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6.20 12:13최종 업데이트 22.06.20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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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미국의 케이블 채널 FX에서 방영된 <에이케이에이 제인 로(AKA Jane Roe)> 포스터 ⓒ FX

 
미국 사법 체계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요소 중 하나는 바로 사건명에 원고와 피고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집주인과 세입자 간의 사소한 분쟁(물론 당사자에겐 그렇지 않겠지만) 정도의 사건이라면 모르겠다.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가 사회를 완전히 뒤바꿀 판결에도 원칙은 예외 없이 적용된다.

한국은 아직도 몇몇 법률에 개인의 이름을 붙여서 부르는 게 맞는 일인지 갑론을박을 펼치는 상황인데 개인의 사생활을 중요하게 여기기로 유명한 미국에 왜 저런 체계가 생긴 걸까. 소송에 뛰어드는 순간부터 원고와 피고는 사생활의 영역에 머무를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뜻일까. 궁금함에 몇 시간을 구글에서 헤맨 적도 있지만 명확한 기원을 찾는데 실패했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이유를 알려주기만을 지금도 바라고 있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최근 몇 달간 우리는 다소 생소한 두 외국인의 이름을 듣게 되었다. 바로 '로 대 웨이드 사건(1973)'의 로와 웨이드이다. 해당 사건은 미국연방대법원이 여성의 임신 중단을 헌법적 권리라 결정한 매우 역사적인 판결이다. 이 사건의 원고는 원치 않는 임신을 처벌 없이 중단하고자 재판에 뛰어든 제인 로(Jane Roe)였고 지명된 피고는 당시 댈러스 카운티의 검사인 헨리 웨이드(Henry Wade)였다.

두 사람의 이름이 새삼 호명된 것은 보수 우위 상태의 미국 연방대법원이 임신중단을 다시 범죄로 만들기 위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려 하고 그 와중에 판결문 초안이 유출되어 난리가 났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원고 한 꼭지를 할애해야 할 만큼 중요한 사건이긴 하지만 글에서 다루려는 주제는 아니니 이정도로 줄이고자한다.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 건 가명인 '제인 로'로 알려졌던 노마 맥코비(Norma McCorvey)의 삶이다.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녀는 로 대 웨이드 판결 이후 긴 시간이 흘러 '임신중단 반대운동'의 선봉에 나섰다. 도대체 왜?

그녀는 왜 임신중단 반대 운동에 합류했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국 '돈'이다. 떠들썩했던 로 대 웨이드 사건 이후 시간이 꽤 흐른 90년대 중반, 노마 맥코비는 뜬금없이 복음주의 개신교로 개종하더니 임신중단 클리닉을 떠나 임신중단 반대운동에 합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맥코비는 자신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이끈 두 변호사와 활동가들에게 이용당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기까지 들으면 아주 전형적인 이야기처럼 들린다. 소송의 당사자와 활동가들 사이의 갈등, 그 속에서 드는 회환의 감정과 단체에 대한 반감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켜켜이 쌓이다 터져 나온 결과 감행된 진영 변경까지.

하지만 이 전형적인 이야기는 한 다큐멘터리의 방영 이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하지만 전형적인 건 똑같다). 2020년 미국의 케이블 채널 FX에서 방영된 <에이케이에이 제인 로(AKA Jane Roe)>에는 2017년 심부전증으로 죽음을 앞둔 노마 맥코비와의 인터뷰가 담겼다. 그리고 이 인터뷰에서 맥코비는 자신이 임신중단 반대운동에 함께했던 건 돈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자신은 애초에 여성들이 임신중단을 하건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돈을 받고 임신중단 반대 진영에서 써준 원고를 읽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에이케이에이 제인 로(AKA Jane Roe)>에서 노마 맥코비는 자신이 임신중단 반대운동에 함께했던 건 돈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 FX

 
맥코비는 최소 45만 달러의 돈을 받았고 이 사실은 맥코비와 함께 임신중단 반대운동을 주도했던 복음주의 목사도 인정했다. 심지어 그 모든 게 연기였냐는 다큐멘터리 제작자의 질문에 맥코비는 '그건 연기가 맞고 나는 연기를 무척 잘 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물론 맥코비의 이 인터뷰 이후 보수 개신교계 기반 임신중단 반대운동 진영에서는 '그럴 줄 알았다'와 '죽기 직전에 들어보니 맥코비의 입장이 그렇게 확고하진 않더라'는 반응으로 나뉘었는데, 어쨌거나 서류는 남았고 맥코비가 돈을 받고 그 운동에 함께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개인이 운동의 상징이 되는 일의 위험성

노마 맥코비의 행보를 놓고 수십 가지의 사악한 농담이 떠오르는 것과는 별개로 심란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특정 운동에서 한 개인이 상징적인 위치에 오르는 것이 정말 괜찮은지 여부다. 이건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특정 법률에 개인의 이름을 붙이는 게 맞느냐는 질문과도 관련이 있으며(마치 'OOO법'처럼 말이다) 사실 활동가로서 오랜 시간 가졌던 고민이기도 하다.

우선 이런 상황은 당사자에게도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다. 하나의 운동에는 여러 단체와 실무진들이 함께하고 그들을 뒷받침하는 여론도 존재한다. 그 무수한 노력과 염원을 대표하는 자리에 선다? 그리고 마치 깔때기에 물을 붓듯 모여드는 주목과 관심을 받는다? 솔직히 말하면 가끔 그런 사람들을 바라볼 때마다 속으로 생각한다.

"나는 가늘고 길게 가고 싶다, 아니면 짧아도 가늘게."

당사자뿐만 아니라 운동에 함께하는 이들도 심란하긴 마찬가지. 대표성을 지닌 인물이 시간이 흘러도 한결 같으면 좋겠지만 사람일은 알 수가 없다. 노마 맥코비가 후에 진실을 폭로하긴 했지만 애초에 그녀는 돈을 받고 자신의 신념을 팔아치웠으니 노골적으로 부도덕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꼭 그렇지 않은 사람도 삐끗하기 쉬운 게 주목을 받는 자리에 있을 때다. 같은 잘못을 해도 평범한 사람보다 수백 배의 비판을 마주해야 하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실수로라도 과오를 저질렀을 때 사과와 빠른 수습에 나서기는커녕 잘못을 인정조차 하지 않는 모습을 종종 보인다.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사적인 관계도 아니고 전사회적인 영역에서 자신의 흠결이 기록으로 남는 걸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세상과 벌어진 작은 균열이 점점 큰 간극이 되고 시대에 따라 계속 갱신되는 상식선과 개인이 결국 괴리되기까지 하면 그 사람은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기도 한다. 대학 때 보았던 총명하고 단단한 활동가나 작가들을 10년이 지나고 마주했을 때, '아이고 선생님 어쩌다가'라는 말이 종종 나오는 이유다. 이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에이케이에이 제인 로(AKA Jane Roe)>의 한 장면 ⓒ FX

 
상징적 인물이 사라져도 운동은 계속된다

질문과 고민에 답은 있는가. 솔직히 말하면 사실 없다.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상징적인 개인'을 애초에 만들지 않는 것인데 그건 불가능하다. 인간은 별의 별것을 가지고 상징을 만든다. 가만히 있는 동물·식물들을 가져다가 의미를 부여하거나 혹은 집단의 마스코트로 삼는다. 그러니 사람에게 또한 그러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실제로 시대가 암울하고 도무지 돌파구가 보이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영웅적 개인에게 끌리곤 한다. 아마도 근대 이후 거의 세기마다 걸출한 작가들이 나와 소위 '우상화'라는 걸 비판했음에도 인류가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다면 이제는 그냥 어쨌든 벌어질 일이라고 인정해야 할까 싶다. 심지어 현대의 연예 산업을 보자면 이건 인류에게 큰 즐거움이었을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우려하든 안 하든 '상징적 개인'은 끊임없이 등장할 것이고 제 2의 노마 맥코비는 언제든 생길 것이다. 사실 이미 너무 많다. 다만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게 있다. 맥코비의 '변절 아닌 변절' 이후로 미국의 안전한 임신중단을 위한 운동이 폭삭 망했느냐 하면 그렇진 않았다는 것이다. 당연히 '로 대 웨이드 판결'은 맥코비가 홀로 이룩한 게 아니었고 이 재판을 주도한 두 변호사와 그들과 함께한 실무진들은 여전히 자신의 자리에 남았다. 이 운동의 선봉에 섰던 미국 가족계획연맹은 맥코비의 행보와는 상관없이 꾸준하게 모든 여성이 안전한 임신중단을 자유로이 할 사회를 위해 필요한 일들을 해나갔다.

그러므로 민망하지만 다시 당연한 이야기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어떤 운동에서든 대표성을 가진 개인이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르거나 이후에 이를 인정하지 않거나 혹은 잠적하거나 아니면 그냥 이상해져버리는 일은 반복될 것이다.

이럴 때 최선의 행동은 '이게 진짜일리 없어'를 외치며 그 개인을 놓지 못하는 게 아니다. 충분히 실망하고 화내고 부끄러워하고 비판하고 절망하자.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지금껏 해온 해야 할 일들을 다시 하자. 그게 노마 맥코비가 남긴 파장과 그럼에도 굳건했던 안전한 임신중단을 위한 운동이 남긴 교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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