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5.27 05:53최종 업데이트 22.05.27 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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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비평연재 <좋은데, 싫었습니다>(좋싫)는 주류의 담론에 대항하는 저항의 언어조차 어쩌면 '당위'라는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지 질문합니다. 그저 이것'만'이 옳고, 이것은 '반드시' 좋아해야 하고, 그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대해야 한다는 절대적이고 당위적인 언어들이 정말로 대안과 저항의 언어가 될 수 있는지 묻습니다.[편집자말]
어릴 적에는 신문선 해설위원의 축구 중계를 즐겨봤다. 그의 중계엔 언제나 시그니처 같은 말이 등장하는데 이른바 '디딤발론'이다. 선수의 슈팅이 빗나가면 "운동역학적으로 슈팅을 하는 순간에 축이 되는 디딤발이 단단하게 지탱이 되어 차는 발과 밸런스가 유지되어야…" 같은 식으로 하는 말이다.

신문선 해설위원은 많은 장면을 이 디딤발로 설명했는데 그의 해설로 축구를 배웠기 때문일까, 난 지금도 강한 슈팅을 위해선 차는 발에 힘을 주기보다는 축이 되는 디딤발이 더 중요하다고 믿고 있다.

신문선 해설위원의 해설에 쓰이면서 축구팬들의 농담의 소재가 되긴 했지만, 디딤발은 운동역학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슈팅의 정확도와 강도에서 차는 발의 스윙 속도나 빠르기보다는 디딤발의 안정성과 방향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몸 전체의 균형과 안정을 확보한 상태에서 발현되는 운동이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슛하는 손흥민 부산 아시아드 주경기장에 열린 대한민국 남자 축구대표팀과 호주와의 평가전. 손흥민이 슛하고 있다. 2019.6.7 ⓒ 연합뉴스

 
디딤발의 위치가 정확하지 않으면 몸의 방향이 목적한 방향과 달라지고 공을 원하는 방향으로 보낼 수 없게 된다. 또 디딤발이 안정적이지 않으면 차는 발에 힘이 온전히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스윙하는 발의 힘도 공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즉 '축'을 제대로 세우는 것이 정확한 슈팅의 핵심이다.

실제로 이런 원리는 축구뿐 아니라 힘을 온전히 전달해 목적지까지 무엇을 옮겨놓는 모든 운동에 적용된다. 야구에서도 공을 던지는 투수의 어깨 회전보다 투수의 발 디딤이 공의 정확도와 빠르기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골프나 테니스도 마찬가지다. 모든 운동의 기본은 '축이 되는 디딤발'이다.


모든 운동의 기본이기 때문일까. 디딤발은 운동(exercise)뿐 아니라 운동(movement)의 기본이기도 하다. 운동의 디딤발을 '원칙'이나 '목표'와 같은 말로 표현할 수 있겠다. 운동(노동운동이든 시민운동이든 진보정치운동이든)을 우리 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옮겨놓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운동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디딤발'이다. 즉, 목표를 정확히 디뎌 방향을 분명히 하고 '원칙'을 단단하게 고정해 온전하게 힘을 전달하는 것이다.

진보정당의 꿈

노동자 국회의원 한 명만 있으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군화를 신은 사람들이 청와대에 있던 시절, 노동자와 농민들을 그저 나라님들 배 불리는 도구로 아무렇지도 않게 소모하던 시절, 도시 하나를 가둬놓고 몇 명인지도 모를 사람을 군인들이 학살하던 시절, 사람처럼 살아보겠다고, 가난한 우리도 사람이라고 뛰쳐나왔더니 최루탄과 몽둥이로 두들겨 패 가두던 시절에 그랬다.

진보정당의 꿈은 그렇게 시작됐을 것이다. 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시절이지만 그때부터 '진보정당'이라는 꿈을 품고 살아온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의 삶을 아는 국회의원이 있으면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 사회는 이제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정당이 몇 개나 있고, 노동자인, 농민인, 장애인인 국회의원들이 몇 명씩이나 진보정당의 이름표를 붙이고 국회에 있는 사회가 됐다. 그런데.

그래서 우리 사회는 그 시절에 비해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나. 여전히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짤리고', 노조 한다고 '짤린다'. 농민들은 이름도 어려운 무슨무슨 협상 때문에 다 죽게 생겼고, 장애인들은 지하철 좀 타보겠다고 했다가 세상의 뭇매를 맞고 있다. 성소수자들은 그저 '차별하지 말라'는 법을 만들겠다고 굶는다.

그저 '차별받지 않고 안전하게 살고 싶다'는 여성들은 극단적 사상의 페미니스트로 불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사회에서 도태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우리의 삶을 이해한다는 진보정당의 국회의원 수십 명이 20년 가까이 국회에 머물렀는데 세상이 여전히 이렇다. 진보정당은 무엇을 하고 있나.

진보정당들은 '축이 되는 디딤발'을 잘못 딛고 있다. 어디를 향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슈팅은 자꾸 골을 빗나간다. 중심이 흔들려 힘이 이곳저곳으로 분산되니 슈팅에 힘도 실리지 않는다.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정당 중 유일한 원내정당(진보를 '자처'하는 원내정당이 하나 더 있긴 하다)인 정의당은 '진보정당이 원내에서 더 큰 힘을 갖게 되면 더 많은 역할을 해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선거제도를 고치는 데 힘을 실었다. 사실상의 양당 체제에서 지역구 의석을 차지하기는 어렵지만 비례대표 의석수를 늘리면 정의당의 원내 의석수가 늘어나 교섭단체도 가능할 것이란 믿음이었다.
 

무기한 단식 돌입한 이정미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하라"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 앞에서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의 선거제도 개혁을 뺀 예산안 합의를 규탄하며 이틀째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2018.12.7 ⓒ 유성호

 
그 믿음 때문에 정의당은 많은 것을 포기했다. '조국 사태' 국면에서 민주당과 잡은 손을 놓지 않겠다고 버틴 것도, 그러다 결국 위성정당이라는 희대의 꼼수에 뒤통수를 맞은 것도 그 믿음 때문이었다. 그 결과 정의당은 지난 총선에서 지역구 1석, 비례대표 5석이라는 최악의 성적을 냈다. 명분도 실리도 모두 잃은 헛발질이었다.

정의당의 이런 헛발질은 실은 처음이 아니다. 일하는 사람, 소수자, 가난한 사람의 정치라는 꿈과는 상관없이 당선 그 자체만을 위해 명망가와 화제가 되는 인물을 끌어들이는 일, 정책과 비전보다는 정체성과 수사가 강조되는 정치 모두 정의당이 한 일이다.

정의당에서 근 몇 년간 영입한 인사들은 청년이나 여성, 장애인 같은 '정체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소수자 정체성을 가졌다는 것이 곧 그 소수자의 평등과 권익을 위한 정치 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정체성 자체를 기호로 소모하며 진보정당의 이미지를 획득하는 방식에 가깝다. 기성 보수 정당이 기업인 출신의 정치인을 호명하며 '경제 살리기의 적임자' 운운하던 것과 같은 방식이다.

이는 오히려 정체성의 기호에 가려 정작 그 소수자를 위한 정치를 방해할 수밖에 없다. 기호로서의 정체성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이미지이지 내용과 비전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근래에는 민주당의 검찰 수사권 축소 입법에 전원 찬성표를 던지는 것으로 또 한 번 헛발질을 해냈다. 이는 모두 거대 양당 체제가 고착화되고 첨예해지는 틈에서 민주당과의 공조 또는 민주진보세력으로의 자리매김이 진보정당으로서의 정의당을 존속하게 해 준다는 판단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좋게 말해 '범 민주진보세력'이지 실은 보수정당인 민주당의 2중대라는 오명의 언저리를 계속해서 맴돌게 하는 판단이기도 하다. 지난 정권에서 정의당은 민주당이 정치적으로 위기에 빠지는 순간마다 명확한 방침을 내지 못하고 쭈뼛거리다 얼렁뚱땅 민주당의 손을 들어주는 '준 여당'의 역할을 수행했다. 국회에 더 많이 들어가기 위해 왜 국회에 들어가야 하는지를 망각한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진보정당의 디딤발은 '의회'가 아니다. 진보정당은 '원내에 들어가기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기 위해 원내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란 의미다. 그런데 이 디딤발을 자꾸 헛디디니 중심은 무너지고 공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간다.

진보정당이 진보라는 목표와 중심을 잃으면 사람들은 굳이 그 정당을 선택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기성 정당과 다를 것이 없는데 그렇다면 오랜 세월 차라리 실력과 명망이라도 쌓아온 정당에 표를 주는 것이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진보정당을 그나마 정당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현실적인 이유도 진보에 있다. 그래서 지금 진보정당들이 해야 할 고민은 '무엇을 할 것인가'다. 진보정당이 기성의 보수 양당과 다른 점은 무엇인지, 왜 진보정당이 필요한지, 진보정당의 역할이 어떻게 사람들의 삶을 바꿔갈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2009년 12월 23일, '2010 예산안공동대응모임' 소속 단체 회원과 대학생들이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경기도 무상급식 예산 폐기 규탄, 학생-아동 무상급식 지원 확대 촉구 기자회견'에서 아이들 이름이 적힌 수십 개의 식판을 놓고 무상급식 확대를 촉구했다. ⓒ 권우성

 
생각해보면 민주노동당이 무상의료와 무상급식이라는 상상력과 '살림살이는 나아졌느냐'는 위로를 건넨 이후 어느 진보정당도 '무엇을 할 것이고 그것이 당신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상상과 위로를 건넨 적이 없다.  

진보정당을 지지해 온 사람들 역시 '디딤발'을 명확히 디뎌야 한다. 진보 정치를 바라는 사람들의 디딤발이란 '무엇을 할 것인가'란 질문이다. 관성적으로 진보를 표방하는 정당을 지지하거나 진보 정치를 공학적으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통해 내 삶을 어떻게 바꿔나갈 것인가란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한다.

그간 이런 질문 없이 지역구는 양당을 찍더라도 비례대표는 진보적인 정당을 찍는다는 관성적인 공식이 알리바이처럼 작용했다. 현실적인 판단과 미래지향적인 비전을 동시에 보여준 현명한 투표를 한 나라는 자기 위안의 알리바이. 그 알리바이가 만든 관성에 기대 진보정당 운동은 방향도 목적도 잃고 헛발질을 일삼고 있다. 진보정당을 지지해온 사람과 진보정당을 만들어 온 사람 모두 이 지리멸렬해가는 진보 정치의 헛발질에 책임이 있다.

원칙이니 중심이니 디딤발이니 하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 누구는 그렇게 어렵게 해서 언제 이기고 언제 세상이 나아지냐고 되묻기도 한다. 원래 슈팅 찬스는 그렇게 자주 오는 게 아니고 그렇게 자주 오지 않기 때문에 그 찬스를 잘 살려야 한다. 찬스를 살리기 위해 언제나 명심해야 할 것은 역시 '축이 되는 디딤발'이다. 축이 되는 디딤발이 굳건하다면 슈팅은 정확하고 통쾌하게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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