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05 11:59최종 업데이트 22.08.05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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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오후 광주시의회 시민소통실에서 강제동원 피해자인 정신영 할머니가 후생연금 탈퇴수당으로 99엔을 지급한 일본 측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일본연금기구는 지난달 정 할머니에게 77년 전 화폐가치를 그대로 적용한 99엔을 지급했다. ⓒ 연합뉴스

 
일본의 도발이 끝이 없다. 이번에는 100엔숍을 연상시키는 도발을 감행했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 강제징용(강제동원) 피해자인 정신영 할머니에게 후생연금이라며 99엔을 송금해왔다. 한일관계 복원을 외치는 일본 정부가 한국 돈 931원을 보내 정신영 할머니뿐 아니라 한국 국민을 자극하고 있다.

감언 혹은 강압으로 끌고 가 강제노역을 시킬 당시, 일본은 한국인 노동자들의 봉급을 우편저금 형식으로 강제 저축시키는 동시에 후생연금에도 강제로 가입시켰다. 일종의 국민연금을 자동 불입하게 해놓은 것이다. 봉급을 지급한 것처럼 회계상 처리해놓고 실질적으로는 이런 방식으로 빼돌렸다.


한국인 피해자들이 사과 표명과 함께 임금·연금 지급을 해달라며 일본 정부나 법원의 문을 두들긴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이미 오래전에 돌려줬어야 하고, 돌려줄 수 있었던 돈을 여태까지 움켜쥐고 있다.

그러면서 피해자의 요구를 계속 거부하기 힘든 경우에는 이번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1945년 당시의 화폐 가치로 돈을 보내주는 것이다. 2009년에는 또 다른 피해자들에게 후생연금 탈퇴수당 명목으로 99엔을 지급했고, 2015년에는 199엔을 지급했다. 그러더니 지난 7월 6일에는 정신영 할머니에게 99엔을 보내왔다.

1930년생인 정신영 할머니는 1944년에 전범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로 끌려가 노예노동을 했다. 18개월간 억류돼 있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이 일로 인해 한을 간직한 그는 후생노동성 산하 일본연금기구를 두드렸다. 그 결과가 한국 돈 931원 입금이다.

일본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박진 외교부 장관과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이 4일 캄보디아 프놈펜 소카호텔에서 열린 한·일 외교장관 양자회담에서 기념촬영을 마친 뒤 착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일본연금기구는 '송금 수수료를 빼고 보낼 수도 있다', '일본에 와서 받아 가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일본 국가권력이 과연 이성을 갖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채권채무를 청산할 때 인플레이션을 감안하지 않는 일은 흔하다. 하지만 이 사안에 그런 논리를 적용할 수 없다는 점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한국인들이 80년 가까이 가만히 있다가 뒤늦게 청구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피해자들이 해방 직후부터 요구했지만,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의 완강한 태도에 번번이 막히곤 했다. 일본 측이 의도적으로 지급을 회피해왔으니 이제 와서 1945년 가치로 계산하는 것은 정당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정당성 상실이 유독 한국과의 관계에서 두드러진다. 한국인 피해자들을 무시하는 미쓰비시도 2015년에 미국인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2016년에 중국인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금전을 지급했다. 비슷한 일이 일본 정부의 우편저금 처리와 관련해서도 있었다. 대상은 타이완(대만) 피해자들이었다.

1993년 8월 4일, 일본 정부에서 고노담화가 발표됐다. 미야자와 내각은 이 담화를 통해 위안부 피해를 배상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만큼은 시인했다. 하지만 강제징용 문제에서는 이 정도의 진전도 보이지 않았다. 미야자와 내각 역시 '이미 다 해결됐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바로 그 미야자와 내각이 타이완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는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미야자와 총리는 현재의 화폐가치로 환산하지 않고 우편저금액을 지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입장을 취했다. 1993년 6월 9일 자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가 있다.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수상은 구(舊)일본군으로 징용됐던 대만인들의 군사우편저금에 대해 청구인들이 요구하고 있는 인플레까지는 감안할 수 없지만 일정한 웃돈을 얹어 당시의 액면 금액보다는 많은 수준으로 반환할 것을 검토하겠다고 7일 밝혔다. 이에 따라 일(日) 정부는 올해 안에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물가상승분을 감안해주지는 못하더라도 일정한 웃돈을 얹어줄 필요성이 있다고 일본 총리가 공식 인정했다. 1945년 당시의 금액 그대로 지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공개적으로 시인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는 타이완 피해자들에게 국한된 이야기였다. 위 기사는 "일 정부의 이 같은 방침은 한국의 경우 어떻게 적용될지 주목된다"고 말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이 한국을 대할 때와 타이완·중국·미국·일본을 대할 때 얼마나 다른지 절감하게 된다.

현재의 일본이 볼 때, 한국은 두 번째로 중요한 나라다. 지금 일본의 안보는 한·미·일 삼각체제에 의존하고 있다. 미국 다음으로 중요한 나라이기 때문에, 일본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한국에 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잘하기는커녕 도리어 차별하고 있다.

일본이 가장 중요시한 조선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일본이 가장 중요시한 나라는 조선이었다. 중국이 아니었다. 일본과 대륙의 교류는 직접적인 해상 교류보다는 한반도를 통한 간접 교류에 더 많이 의존했다. 해상을 통해 중국과 직접 교류하는 일도 있었지만, 그런 때는 태풍 피해나 조난 사고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 예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수직적인 사대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교린관계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 관계는 대개 대마도를 매개로 이뤄졌다. 대마도는 조·일 양국과 사대관계를 유지했다. 조선을 상대할 때는 조선이 책봉한 대마도주 지위를 사용하고, 일본을 상대할 때는 일본 측이 책봉한 대마번주 지위를 사용했다. 이렇게 양쪽에 속했다 해서 역사학에서는 대마도의 지위를 양속(兩屬)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이런 대마도의 개입으로 인해 조·일 관계는 사대관계처럼 운용됐다. 조선에 사대하는 대마도가 일본을 대리해 조선을 상대했기 때문에, 외형상 일본이 사대하는 것처럼 양국 관계가 운용됐다.

일본 사신이 조선에 직접 오는 경우보다는 대마도 관리가 일본 사신을 대리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일본 입장에서는, 해상 교류의 위험성도 생각해야 했지만 중개자인 대마도의 현실적인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마도는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라도 일본 대리인의 역할을 계속 유지해야 했다.

그래서 일본 사신이 조선에 직접 올 때는 교린관계처럼 보였지만, 대마도의 중개를 빌릴 때는 사대관계처럼 보이곤 했다. 일본 정부가 직접 머리를 숙이지 않고 대마도를 앞세워 숙이기는 했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굴욕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일본이 얼마나 극진하게 예를 표했는가는 조선 사신인 통신사가 방문할 때마다 일본이 거액을 들여 빙례를 해준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빙례라는 이름의 선물 증정 의식 때문에 연간 쌀 수확량의 10% 이상을 소모할 때도 있었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고 있는가
 

4일 오후 광주시의회 시민소통실에서 일본이 강제동원 피해자인 정신영 할머니에게 후생연금 탈퇴수당으로 99엔을 지급한 것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사진은 일본이 한화로 환산한 931원을 입금한 정 할머니의 통장. ⓒ 연합뉴스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이 있었던 1905년부터 일본은 한국을 하대했다. 1945년부터는 하대하고 싶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것이 지난 100년간 한국에 대한 일본의 태도였다.

하지만 그 100년보다 훨씬 오랜 기간 동안 일본은 하대를 느꼈다. 그런 역사로 인해 축적된 반한감정이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안하무인 격 태도를 설명하는 자료 중 하나가 될 가능성도 탐구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는 일차적으로 인권 문제다. 민족 대 민족, 국가 대 국가의 문제이기에 앞서 인간 대 인간의 문제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이 사안에서 가장 중요하다.

배상도 중요하지만 사과가 더 중요하다며 80년 가까이 절규하는 피해자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네기는커녕 99엔을 보내주고 있다. 일본이란 나라가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99엔 송금에 대한 수수료까지 들먹이는 것은 강제징용 문제가 한국과의 국제 문제가 아니라 일본의 국격 문제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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