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17 11:23최종 업데이트 22.07.17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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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기자말]

한국 헌법은 1987년부터 오늘까지 무려 35년 동안 한 획도 변경되지 않았다. 세계적으로 한국 헌법만큼 오래 동안 개혁되지 않은 나라가 거의 없다시피해서 희귀현상으로 통한다. ⓒ 셔터스톡

 
제헌절에 개헌설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제헌절마다 대표적으로 논의되는 주제는 크게 3가지다.

아마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은 헌법 자체와 별개로 제헌절이 도대체 왜 공식 공휴일이 아닌지에 대한 갑론을박이다. 기사들은 "2007년에 주5일 근무제 도입 때문에 제헌절이 공휴일에서 제외됐다"라는 설명과 함께 앞으로 언젠가 다시 공휴일이 되기를 바라는 갈망을 매해 되풀이한다.


두 번째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헌법정신을 지키자는 호소 혹은 어느 정당이나 대통령이 얼마나 헌법정신에 어긋나게 행동했는지 하는 지적이다. 즉 정치논쟁의 수단으로 헌법을 직간접적으로 활용하는 비판과 비난이다.

세 번째로는 개헌의 당위성과 불필요성에 대한 논쟁이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말은 많고 반복되지만 제헌절은 공식 휴일로 지정되지 않았고, 헌법정신을 어기는 정치인들은 허다하며, 헌법의 개혁도 이뤄지지 않는다.

한국 헌법은 제정 이후 39년 동안 8번이나 개정됐다가 1987년부터 오늘까지 무려 35년 동안 한 획도 변경되지 않았다. 세계적으로 일본, 덴마크, 필리핀 등 몇 개 국가 외에는 한국 헌법만큼 오랫동안 개혁되지 않은 나라가 거의 없다시피 해서 희귀현상으로 통한다.

35년 동안 개헌 없는 희귀현상

독일도 제헌절이 있다. 1949년 5월 23일에 기본법(Grundgesetz)이 제정된 것을 매해 기념하는 기본법의 날이 그것이다. 재미난 것은 이맘때 독일 언론에서도 가장 많이 논의되는 것 역시 기본법의 날이 왜 공휴일이 아닌지다. 차이점은 독일에서는 제헌절이 처음부터 빨간 날이 아니었다는 사실일 뿐이다.

논의의 취지는 비슷하다. 시민들이 하루를 쉬면서 사회구성원 모두가 헌법의 뜻을 심사숙고하고 경의를 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굳이 그럴 필요 없고 기본법을 잘 지키기만 하면 된다는 의견이 피력되곤 한다.

또한, 독일에서도 역시 기자나 정치인들은 이 기념일 전후에 기본법 내용의 역사적 의미나 현재와 미래의 중요성을 곱씹으며 그 가치와 규범을 실천해야 한다는 맹세를 하거나 정치가와 시민들에게 그것을 주문한다.
  

박병석 국회의장이 17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제72주년 제헌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2020.7.17 ⓒ 연합뉴스

 
하지만 개헌에 대한 논의만큼은 한국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독일 기본법이 제정된 지는 올해로 73년이 됐는데, 그동안 무려 68번이나 수정됐다. 거의 1년에 한 번꼴로 바꾼 셈이다. 물론 일부를 제외하고는 개헌의 내용 대부분은 국체나 정체와 같은 근본적 내용이 아니고, 주로 추상적인 기존 조항을 구체화하는 작업이었다.

이러한 잦은 개헌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고, 이런 비판은 특히 기본법의 날에 표출된다. "하위 법률로 할 수 있는 것을 왜 굳이 기본법에 집어넣느냐" 혹은 "그렇게 첨가하는 대부분은 어차피 헌법소원으로 보장을 받을 수 없다", "원래 기본법의 간단명료함의 미학을 괜히 훼손한다" 등의 주장이 기본법의 날에 언론 기고문이나 연설에 거듭 등장한다.

물론 독일의 연성헌법과 한국의 경성헌법을 직접 비교하는 것이 무리일 수도 있다(연성헌법은 개헌이 쉽고, 경성헌법은 개헌이 어렵다). 두 헌법은 독재 후 냉전·분단국가에서 제정됐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독일은 나치 전 바이마르공화국 때 이미 민주주의를 경험했고, 전후 탈나치화가 어느 정도로 이뤄졌다. 반면 한국은 외세 독재(일제)를 겪은 후 친일세력을 청산하지 못했고, 북한과 냉전 속 열전(熱戰)을 치렀으며, 군부독재 후 친독재세력을 청산하지 못해 정치적 양극화라는 극단적 저주를 안게 됐다.

양당 카르텔로 탄생한 제왕적 대통령제

한국이 35년 동안 헌법에 손 한 번도 댈 수 없었던 것은 어떻게 보면 그리 놀랍지 않을 수도 있다. 독일은 변경하기가 더 까다로운 국체나 정체를 개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기본법의 다른 내용을 수시로 바꿀 수 있었지만 한국은 개헌논의에서 거의 예외 없이 권력구조가 핵심이 됐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1987년 당시 거대 양당의 카르텔이 진행한 또 다른 차원의 협치로 창조해놓은 87 체제를 해체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것을 방증한다. 현행 헌법은 당시 여야 의원 각각 4명으로 구성된 이른바 8인 정치회담을 통해 탄생했다.

이렇게 정당 카르텔의 산물로 탄생한 현행 헌법의 지나친 대통령 중심제의 기이한 권력구조는 지속적으로 현실 정치와 민주주의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이와 같은 사실은 지금이라도 헌법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명분이 될 수도 있다. 권력구조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의 문제는 물론 간단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기존 제왕적 대통령제로는 더 이상 안 된다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12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로 출근하며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마친 뒤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현 대통령 단임제의 가장 큰 문제는 널리 알려져 있듯이 정부 정책 집행 과정의 연속성과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또한 5년마다 치르는 대선은 여야 간에 대통령직을 놓고 벌이는 제로섬의 탈환 전투가 된다. 이런 반복적인 현상은 시간과 에너지 낭비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레임덕 현상으로 대통령의 임기를 실질적으로 더 단축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현재 국무총리는 실질적인 거부권자의 입장에 서기 어렵다. 대통령이 임명하며 대통령의 명을 받는 대통령의 보좌관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이 총리에게 분산되지 않고 오히려 대통령으로 더 집중된다.

현 선거제도는 비례대표제를 극히 일부 포함하지만 시민의 다양한 의사를 충분히 반영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 결과 입법부 권력이 거대 양당의 정당 카르텔로 집중되며 양극화를 유지시키고 부추긴다. 현 지방자치 분권화는 수준이 미미하고 지방권을 대표하는 기관이 없다. 따라서 권력이 서울과 중앙정부로 지나치게 집중된다.

튼튼한 돛대에 몸을 묶듯이

어떤 이는 단지 헌법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해석해서 실천하기만 하면 제왕적 대통령이 자연스럽게 정상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위험한 착각이다. 관건은 헌법에 대한 다른 해석이 아니라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 신화에서 오디세우스가 유혹에 맞서 튼튼한 돛대에 자기 몸을 꽁꽁 묶었듯이 한국 대통령도 민주주의에 해로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정상(正常)화 된 헌법이라는 제도 장치에 묶어야 한다. 즉, 개헌을 통해 이원정부제나 의원내각제로 개혁해야 한다.

대통령 단임제를 폐지하고, 책임총리제를 도입해 국회에서 총리를 선출해야 한다. 국회의원과 지방의회 의원 중 상당한 몫을 비례대표로 선출하는 것을 명문화하고, 중앙정부를 실질적으로 견제할 수 있도록 지방권을 강화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의 최소한의 제도적 전제조건이 헌법 수준에서 마련된다.

물론 선거법, 정당법, 국회법 등 각종 정치관계법을 헌법에 상응하도록 개정할 필요가 있다. 또한 헌법정신을 지키는 정치문화로 진화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제도개혁이 제 효과를 발휘하기가 어렵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아무튼 작시성반(作始成半), 즉 시작이 반이라는 격언에 따라 올해 제헌절을 계기로 독일의 정부 제도와 연성헌법에 영감을 얻어 한국 헌법 개정논의를 본격화시키면 어떨까. 헌법적 혁신에 성공하면 드디어 제헌절이 다시 공식 공휴일로 지정될지도 모른다.

* 이 글은 모두 필자가 한글로 작성했으며 편집자가 약간의 교정·교열만 했음을 밝힙니다.
 

하네스 모슬러 / 뒤스부르크-에센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 하네스 모슬러

 
필자소개: 이 글을 쓴 하네스 모슬러는 독일 뒤스부르크-에센대학교 (University of Duisburg-Essen) 정치학과와 동아시아연구소(IN-EAST) 교수이며, <소셜 코리아> 운영위원입니다. 관심 분야는 한국정치와 사회이고 최근의 연구주제는 선거제도, 개헌, 기억의 정치, 시민교육, 포퓰리즘 등입니다. 최근 저서로는 <Politics of Memory in Korea>(편저), <South Korea's Democracy Challenge>(편저), <The Quality of Democracy in Korea>(공편저)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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