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9.20 13:28최종 업데이트 22.09.20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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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장례식을 마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관이 포차에 실려 버킹엄궁 인근 거리를 지나고 있다. 여왕의 관은 웨스트민스터 사원부터 버킹엄궁을 거쳐 하이드파크 인근 웰링턴 아치까지 천천히 이동하며 시민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 연합뉴스


11일간 진행된 영국 엘리자베스 2세의 국장이 19일로 끝났다. 전통이라는 큰 틀에서 군과 종교를 활용한 의례였다. 1485년 헨리 7세가 조직한 '요먼'이라 불리는 군대, 왕실 궁수 부대, 총 대신 칼과 창을 든 전통 왕실 경호대, 기마 부대가 화려한 대규모 행렬을 이끌었다.

공개 조문을 위한 의례는 1936년 조지 5세 국장 때와 거의 흡사했다. 국교회식으로 진행된 장례식 중 마지막에 울려 퍼진 스코틀랜드 전통 악기 백파이프 연주는 엘리자베스 2세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렸다.  


찰스 3세 대관식의 1부이기도 했다. 여왕 사망 다음 날 왕위 계승을 공식화했고 하원을 시작으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스를 돌며 각 의회의 승인을 받았다. 스코틀랜드와 런던에서 왕실 가족을 이끌고 관 뒤에서 행진했고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관을 지켰다. 국장 마지막 날에는 세계 각국 정상들과 인사했다.

물 흐르는 듯한 왕위 계승 과정이었다. 많은 사람이 여왕 사망 후 역사적으로 확실하게 결판내지 못한 두 질서에 균열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나는 17세기 말 왕정과 의회 민주주의 간의 절충인 입헌 군주제이고 다른 하나는 2차 대전 이후 제국과 식민지의 타협인 영연방이다. 위기였지만 왕실은 여왕의 대중성과 왕실의 문화적 상징적 자산에 힘입어 왕실 존속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의회와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찰스 3세와 의회
 

찰스 3세 영국 국왕이 12일(현지시간)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전 내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상·하원 의원들의 조문을 받은 뒤 연설하고 있다. 연단 뒤에는 부인 커밀라 왕비가 앉아 있다. ⓒ 연합뉴스


엘리자베스 2세의 사망은 영국을 멈춰 세웠다. 8주간 진행되는 여름 음악 축제 BBC 프롬은 마지막 3일을 남겨놓은 상태였지만 슬픔과 배치되는 축제 속성상 취소되었다. 셀프리지와 존 루이스 등 화려한 소비를 상징하는 백화점은 휴업했다. 열정과 흥분으로 환호성이 오가는 프리미어 리그 축구 경기는 연기되었다.

사회 통합의 상징인 군주와 맞지 않는 갈등과 경쟁의 영역도 멈췄다. 영국 통신 노조와 철도 노조는 예고된 파업이 국장 기간과 겹쳐 취소했다. 장례식 날인 19일은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여왕의 죽음은 하원도 중지시켰다. 지난 8일 하원은 에너지 위기 문제로 논쟁 중이었다. 총리는 일반 가정의 난방 고지서 상한선으로 2500파운드(약 400만 원)를 정했다. 약 1500억 파운드(약 240조 원)가 소요되는 거대 정책이다.

구체적인 예산 확보 계획을 내놓지 못하면서 노동당 대표가 총리에게 예산 계획을 밝히라며 압박하고 있었다. 그 순간 여왕이 위독하다는 쪽지가 전해졌고 토론은 멈췄다. 다음 날 생활비 위기 같은 건 없다는 듯 화기애애하게 여왕과의 추억을 공유하며 애도를 표했다.

집단적 애도 분위기는 새 국왕 찰스 3세의 자양분으로 흡수되었다. 10일 국왕 선포식에서 전·현직 총리, 정당 주요 인사, 국교회 수장은 줄을 맞춰 서서 동시에 "신이여, 왕을 구하소서"를 외쳤다. 이후 찰스 3세가 '유일한 합법적이고 정당한 군주'임이 공식화되었다. 하원 의원들은 하원에서 차례대로 "법에 따라 찰스 3세와 그의 후계자에게 신의를 지키며 진실되게 충성하겠다"고 맹세했다.   

12일, 의회는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찰스 3세에게 공식 조의를 표했다. 웨스트민스터 홀은 1097년 왕의 연회를 위해 세워진 건물로 왕이 높은 테이블에서 신하들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중세 구조로 되어 있다. 천 명이 넘는 상·하원 의원을 아래에 두고 찰스 3세 부부는 8개의 계단을 올라 의자에 앉았다. 누가 뒤에서 잡고 들어줘야 하는 전통 가운을 입은 상·하원 의장은 양옆에 서서 각각 조의를 표했다.

하원 의장은 전략적인 발언을 했다. 1988년 여왕이 명예혁명 3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던 사실을 언급하며 왕정주의를 끝낸 의회 민주주의의 역사를 상기시켰다. 상징적인 존재로 머물러야 한다는 요구에 찰스 3세는 "의회는 영국 민주주의의 살아 숨 쉬는 기관"으로 "어머니가 세운 원칙을 따를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답했다.

이 대화는 상당히 의미심장했다. 영국 국왕이 상징적 존재가 된 건 19세기 후반 20세기 초의 일로, 명예혁명 이후 1870년대까지 왕은 실질적인 정치력을 행사해왔다. 찰스 3세는 로비로 문제가 되었던 전례가 있는 데가 미국의 존 케리 기후 특사는 기후 문제에 찰스 3세가 압력을 넣어 주기 바란다고 발언했다. 어머니의 길을 따르겠다고 했지만 찰스 3세의 정치 개입 여부는 여전히 살아 있는 불씨다. 

왕정을 상기시키는 건물, 상하 위계질서를 가진 공간, 그리고 총이 아닌 창을 든 왕실 경호대 등 전통적 권위에 의회는 압도되어 있었다. 이날 <가디언>은 사설에서 의회는 왕실의 축소 및 폐지를 논의할 수 있는 곳으로 "무릎을 굽히지 말라"고 요구했다.

왕실과 대중
 

찰스 3세(가운데) 영국 국왕과 왕실 가족들이 19일(현지시간)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향하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운구 행렬을 따르고 있다. ⓒ 연합뉴스


국왕으로서 의회와의 관계를 초반에 마무리 지은 찰스 3세는 상주로서 대중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왕의 관을 웨스트민스터 홀로 안치한 14일 군복을 입고 왕실 근위대와 총포차 위에 놓인 관을 따라 행진했다. 공개 조문 기간인 16일 15분간 관을 지켰다. 19일 장례식 때도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다시 버킹엄궁까지 군복을 입고 왕실 군대, 캐나다, 호주 등 영연방 군 대표단과 함께 걸었다.

여왕 국장 의례는 대영 제국의 힘이 최고조에 달했던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생겨났다. 우선 장례 행렬에서 선명하게 드러난 군대색은 1901년 빅토리아 여왕의 국장 때다. 1837년부터 1901년까지 64년간 영국을 다스린 빅토리아 여왕은 군인의 딸로 묻히고 싶어 했다. 군대 행렬로 바꾸고 관 역시 총포차로 옮겼다. 총포차를 말로 끌게 했으나 장례식날 말이 말을 듣지 않아 해군 병사가 끌게 했고 이후 국장의 관은 100여 명의 해군이 손수 끈다.

화려한 대규모 거리 행렬과 공개 조문은 19세기 말부터다. 17~18세기는 왕과 왕족의 죽음을 개인적인 일로 이해해 한밤에 절제된 의식으로 치렀다. 1898년 윌리엄 글래드스톤 총리 국장 때 처음으로 공개 조문을 했다. 3년 후 빅토리아 여왕 때는 공개 조문은 하지 않되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장례식을 성대히 치렀다. 1910년 에드워드 7세 국장 때는 공개 조문을 받는다. 이때 사용된 웨스트민스터 홀이 공개 조문 장소로 정착했다.

찰스 3세처럼 직접 관을 지킨 의례는 1936년 조지 5세 국장 때 시작된 것이다. 당시는 왕자만 관을 지켰지만 엘리자베스 2세 국장 때는 공주도 관 지키기에 참여했다. 군 관련 직위를 받은 이들은 군복을 착용해 화려함보다 절제된 엄격함과 국가에 대한 봉사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19세기식 국장 의례에 영국인들은 뜨겁게 반응했다. 공개 조문을 넉넉히 닷새로 잡았지만 조문 행렬이 점점 길어져 마지막 날은 8킬로미터를 기록했다. 하루 전날에는 24시간을 꼬박 기다려야 할 정도라 조문 못할 수도 있으니 더 이상 줄을 서지 말라고 공지했다. 마지막 장례 행렬을 보러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추모객들은 꽃을 던졌다.  

긴 조문 행렬 속에 공화정을 외치는 목소리는 왜소화되었다. "XX 왕실," "내 왕이 아니다," "누가 그를 선출했나?" 등을 외친 이들이 체포되고 비난받을 만큼 틈이 없었다. 찰스 3세를 향해 "우리는 에너지 고지서로 힘들어한다. 하지만 당신의 퍼레이드 비용을 내야 한다"고 항의하는 목소리는 왕과 악수하고자 내미는 손들에 묻혔다. 공화주의자가 많은 노동당이지만 당 대표는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침묵하라고 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추모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개인적 동기는 다르지만 국장은 시대적 의미를 갖는다. 화려한 국장 의례를 만들어냈던 19세기 말~20세기 초 국장은 대영 제국의 세력 과시였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캐너다인의 말을 빌리면 수십만이 조문했던 1965년 윈스턴 처칠의 국장은 힘을 잃어가는 영국을 위한 "진혼곡"이었다.

2022년 국장은 과거에 대한 향수일 수도 있고 브렉시트 연장선으로 안정적인 공동체를 바라는 마음일 수도 있다. "근대 사회는 여전히 신화와 의례를 필요로 한다"는 이안 길모어의 말대로 합리성과 효율성이 넘치는 생활에 대한 반작용일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찰스 3세에게 유리하다. 개인으로서는 인기가 없어도 제도로서의 왕은 갈등보다 통합을 추구하고 상업적 이익 추구와 거리를 두는 상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조만간 있을 대관식은 신화와 의례가 필요한 현대인들의 마음을 한 번 더 흔들 것이다. 그리고 인플레이션, 에너지 위기, 기후 변화 등 가혹한 현실 문제는 왕실 폐지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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