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30 11:37최종 업데이트 22.04.30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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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포 최영화. 그는 2009년 성실한 한국 남자와 결혼해 두 아이를 기르며 청주에서 살고 있다. 몇 해 전부터는 충북대학교에서 중국어 강의를 하고 있다.

그는 23살에 한국에 건너와 20년 동안 많은 아픔을 겪었다. '초청사기 피해'까지 당했던 최영화는 이 시련을 잘 극복하고 올해 2월 자기 이름을 내 건 중국어학원까지 열었다.


최영화는 한국에 들어와 정착하도록 도와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에게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살았고 어떻게든 그 마음을 늘 전하고 싶었다.

'초청사기 피해' 그 이후
 

중국어 학원 강의실에서. 2022년 2월 19일 개원했다. ⓒ 민병래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하자 동북 3성의 동포사회는 한국으로 가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열풍에 사로잡혔다. 누구는 친척 초청장이 왔다느니, 누구는 벌써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느니, 하는 이런저런 소문이 무성했다.

그 틈을 노리고 산업연수·결혼·유학을 알선한다며 많은 브로커가 설쳤다. 최영화 가족도 거기에 빨려 들어갔다. 연길에서 제사용 그릇 공장을 운영하던 이모부는 한국으로 가는 산업연수생을 모집했고 최영화의 아빠도 신청을 했다.

이모부는 37명에게 1인당 2백만 원을 받아 한국의 브로커에게 보냈다. 결과는 초청사기. 동북 3성에서 집 한 채 값인 큰돈을 날린 것이다. 당시 많은 동포가 피해를 입었는데 무려 2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모부는 빚쟁이들 독촉에 몸을 피했다. 최영화의 집도 피해자였는데 엄마가 이모부 공장에서 관리를 맡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집으로 몰려왔다. 이불까지 싸 가지고 와 최영화의 집에 드러누웠다. TV나 가재도구를 가져가고, 엄마가 시장에서 옷가게를 열었을 때는 팔릴 때마다 조금씩 돈을 받아갔다. 아빠는 빚을 조금이라도 더 갚겠다고 퇴근 후 목재를 나르다가 다리까지 다쳤다.

시련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길림성 왕청중학교에 다니던 최영화가 늦게까지 공부를 하던 어느 날, 불꽃이 탁탁 튀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나무로 된 맞배지붕에서 불길이 활활 솟구쳤다. 뇌출혈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할머니를 일으켜 겨우 빠져나왔을 때 지붕이 맥없이 무너졌다. 전화기를 붙잡고 악을 썼지만 소방대는 느럭느럭 나타났다.

초청사기를 당해 빚더미에 앉았는데 원인을 알 수 없는 불까지 덮쳤으니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10평짜리 벽돌집이지만 다섯 식구가 정을 나누며 살던 집은 잿더미가 되었다. 엄마는 밤하늘을 보며 눈물을 흘렸고 아버지는 거푸 담배를 피웠다.

사기로 중국 동포 사회가 절망에 빠졌을 때 한국정부는 일부 브로커만 처벌하고 피해구제에는 소극적이었다. 당시 한국정부의 해외동포법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손쓰기가 어려운 사정도 있었다.

이때 한국의 시민운동단체가 발 벗고 나섰다. 1996년 7월 북한의 홍수피해를 돕기위해 활동을 시작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와 '외국인 노동자피난처'가 '재중국동포시민대책위'를 만들고 1996년부터 2년간 연변 등지에서 피해조사를 벌였다.

이런 노력이 마중물이 되어 동포들이 주체가 된 '중국 동북3성 한국초청사기 피해자협회'가 결성되었다. 1만8000명이나 되는 회원이 가입해 세미나와 집회, 단식농성을 하고 북경의 한국대사관으로 달려가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최영화의 이모 또한 피해자들의 구제를 위해 앞장서 노력했다. 그제야 한국정부는 사태를 심각하게 인식했고 '본부와 피해자협회의 제안'을 받아들여 피해자 5000명을 특별입국시키는 것으로 결정했다.

최영화는 이 조치로 3년 비자를 받아 2003년 한국에 들어왔다. 사기를 당한 게 1994년이니 근 10년이나 걸린 셈이다. 아버지가 신청했지만 나이 제한에 걸려 칭다오에서 회사를 다니던 그가 대신 오게 되었다.

2003년 1월 하순 최영화는 입국 대상자들과 연길역에 모였다. 스무 시간 가까이 침대열차를 타고 단둥까지 와서 다시 서해바다를 가로질러 들어왔다. 며칠 동안 인천에서 연수를 받고 배정받은 곳이 청주의 한 위성수신안테나 공장. 다섯 명이 가게 되었는데 최영화 일행을 맞으러 온 대표는 승용차 한 대를 가지고 왔다. 어쩔 수 없이 승용차에 몸을 구겨 넣었고 다섯 개의 커다란 짐가방도 트렁크에 욱여넣었다.

잠자리도 준비가 안 된 상태라 모텔에서 며칠 지내다가 청주 근로복지 아파트에 들어갔다. 1월 31일 설날을 코앞에 두고 입사를 한 터라 텅 빈 아파트에서 며칠을 보냈다. 공장식당이 문을 닫아서 연휴 내내 신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주머니에는 달랑 5만 원, 첫 월급이 나올 때까지 버텨야 했기 때문에 음식을 사 먹을 형편이 아니었다. 설날 연길로 전화를 했을 때 엄마는 미안하다고 했다. 대학교를 다니던 딸을 칭다오 공장에 보냈고 또 한국의 이름 모를 공장에 보냈으니 말이다. 최영화는 다니게 된 공장이 좋고 설도 동료들과 함께 보내며 맛있는 한국음식을 먹고 있다며 엄마 마음을 달랬다.

3년 만에 모든 빚을 갚고
 

강의에 열중하는 최영화 올해 2월 19일 개원했다. ⓒ 민병래

 
최영화는 중국에 있을 때 주야 맞교대란 개념을 몰랐다. 철야라는 말도 처음 들었다. 하지만 빨리 빚을 갚아야 했기 때문에 2교대를 자원하고 철야를 마다하지 않았다. 특별입국 규모가 적어서 한국에 나올 기회가 피해자 모두에게 보장되지 않았다. 피해 가구 다섯 중에서 한 명만 3년 비자가 나왔다. 나오는 사람은 대신 나머지 사람의 빚까지 갚아주는 게 약속이었다.

무거운 위성 수신기를 이리저리 돌리며 품질검사를 했고 완성된 제품을 짊어지고 콘테이너에 실었다. 최저임금을 받아도 중국 월급의 너댓 배가 되고 연장근로를 마다하지 않아 3년 안에 다섯 명의 빚을 모두 갚았다. 퇴근 후에는 방송통신으로 대학공부까지 했으니 억척 하나로 산 세월이었다.

공장 생활에 힘이 된 건 남자친구. 회사 언니가 말벗으로 사귀라고 소개를 해줬다. 하지만 최영화는 남자를 만나는 게 께름했다. 3년 비자가 끝나면 떠날 몸이고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었다. 최영화는 이래저래 고민하다 데이트 비용을 절반으로 갈라서 하자고 제안했다. 남자는 받아들였다. 그렇게 시작한 4년 동안의 교제, 행복했다.

한국에서의 달라진 인생

1차 3년 비자가 끝나자 한국정부는 5년 연장 비자를 내줬다. 연길 고향으로 잠시 다니러 갔다가 2007년 두 번째로 들어와서 리튬공장에 다녔다. 처음 사귀었던 남자친구와 2009년 결혼하고 애를 가지면서 공장을 그만두었다.

시어머니는 최영화를 사랑했고 첫 아이를 잘 돌봐줬다. 덕분에 다시 시작한 게 중국어 강사일. 교차로를 뒤적거려 중국어 방문학습교사에 지원했다. 잘한다고 칭찬받고 학부모들도 좋아했다. 금세 팀장이 되었다. 경험이 쌓이니 자기 사업을 해보고 싶었다.

중국어 프랜차이즈 청주가맹점을 시작했다. 열심히 하니, 수강생이 40명이 넘을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6~7년이 흘렀을 때 뭔가 허전했다. 가맹점 사업은 진정한 내 사업이 아니었다. 결단했다. 코로나 시국이지만 자기 이름을 내걸고 내 사업을 해보자고.

최영화는 지금 충북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으며 '한국어교육'을 전공하고 있다. 한국 학생에게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지만 중국 학생이 한국어를 배울 때도 도움을 주고파 택한 전공이다. 또 충북대학교 국제교류본부에서 수년 동안 중국어 강사 노릇을 했다. 이래저래 풍부한 경험이 쌓인 터였다.

최영화가 올해 2월 19일에 개원한 것은 엄마가 길일을 잡아줬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개업식을 하지는 못했지만 아침에는 송대관의 '해뜰날'을 들었다. 큰일을 치를 때 의식처럼 듣는 곡, 한국에 와 근심만 가득했던 때 자신을 지탱해준 노래였다.

개원하는 날 연길의 엄마와 통화하면서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다"고 서로를 보듬었다. 한국에 올 때 중국어 학원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덕분에"

최영화는 결혼을 하고 학원까지 열게 되면서 늘 궁금한 점이 있었다. 동북 3성 동포들이 절망에 빠졌을 때 현지에서 피해조사를 하고 성금을 모아 긴급구제활동을 펼친 사람들이었다.

피해가정을 한국의 가정과 자매결연까지 맺어주며 조금이라도 더 도움을 주려 한 그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들이 한국정부를 설득하고 압박한 덕에 최영화를 비롯 많은 사람이 피해를 회복할 수 있었다.

최영화는 그때 중학생 소녀였다. 엄마는 오랜 세월이 지나선지 이름을 몰랐다. "한국에서 왔는데 우리 민족... 뭐라 하더라..."는 막연한 대답뿐이었다. 주변에서도 정확한 명칭을 아는 이가 없었다. 최영화는 종종 '우리민족', '초청사기' 같은 단어를 넣고 이리저리 검색해봤다. 중국어 학원을 열고서는 더욱 부쩍 찾아봤다.

최영화는 최근에서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라는 그 단체의 정확한 명칭과 당시 중국 현지를 누볐던 책임자가 '본부'의 대외협력국장이었던 김현동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김현동의 SNS도 알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아래 내용의 감사편지(간략하게 줄임)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 김현동 선생님.

저는 2003년 한국에 온 최영화라고 합니다. 제가 한국에 올 수 있게 도와주시고 우리 가족의 새로운 삶을 열어준 것에 감사 드립니다. 대표님을 알게 된 것은 최근입니다. 네이버에서 '한국 초청사기 피해자협회'를 검색하다가 오마이뉴스의 관련기사를 찾게 되어 거기서 선생님의 이름과 활동 이력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초청사기를 당해 희망이 송두리째 없어지게 되었죠. 저는 대학을 중퇴하고 사회에 내몰려 일 할 수밖에 없었어요. '한국'이라는 단어에도 한이 맺힌 저희 가족이지만 가족을 살려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칭다오 한국 회사에서 일을 했습니다. 한국에 갈 수 있다면 힘든 가정 상황이 바뀌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안고 살았습니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와 '사기피해자협회'의 도움으로 한국행 기회가 왔지만 아버지의 연세가 나이 제한을 넘어 제가 대신 오게 되었죠. 23세에 한국에 와서 주야로 일하고, 철야도 서슴없이 하여 모든 빚을 갚았습니다. 일을 하면서 방송통신대학을 다니며 공부도 이어 갔습니다. 지금은 두 아이 엄마이고, 아내이며 충북대학교 중국어 강사입니다. 저의 이름으로 중국어학원도 열어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려웠던 지난날 연변에 있는 우리 가족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주신 것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선생님께서 가족들과 함께 중국에서 겪으셨던 고생이 저희처럼 희망이 없는 가정에 햇빛이 되어 주었습니다. 선생님께 글을 올리는 것은 선생님 덕분에 어딘가에서 저처럼 행복함을 느끼고 감사한 마음을 전해드리고 싶은 연변 동포들이 많을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선생님과 가족 모두 건강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와 대외협력국장 김현동이 30년 전 동북 3성에서 중국동포에게 보여줬던 우정과 연대!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살았던 최영화의 마음! 중국동포를 향한 우리 내부의 비뚤어진 시선이 여전한 이때 참으로 소중하고 훈훈하게 다가온다.

<못다한 이야기>

① 우리 민족 서로돕기운동본부는 1996년 6월 중순 북한과의 지원 및 교류 협력을 위해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종교(송월주, 박재창, 김재중, 최근덕 등) 및 지도층 (어영훈, 이새중, 김지하, 손봉호, 김진현 등)이 모여 창립되었다.

그해 7월부터 큰물 피해를 입은 북한 돕기 범국민운동을 선포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집행부로는 사무총장 서경석 목사, 기획실장 이용선(현 국회 외통위 의원), 사무국장 강영식(현남북교류협력재단회장), 홍상영(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사무총장), 윤지열 등의 활동가들이 포진했다.

이때 김재오 선교사 등이 활동하는 외국인노동자피난처에서 동포초청사기피해 문제를 제기했다. 외국인노동자피난처는 외국인노동자와 함께하는 인권운동단체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가 중심이 되어 중국 동북 3성으로 실태 조사를 나가 보고서를 작성하고 이를 한국사회에 제기하는 한편 정부에게 피해대책수립을 요구했다. '우리민족 서로돕기운동본부'의 사업은 누리집 http://ksm.or.kr 에서 확인할 수 있다.

② 김현동이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의 대외협력국장으로 중국 동북 3성에서 활동했던 내용은 오마이뉴스에서 소개한 바 있다.
관련 기사 : 중국 러시아 동포와 함께 한 30년, 그의 유랑은 끝날 수 있을까
http://omn.kr/1rfub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본 기자의 블로그에도 같이 게재됩니다.(https://blog.naver.com/pmsig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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