

조금 특별한 점이 있다면 이 소설에는 우주선과 주술이 같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민은 구미호다. 아직 어리고 약하지만 '홀리기'와 '변신'을 쓸 줄 아는 어엿한 여우다. 홀리기를 당한 사람들은 약간 멍해진 상태로 환상을 보거나, 최면에 걸린다. 민은 다른 사람을 홀려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 그리고 변신으로 완전히 모습을 바꿀 수 있다. 심지어 무생물로 변하는 일도 가능하다.

흔한 패턴? 흔하지 않은 감각

민의 능력 덕분에 소설은 조금 더 색다르게 흐른다. 민이 맺는 우정은 상당히 불안정하다. 민은 오빠가 있던 우주선에 머무르기 위해 이름과 정체를 숨긴다. 자기 대신 우연히 죽은 후보생 '장'으로 변신해 원래부터 우주선에 있던 척을 한다. 홀리기를 써서 사람들을 속인다. 민이 하는 일은 엄연히 거짓말이다. 비록 유령이 된 장의 허락을 받았더라도 마찬가지다.

민은 원래 장의 친구였던 고블린 '수진'이나 용 '하늘' 등과 친밀한 사이가 되지만, 이는 거짓말에 기반한 관계다. 이들은 민 때문에 친구였던 장의 죽음조차 모른다. 수진과 하늘은 진심으로 장을 걱정하지만, 그럴수록 도리어 친구를 죽게 만든 거짓말쟁이를 돌본 셈이 된다. 민의 거짓말은 당연히 최악의 형태로 폭로된다. 민이 남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자기부터 진실해져야 한다.

<드래곤 펄>은 미국 작가의 소설이지만 한국적인 요소로 가득하다. 드래곤 펄은 물론 여의주다. 고블린은 도깨비다. 구미호가 남을 홀리듯 용은 날씨를 조종하고 도깨비는 요술 방망이를 쓴다. 인물의 이름은 모두 한국식이다. 작중 묘사되는 소반이나 김치를 보면 다소 신기한 느낌이 든다. 어딘가 낯설게 재현되기 때문이다.

서울국제작가축제에서 김보영 작가는 이윤하 작가와의 대담 때, 자신은 한국 독자를 대상으로 쓰기에 굳이 김치를 묘사하지 않을 것이고 굳이 바둑판의 모양새를 설명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주인공 민의 거짓말은 어쩌면 그런 기묘함에 기인하는 것일지 모른다. 작중 여우는 남을 속이는 능력을 지녔다는 이유로 차별받는다. 믿지 못할 존재로, 이웃으로 두기에 부적절한 초자연인으로 취급된다. 그래서 여우들은 정말로 남을 속이고 정체를 숨겨야 한다. 남들과 같은 평범한 사람인 척을 해야 한다. 이는 소수자의 서사다. 게다가 민은 어린 여자아이기에 더욱 다른 수단이 없다.

민은 순진하고 용감하더라도 착하지만은 않고, 민의 주변은 선악이 그리 명백하지 않다. 이런 요소는 감동을 줄이는 대신 이야기에 현실감을 부여한다. 아직 번역되진 않았지만, 후속작은 <드래곤 펄>에서 악당이었던 인물의 조카가 주인공이다. 그가 삼촌의 죽음을 쫓으며 명예를 추구하는 이야기라고 한다. 여기서 민은 살짝 나쁜 사람으로 등장한다. 자기가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주인공이면(후속작에서는 아니긴 하지만) 곧 옳다는 신뢰를 흔드는 설정이다.

이렇듯 민의 모험과 성취는 흔한 패턴을 따르면서도 다소 신선한 감각을 선사한다. 내 안의 어린이는 메리에게 했던 만큼 민에게 빠지지는 않았지만, 민을 용감한 여자주인공 계보에 올리는 데에는 동의했다. 그리고 솔직히 홀리기와 변신을 활용한 설정은 썩 괜찮았다고 고백했다. 어른인 나는 그보다 후한 평가를 내렸고, 후속작을 기다려보자고 말했다.


드래곤 펄

이윤하 (지은이), 송경아 (옮긴이), 사계절(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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