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27 11:11최종 업데이트 22.08.27 18:09
  • 본문듣기
[기사 수정 : 27일 오후 6시 9분]

서울 청파동에 있는 '식민지 역사박물관'에서 지난 8월 4일부터 6월항쟁 35주년 기념초대전 <이상호, 역사를 해부하다>가 열리고 있다. 전시실에는 이상호 화가가 40여 년 그려온 53점의 대표작이 걸려 있다. 그중에서 으뜸은 민족반역자 92인을 그린 <일제를 빛낸 사람들>(이하 일제)이다. 전시 첫날 만난 그는 한평생 민중화가로 살아온 연유와 80년대의 걸개그림을 연상케 하는 이 작품의 제작 과정을 들려주었다.
 

식민지 역사 박물관 전시실 앞에서 이상호 그의 전시에서 대표작품은 <일제를 빛내 사람들>이다. ⓒ 민병래

 
이상호는 2021년에 열린 제13회 광주비엔날레 출품작을 '일제'로 정했다. 분단과 군사독재로 겪은 고통이 나라를 빼앗긴 데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에서였다. 2020년 1월부터 꼬박 1년을 매달려 가로 4m17 세로 2m45의 작품을 완성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의 한쪽 벽면을 꽉 채울 수 있는 크기다. 그는 비엔날레 전시가 끝나면 이 작품을 박물관에 영구기증할 작정이었다. 비엔날레에 '일제'가 걸릴 때는 곡절이 많았다. 박정희기념재단에서 비엔날레 주최 측과 후원사에 공문을 보내 전시하지 말라고 압박했기 때문이다.

이상호는 인물을 선정하는 데만 두 달의 시간을 쏟았다. '친일인명사전'을 토대로,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와 여러 차례 회의 끝에 박정희, 백선엽, 최남선, 안익태, 김활란 등 92명을 선정했다.


실제 작업은 화폭을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다. 전지 크기의 전통 한지 120장을 합판 위에 대고 풀칠로 세 겹을 포개어 붙였다. 바탕에는 황토색 전통 안료를 입혔다. 그는 인물 하나하나를 어떻게 표현할까 많은 고민을 했다. 사진자료에 충실해 담담하게 그려낼 것인가? 민족의 원한을 주저없이 쏟아낼 것인가? 민중미술 특유의 힘찬 붓질을 택할 것인가? 격렬함은 누그러뜨리고 울림이 깊은 붓놀림을 택할 것인가?

국보법 1호가 된 민중화가 이상호

이상호는 1987년 8월, 광주 YWCA 해방대동제 행사용으로 걸개그림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아래 백두)를 친구 전정호와 함께 제작했다. 대동제가 끝나고 '백두'는 서울의 그림마당 '민'을 거쳐 제주 전시를 위해 바다를 건너갔다. 이때 경찰이 들이닥쳐 이상호의 그림을 빼앗아갔다. 그런 시절이었다.

박종철의 죽음에 항의하는 민족미술협의회 주최 <반고문> 전 때도 모든 작품이 압수되었다. 예술가의 저항의지와 창작의 열정이 군홧발에 짓밟히던 시절, 이상호는 광주 월산동의 작업실에서 체포되어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백두산 천지의 둘레에 북한의 국화인 진달래를 그려 북한을 찬양하고 이적표현물을 제작했다"고 조서가 꾸며졌다.

덕분에 그는 신학철이나 홍성담보다 앞서서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첫 번째 민중미술가가 되었다. 나중에 한승헌 변호사가 재판정에서 밝혔듯 북한의 국화는 목란인데 경찰과 검찰은 기본 사실도 확인하지 않고 난리를 피운 것이다. '백두'는 안타깝게도 서울경찰청 압수물품 창고에 있다가 불태워졌다.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 복원도 이상호는 87년 전정호, 후배 네명과 함께 이 작품을 그렸다. ⓒ 이상호 제공

 
이상호는 2005년, 일본 교토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광주민중항쟁 25주년 기념 <광주의 기억에서 동아시아의 평화로> 전에 출품하려고 '백두'를 복원했다. 한국의 민중미술을 공부하던 일본인 연구자 이나바마이는 "작품을 펼쳤을 때 강렬했다. 활활 타오르는 저항의 열정을 느꼈다"고 말했다. 가로 6.5m 세로 2.5m의 크기가 주는 무게감도 있었을 게다.

하지만 이상호 자신이 보기에는 밍밍했다. 그는 '백두'를 6월 항쟁의 기운으로 그렸다. 금남로를 오가는 뜀박질이 충장로를 뒤덮는 함성이 붓끝에 담겼다. 붓질은 드세고 구성은 투박해도 스물일곱, 여덟의 열정은 이를 덮고도 남았다. 친구 전정호와 후배 넷이 스무날을 밤새워 그렸으니 청자 담배 푸른 연기와 시큼한 탁배기 냄새가 올올히 박혔다. 그 펄떡거림이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복원, 성에 차지 않았다. 어쨌든 '백두'는 이상호를 민중화가의 한 길을 걸어가게 만들었다.

중심인물 열아홉명을 그리고

이상호는 '일제' 제작에 들어간 지 5개월 되었을 무렵, 92명 중 특히 죄과가 큰 열아홉 명을 완성했다. 시대순을 따른 탓도 있지만 중앙에 민족개조론을 주장한 이광수, 조선학생에게 학도병으로 지원하라고 외친 서정주, 조선일보의 방응모와 동아일보의 김성수를 세웠다.

프랑스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부역자 처리과정에서 지식인과 언론인을 무겁게 처벌했다. 이들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나치 하에서 15일 이상 발간된 신문에 대해서도 제재를 가했다. 식민지 상황에서 신문이 발간된 자체가 부역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상호는 그런 단죄의 역사를 부러워하며 하나씩 그려나갔다.

작업기간 그는 두암동 집에서 궁동의 작업실까지 매일 40분을 걸어갔다. 그곳에서 하루 7시간씩 정진했다. 1997년 선덕사의 후불탱화를 그릴 때 아침마다 경내 청소를 하고 예불을 올렸다. 목탁소리와 독경소리가 물감에 스며들고, 향내와 촛불의 일렁임도 붓끝 사이에 담겼다. 탱화는 그렇게 한땀 한땀 완성되었다.

'예불'을 올리진 않았지만 이상호는 '일제'를 작업할 때 아침에 명상을 하며 마음의 준비운동을 했다. 붓을 든 것은 점심을 먹고부터. 화폭이 크니 그 위에 무릎 꿇고 엎드렸다. 탱화와 전통초상화의 기법을 따라 맑게 한 번 칠하고 다시 덧칠하고 또 색을 올리는 방법이었다. 만봉 스님은 여덟 번을 해야 한다고 했다. 시왕초 그림 3천 장을 베끼고 눈감고서 이를 다시 3천 장을 그려야 세필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야 얼굴의 윤곽선은 물론 눈과 입을 정밀하고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했다.

2000년에 스님의 문하에 들었으나 아쉽게도 가르침을 받은 시간은 짧았다. 어쨌거나 그런 배움을 되새기며 50분을 집중하고 10분을 쉬며 하루 일곱 차례 무릎을 꿇었다. 작업할 때는 몸무게가 왼쪽 팔에 쏠려 쥐가 나고 뻐근했다. 안경이 밑으로 떨어지기 일쑤였다. 이들이 저지른 나쁜 짓과 이름 석 자를 적어야 할 때는 불도장을 찍듯 꾹꾹 눌렀다. 그런데 가끔 정신이 혼미할 때가 찾아오곤 했다. 
 

가로 4m17 세로 2m45의 화폭위에서 작업하는 이상호 1년 걸려 완성했다. ⓒ 이상호제공

  

가로 4m17 세로 2m45의 대작이다. 하나 하나 스케치해서 옮겨 새겼다. ⓒ 이상호제공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을 드나들고

이상호는 30년 넘게 정신병원을 들락날락했다. 처음 발병이 된 건 대학 3학년 때. 1960년 목포에서 태어난 그는 동국대 불교미술학과에 들어갔다가 휴학을 하고 1982년 조선대 미대에 들어갔다. 목포 홍익화실에서 만났던 홍성담 선배의 손에 이끌려 민족미술에 발을 들여놓았다. 친구, 후배와 '땅끝'이라는 조선대 미술패를 만들어 걸개, 만장, 포스터, 벽보를 하룻밤에 뚝딱 만들었다.

거친 붓질에 구성은 엉성해도 투쟁의 열기를 드높이는 데 모자라지 않았다. 그러던 1986년 5월의 어느 날 그는 거리 시위에서 붙잡혀 광주 동부경찰서로 끌려갔다. 두 시간 넘게 두드려 맞고 차가운 유치장 바닥에서 선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이상호는 자신도 모르게 유치장 문을 흔들고 악을 썼다. 그건 요구도 아니고 구호도 아니었다. 뜻 모를 울부짖음이었다.

상태가 더 나빠진 건, 1987년 '백두' 그림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하고 서대문구치소에 갔을 때였다. 옆방의 우상호가 건넨 <한국현대사>를 읽고 잠든 밤, 군복 입은 박정희가 꿈에 나타나 "네가 진정으로 조국을 사랑한다면 그 증거로 배식구에 손목을 내어놓아라, 손목을 자르겠다"고 고함을 질렀다. 이상호는 꿈에 홀려 팔을 내밀고 소리쳤다. "왜 안 자르는 거야, 왜 안 자르는거야..." 그의 비명은 서대문구치소의 밤을 흔들었다. 

남영동은 무서웠다. 수사관은 이상호에게 팬티만 입힌 채 여기가 박종철이 죽은 곳이다, 라고 겁을 주며 매질을 했다. 잠을 안 재웠다. 남영동에서 열흘간 당한 고통, 공포가 서대문구치소에서 발작으로 나타난 것이다. 병사를 들락거렸다. 꾀병이라고 독방에 갇혀 매질도 당했다. 급기야 병보석으로 나온 그가 향한 곳은 서울시립정신병원, 첫 입원이었다. 서울시립정신병원을 나와서 간 곳은 나주정신병원.

이때부터 그는 입원해있던 기간만 5~6년, 들락날락한 세월은 30여 년, 긴 투병 생활을 했다. 길을 걷다 애먼 시비에 휘말리고 경찰이 눈에 띄면 멱살을 잡았다. 어느 날은 집안의 물건을 내동댕이치고 그렇게 발작은 불현듯 찾아와 이상호의 몸을 휘감았다.

그러면 어머니의 쭈글쭈글한 손에 이끌려 병원으로 향했다. 나주로 가는 길은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만봉스님에게 탱화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도 이런 증세 때문이었다. 병원에서 만난 이는 다양했다. 소값 파동으로 불을 지르고 강제로 입원된 농민, 5.18부상자, 히로뽕에 절은 깡패,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친 이.

병원에는 치료프로그램이 없었다. 발작 상태가 되면 침대에 묶였다. 마치 서울구치소의 독방에서처럼 매질을 당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약을 먹으면 하루종일 졸렸다. 손발에 힘이 없고 노곤했다. 이상호는 이때도 붓을 놓지 않았다. '나주병원의 환우들' 연작이 그것이다.
 

2007년 11월 나주정신병원에서 이상호 자신이 그린 자화상 이때 감기를 앓고 있었다. ⓒ 이상호제공

 
이상호의 상태가 좋아진 건 2019년 광주트라우마센터에서 상담치료를 받으면서부터다. 전남대 해직교수였던 명노근 교수의 딸 명지원 센터장이 이상호의 가슴시린 이야기에 귀를 내주었다. 어혈이 풀리고 메마른 마음에 한줄기 시냇물이 놓였다. 덕분에 이상호는 마음이 굳게 서고 작품 활동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궁동에 작업실을 낸 것도 이때였다. '일제' 작품도 이런 도움 덕에 결심했다. 서울의 민족문제연구소는 선뜻 재료비를 지원했고 김순흥 광주지부장은 주변 식당에 밥값을 선결제하고 배 곯지 말라, 당부했다. 후배 하나는 어디선가 열 평짜리 에어컨을 가져왔다. 그런 격려 속에 이상호의 붓질은 앞으로 나아갔다.

1년이 걸려 완성된 작품

이상호가 작품을 마무리 지은 것은 2020년 말. 92명의 마지막 인물은 박춘금이었다. 그는 열여섯에 일본으로 건너가 토목공사현장이나 탄광에서 일했다. 그 후 폭력배로 변신, 나고야조선인회 회장이 되어 재일조선인의 항일운동을 탄압했다. 국내에도 하의도 지주 도쿠다의 요청으로 깡패를 보내 1928년 2월 하의농민회를 습격했다(그는 나중에 일본의 국회의원까지 되었다).

이상호는 인물의 초상을 그릴 때 자료에 충실했다. 사진을 토대로 인물의 스케치를 하고 이를 화폭에 옮겼다. 붓끝의 격렬함은 누그러뜨렸으나 눈을 그릴 때만큼은 조선 민중의 원한을 담았다. 비행장 건설에 끌려가고 태평양 어느 섬에서 총알받이가 되었으며 어린 소녀의 몸으로 일본군 성노예가 된 원한을 새겨넣었다. 그래서 92명의 눈매는 매섭고 간교하다. 그렇다고 가볍게 증오를 뱉어낸 건 아니다. 붓끝은 부드러우나 꾸짖음은 천둥 같고 색감은 은은하나 담고 있는 내용은 간곡하게. 울림이 깊은 표현을 택했다.

무려 1년이 걸렸으니 이 대작을 끝냈을 때 작가의 마음은 어땠을까? 이상호는 "가장 큰 보상은 작품이 완성된 것 자체"라고 덤덤히 말한다. 그는 이 작품을 마치고 표정두의 묘소를 찾았다. 야학을 같이했던 동지이며 1987년 미대사관 근처에서 분신했던 후배다. 그의 묘소에 가서 "내 이번에 작품 또 하나 했네"라고 고했다. 마치 탱화를 마쳤을 때 올리는 봉안식처럼. 
 

가로 4m17 세로 2m45의 <일제를 빛낸 사람들> 1년에 걸쳐 완성한 대작이다. ⓒ 이상호 제공

 
"넌 아직도 광주에 매여 있니?"

사람들은 묻는다. 너는 아직도 광주에 매여 있냐고, 세상은 바뀌었는데 여전히 민중미술에 머물러 있냐고, 민중미술 풍이라는 형식에 사로잡혀 있냐고. 이상호는 말한다. 자신은 광주를 안고 산다고. 광주의 의식을 간직하고 산다고.

그래서 2022년 5월에 또 하나의 작업을 한 게 <도청을 지킨 새벽의 전사들>이다. 계엄군이 도청을 밀고 들어올 때 윤상원 열사를 비롯 끝까지 항거한 열여섯 명이 주인공이다. 열아홉살의 페인트공 홍순권, 열여섯살의 광주상고 1학년 안종필, 똑같이 스물살인 재수생 권호영과 전남대생 이정연...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총을 버리지 않았다.

최후의 순간은 다가오고 계엄군이 들어오기 전 도청을 빠져나갈 시간은 있었다. 열아홉, 스무살 청년이고 마지막까지 도청에 있었으니 도망갔다고 손가락질 할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사선을 지켰고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들이 있어 광주항쟁이 완성되었기에 이상호는 정성을 기울여 그렸다. 이 그림은 아직 색을 안 입혔다. 검은 선만 있을 뿐. 그래서인가 윤상원을 제외하면 10대 말에서 20대 초인 이들의 순결한 영혼이 사무치게 다가온다. 
 

작품 '도청을 지킨 새벽의 전사들' 이상호는 이 그림에 아직 색을 안 입혔다. ⓒ 이상호제공

 
이상호에겐 해방 광주, 오월공동체가 어머니 품이며 길잡이 별이었다. 이상호는 남북이 하나 되고 불평등이 사라지는 대동세상, 녹두장군이 꿈꿨고 독립군이 만들려던 나라, 광주의 시민군이 세우려던 나라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미군이 전시작전권을 틀어쥐고 사드를 배치하고 한미일 군사동맹을 요구하는 현실을 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상호는 광주를 안고 이를 민중미술로 표현하는 일은 이제야 비로소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가 일년에 걸쳐 '일제'에 매달렸던 이유도 친일청산을 하지 못해 분단과 군사독재의 상처가 이어지고 있으니 그 원인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앞으로 펼쳐갈 작품 세계 

이상호 그는 전시가 끝나는 10월 2일까지 청파동 '식민지역사박물관'에 머무른다. 매일매일 관람객에게 작품 해설을 할 작정이다. 전시가 끝나면 그는 다시 궁동의 작업실로 향할 것이다. 그는 광주정신을 부여안고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해나갈까?

1990년대 이후 민족미술운동은 많은 방황을 했다. 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지면서 푯대를 잃었다. 그림마당 '민'이 없어져 민중미술의 전시 거점은 사라졌다. 

많은 모색이 있었다. 어떤 이는 잠시 붓을 내려놓았다. 민중의 삶속으로 더 깊어 들어가야 한다며 민예총의 전남지회장이었던 박석규는 '남도땅, 갯벌에 살다'와 같은 연작을 그렸다. 신학철은 작품 '한국근대사와 한국현대사'를 통해 민중미술에 콜라주와 포토몽타주기법을 접목시키며 활로를 모색했다.

그런가 하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민중미술 15년> 전을 계기로 걸개그림이 갤러리를 향하기도 했다. 그렇게 20여 년이 흐른 지금 민족미술진영은 80년대의 힘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민중미술이 스러진 느낌이다.

이상호는 이런 시대에 조선시대 탱화의 한 갈래에 주목한다. 탱화이되 불경만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백성의 고통이 함께 담겨 있는 불화다. 그는 신덕사의 후불탱화를 그릴 때 이를 시도했었다. 백두산 아래 불보살을 기품있게 그려내면서 화면 밑에는 씨 뿌리고 추수하는 농민을 담았다. 전통의 세계에서 그가 길어 올리려는 새로운 문법이다. 신선의 세계를 멀리하고 강시황과 겸재가 일군 저 진경산수화의 정신, 임금과 정승의 초상화를 멀리하고 백성의 애환을 그려낸 신윤복과 김홍도의 마음과도 이어지는 길일 게다.
  

선덕사 후불탱화 1997년에 그린 이 작품 밑에는 씨뿌리고 추수하는 농민이 보인다. ⓒ 이상호제공

 
전통을 이어받아 민중미술을 거듭나게 하려는 노력은 이미 '일제'에서 시도되었다. '일제'는 민중미술의 기백은 살리면서 깊이 있는 발색과 우아한 구성, 섬세하고 정밀한 묘사를 갖췄다. 그러면서 대하소설같은 이야기가 흘러나오니 민족의 전통에 민중의 염원을 담고 새로운 문법을 찾는다는 그의 미학이 이제 모양을 갖춘 듯하다.

이상호는 올해 4월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셨다. 어머니에게 용돈 한 번 못 드리고 옷 한 벌 제대로 못 해 드렸으니 죄스러운 마음이다. 어머니는 요양원에 들어가시면서도 이상호를 걱정하며 눈매를 적셨다. 왜 아니겠는가? 도대체 이상호는 민중화가로서 어떻게 40년을 살아왔을까? 궁동의 작업실 월세는 어떻게 낼까? 이번 작업은 그렇다치더도 재료비는 앞으로 어찌 조달할는지.

그는 화가 외에는 한 번도 다른 직업을 갖지 않았다. 가끔 판화가 팔리고 광주시립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소장하려 구매한 적도 있지만 어쩌다 일뿐. 그는 "그냥 어떻게 굴러가지대요"라고 슴슴하게 말한다. 이번 전시에 올라오기 전 이상호는 어머니를 면회했다. 당신은 또 당부를 하셨다.

"싸우는 그림 그리더라도 인정있게 그려라 잉." 

어머니는 이상호 미학이 가는 길을 오래전에 점지한 게다.
 

식민지 역사박물관에서 이상호 그의 작품에선 대하소설 같은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 민병래

 
<못다 한 이야기>

① 이상호는 제13회 광주비엔날레 초대작가로서 <일제를 빛낸 사람들>을 2020년 말에 완성해 2021년에 출품했다. 그는 1995년 <역사의 심판에 시효는 없다>라는 작품을 120cm*170cm크기로 만든 바 있는데 그때 채 펼치지 못한 작품 구상을 25년 만에 완성한 의미도 있다.

②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는 이상호가 친구 전정호와 함께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은 후배 네 명이 더 있는데 당시 경찰이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수사를 하자 홍성담 화가와 의논, 피해를 줄이기 위해 이상호, 전정호 두 사람만 제작했다고 진술했다. 나머지 네 명은 이진우, 박미용, 이송원, 이규현이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10만인클럽후원하기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