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04 17:46최종 업데이트 22.07.04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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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정치적 올바름(PC)이 작품을 망친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이제 너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생길 지경이다. 개인적으로 매주 챙겨보는 칼럼인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에서 최근 공개된 디즈니의 드라마 <미즈 마블>을 둘러싼 소란을 다루었는데, 무슬림 여성 배우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것을 놓고 남초 커뮤니티에서 똑같은 불만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이 반응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칼럼에 공감을 하면서도 결국에는 남초 커뮤니티에 대해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 것인가. 이들은 주류 미디어에 무슬림, 비백인, 성소수자가 등장만 했다하면 조건 반사에 가까운 수준으로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을 외친다. 솔직히 이게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인지도 잘 모르겠다. 세상에 '백인 남자'만 존재하는 게 아닌데 드라마와 영화에 그들만 등장하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오랜 시간 이런 반응을 마주하며 비판과 설득, 일상생활을 위한 전략적 인내와 무시까지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보았다. 그런데 이제는 억하심정이 들 정도다. 가령 나는 주류 드라마나 영화에 동성애자 남성이 등장해서 주어진 역할도 하고 연애도 하는 게 무척 좋다. 물론 인간이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희로애락이 존재하기에 캐릭터가 이성애자든 백인이든 그들에게 이입을 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다.

하지만 더 나와 닮았고 비슷한 일상을 사는 인물이 작품에 재현될 때 전달되는 감정은 더욱 강렬할 수밖에 없다. '아니 성소수자가 아닌 사람들은 지금까지 이렇게 좋은 걸 자기들만 누렸다고?'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 늦게나마 소수자들도 같은 걸 좀 가져보겠다고 하는데 그게 그렇게 아니꼬울까.

그들과 비슷한 인간군상이 등장하는 작품들은 이미 지천으로 널렸지 않은가.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가 주인공인 작품을 보고 도저히 이입이 안 된다면 나에게 물어보라. 할 수 있는 비법을 알려주겠다. 나 같은 사람들은 그걸 평생 해서 아주 잘 안다.

다양성이 콘텐츠를 망친다? 이 작품을 보라
 

넷플릭스 시리즈 <엄브렐러 아카데미 시즌3>의 한 장면. 주인공인 바냐 역할을 맡은 배우 엘리엇 페이지(왼쪽)는 자신이 트랜스젠더 남성임을 밝히고 본인의 성별 정체성에 따른 삶을 살기 시작했다. ⓒ 넷플릭스

 
주류 콘텐츠 속 소수자들의 존재를 못 견뎌 하는 이들의 주장은 인간적으로도 매우 쪼잔하기 짝이 없지만 사실과 다르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다. 그들의 말처럼 캐릭터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게 콘텐츠의 재미를 전혀 망치지 않기 때문이다.

시의적절하게도 이를 증명하는 작품이 얼마 전 공개되었다. 바로 넷플릭스의 드라마 <엄브렐러 아카데미>의 세 번째 시즌이다. 사실 이 드라마는 세 번째 시즌을 제작하기 전에 큰 변화를 마주했다. 주인공인 '바냐' 역할을 맡은 배우 엘리엇 페이지가 자신이 트랜스젠더 남성임을 밝히고 본인의 성별 정체성에 따른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엇 페이지에게 계속 '바냐'를 연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 그렇다면 제작진들은 어떤 방식으로 변화에 발을 맞추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은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시즌 3에서 바냐는 '빅터'가 되어 다시 드라마에 등장했다. 단순히 '이 캐릭터는 이제부터 빅터입니다'라고 별다른 부연 없이 넘어간 것도 아니다. 드라마는 바냐가 자신이 빅터였음을 깨닫고 그 정체성을 찾는 과정과 주변 인물들의 반응을 고스란히 담았다.

솔직히 정말 알차게도 가져다 써먹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물론 긍정적인 의미에서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새롭게 추가된 설정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엄브렐러 아카데미>는 특별한 초능력을 가졌지만 이 때문에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배척되길 반복하는 괴짜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특히나 이 드라마의 초반에 빅터는 다른 남매들처럼 특별한 능력이 없어 보이는 자신이 과연 이 가족에 속하는 게 맞는지 질문한다. 말하자면 가족 안에서도 밖에서도 제대로 발을 붙이지 못한 채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는 인물이었던 셈이다.

캐릭터의 소수자성을 적극 반영할 때 벌어진 일

<엄브렐러 아카데미>의 지난 두 시즌 동안 빅터(바냐)는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 동시에 그런 자신을 있는 그대로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난다. 이 과정에서 빅터(바냐)는 이전보다는 덜 방황하고 더 단단하게 주변과 자신을 붙드는 캐릭터로 변화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바냐'가 자신이 '빅터'임을 인정하고 정체성을 수용하는 이야기는 캐릭터가 끌어왔던 서사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특히 빅터가 '누구나 자기 모습이 어색하다고 느낄 줄 알았으며 그래서 거울을 보는 게 싫었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트랜스젠더들이 겪는 성별 위화감을 정확히 은유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드라마 내내 빅터가 경험했던 방황을 절절하게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이 지점에 생각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비록 바냐를 빅터로 바꾼 것은 출연진의 일신상 변화로 인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제작진들은 배우와 캐릭터가 가지는 소수자성을 드라마에 적극적으로 반영했지 무시하거나 축소하지 않았다.

가령 트랜스젠더들이 지정 성별과 자신의 성별 정체성이 달라 위화감을 느낌에도 만연한 차별과 배제 때문에 자신을 숨기는 경우는 매우 많다. 그런 이들은 대부분 불쾌감과 고독을 혼자 속으로 삭이곤 한다.

단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을 뿐, 빅터 또한 현실의 트랜스젠더들이 겪는 그 고통과 감정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시청자들은 빅터의 오랜 외로움과 마침내 느끼게 된 해방감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빅터의 소수자성이 그를 더 깊이 있는 캐릭터로 만들고 더 강렬한 정서를 전달하게 만든 셈이다.

사람만 바꿔도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총리 비르기트>는 굉장히 현실적인 정치 드라마다. 이는 현실 세계에서 고위직 여성이 처한 현실을 드라마가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 넷플릭스

 
<엄브렐러 아카데미>가 유일한 사례가 아니다. 비슷한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가령 스웨덴의 드라마 <여총리 비르기트>에는 제목처럼 여성 총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드라마에서 총리의 딸이 우울증에 걸리고 병이 점점 악화되는데, 결국 주인공은 딸이 회복될 때까지 총리직에서 물러나는 초유의 선택을 하게 된다.

아마도 주인공이 남성이었다면 이 이야기는 절절한 가족사에서 끝났을지 모른다. 적어도 그 인물은 '좋은 총리이자 가정적인 아빠'라는 평을 들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똑같은 상황도 주인공이 여성이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여총리 비르기트>는 굉장히 현실적인 정치 드라마다. 이는 현실 세계에서 고위직 여성이 처한 현실을 드라마가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연히 '여성은 총리직에 적합한가', '좋은 엄마이자 동시에 유능한 총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와 같은 질문을 주인공은 마주한다. 현실의 젠더 문제가 서사에 깊숙이 개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일한 방식으로 똑같은 이야기를 더욱 복잡하게 구성하는 게 가능하다. 만일 총리가 레즈비언이었다면? 장애인이었다면? 소수민족이었다면? 캐릭터의 정체성에 따라 맞이하는 이야기의 국면이 아주 다채로워질 것이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으로 지적되는 '캐릭터의 다양성'이 정말로 콘텐츠를 망치는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엄브렐러 아카데미>가 증명했듯 캐릭터들의 소수자성은 이미 잘 구축된 캐릭터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들고 시청자들의 강한 정서적 반응을 이끌기도 한다.

한편으로 <여총리 비르기트>가 보여주었듯 캐릭터의 정체성만 바꿔도 단순해질 법한 서사가 다채롭게 변하기도 했다. 캐릭터를 잘 활용할 줄 아는 능력 있는 작가만 만난다면 다양성은 득이 되었지 독이 된 적은 없다.

소수자들이 점점 가시성을 획득하고 주류 미디어에 다양성을 요구하는 경향은 아마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다양한 소수자들이 콘텐츠에 등장하는 걸 막기가 어려울 거란 뜻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등장에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을 외치며 사사건건 발을 거느니 작가들이 제대로 자기 일을 하라고 응원을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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