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27 19:47최종 업데이트 22.04.27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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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정부가 트위터에 올린 파시즘 비판 동영상. ⓒ 우크라이나 정부

 
우크라이나 정부가 전쟁 중에 해프닝을 일으켰다. 지난 1일 공식 트위터에 "우리는 러시즘과 싸울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는 문구와 함께 '현대 러시즘의 이데올로기(ideology of contemporary ruscism)'라는 동영상을 업로드 했다. 해프닝은 이 때문에 일어났다.

이 동영상은 스탈린 및 푸틴의 사진과 더불어 "소련에 대한 향수", "러시아 제국주의 이데올로기" 등의 문장을 제시하면서 러시아식 파시즘을 뜻하는 러시즘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그러다가 1분 13초 부분에서 '부주의한 장면'을 내보냈다. "파시즘과 나치즘은 1945년에 패배했다"라고 써놓은 문구 바로 위에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와 더불어 일본의 히로히토 일왕(천황) 사진을 배치했던 것이다.
   

본문에 언급된 동영상. ⓒ 우크라이나 정부

 
요즘 일본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우크라이나를 열심히 돕고 있다. 서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산 천연가스 도입을 걱정하지 않고 우크라이나 지원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자국이 보유 중인 천연가스를 서방세계에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우크라이나에 방탄복을 제공하고자 자위대 수송기도 파견했다. 우크라이나 난민들도 받아들이고 있다.

삭제된 일왕의 사진

이달 19일에는 아베 신조의 친동생이지만 외가에 입양돼 성이 달라진 기시 노부오 방위대신이 우크라이나에 감시용 드론과 방호 마스크 및 방호복을 제공하겠다고 발언했다. 같은 날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들과의 화상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3억 달러 지원을 약속했다.


동시에 일본은 러시아를 적극 압박하고 있다. 전쟁이 발발하지는 않았지만 거의 확실시됐던 2월 23일에는 러시아 국채 등의 일본 내 발행·유통을 금지했고, 개전 이튿날인 그달 25일에는 러시아에 대한 반도체 수출규제 등의 조치를 취했다. 이번 달 20일에는 러시아 외교관 등 8명을 추방했다. 미국이 군대를 파견하지 않으므로 자위대 군대를 파견할 수는 없지만, 러시아 기업이나 정부 관료들 사이에서 전쟁 혐오나 반(反)푸틴 분위기가 일어날 수 있도록 나름대로 애를 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정부가 위와 같은 동영상을 올렸다. 이 동영상이 일본인들의 눈에 포착됐고, 지난 주말 SNS를 통해 논란이 확산됐다. 결국 우크라이나 정부는 문제의 장면에서 히로히토 사진을 삭제했다. 현지 시각 4월 24일 밤 10시경 새로 올린 영상에는 히틀러와 무솔리니 사진만 등장한다.
  

수정된 동영상 ⓒ 우크라이나 정부

  
우크라이나 정부는 사과의 뜻을 표시했다. 수정된 동영상을 업로드 한 직후에 올린 것으로 보이는 트위터 글에서 "친절한 일본 국민들을 자극할 의도가 없었다"며 "실수를 수정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맞서려면 미국과 서유럽의 지원이 가장 절실하다. 우크라이나는 서방세계가 자국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자, 유럽연합(EU) 가입이라도 관철시키려고 애쓰고 있다. 현지 시각으로 지난 20일 샤를 미셸 유럽연합 정상회의 상임의장이 키이우를 전격 방문했다. 유럽연합 가입을 희망하는 우크라이나의 염원이 이뤄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지금 우크라이나의 시선은 서쪽으로 크게 쏠려 있다. 그래서 동쪽 일본의 적극적 지원이 우크라이나인들의 눈에는 덜 부각될 수도 있다. 그런 정서적 분위기가 이번 해프닝이 생기는 데 영향을 줬을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히로히토를 히틀러·무솔리니와 동급에 뒀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정부가 일본의 협력을 받아 러시아에 맞설 필요성 때문에 히로히토에 대한 평가를 바꾸는 이 장면은 제2차 세계대전 뒤에 있었던 히로히토 재평가 분위기를 연상케 한다.
  

쇼와 일왕 1946년 11월 3일, 평화헌법에 서명하고 있는 히로히토. 평화헌법은 맥아더가 초안을 작성했다. ⓒ 없음

 
히로히토, 2차 대전 뒤엔 국제전범 평가

제2차 대전 뒤에 히로히토는 국제적으로 전범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1946년 1월 20일자 <조선일보> 1면 하단 기사는 도쿄 발 전보를 근거로 "동경 내전(來電)에 의하면 호주 급(及, 및) 신서란(新西蘭)은 천황을 일본의 주요 전쟁범죄인으로 지명하엿다고 전한다"라며 "그러고 작년 10월 중국도 천황을 전쟁범죄인 명부에 기입하엿다고 보도하엿다"라고 설명했다. 호주 및 뉴질랜드와 더불어 중화민국이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규정했다는 보도다.

도쿄재판으로 불리는 극동국제군사재판의 재판장인 윌리엄 웹(William Flood Webb, 1887~1972) 역시 생각이 동일했다. 도쿄재판이 마무리되던 시기에 발행된 1948년 11월 14일자 <경향신문> 1면 중단에서 그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

이 기사는 일왕을 일황과 일제(日帝)로 부르면서 "국제전범재판장인 호주의 윌리암 웨브 씨는 12일 '일황 유인(裕仁)은 그의 정치적인 책임은 면제되여 있으나 일본의 침략전쟁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고 말하였다"라고 한 뒤 "씨(氏)의 이러한 견해는 일제의 지위를 명백히 하는 것이 필요한 전범재판법에 의거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제2차 대전 직후의 국제사회는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인식했다. 이 시절에는 히틀러·무솔리니 사진 옆에 히로히토 사진이 들어가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도 유독 히로히토만 책임을 모면했다. 그 본인뿐 아니라 후손들도 여전히 일본 왕위를 잇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히틀러·무솔리니와 달리 히로히토가 패전 후에 생명은 물론이고 정부 시스템까지 지킨 사실과 무관치 않다. 비록 패전은 했지만 그를 옹호할 정치세력이 살아남은 것이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

훨씬 더 중요한 두 가지 이유는 미국의 입장과 관련되는 것이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가급적 기존 체제를 이용해 일본을 지배하는 게 유리했다. 1945년 9월 6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승인한 '항복 후 미국의 초기 대일 방침'은 '천황을 포함한 일본 정부기구 및 기타 기관을 통해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방했다. 일왕을 앞세워 일본을 지배한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기 때문에 히로히토에게 엄정한 잣대를 적용하기가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이유는 중국 국공내전에 대한 미국의 이해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을 앞세워 소련을 견제하고자 했던 미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자, 중국 대신에 일본을 앞세워 소련은 물론이고 북한·중국까지 견제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이런 변화는 미국이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처벌하기보다는 동맹국 국가원수로 대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히로히토는 전범이다'라는 외침이 국제사회에서 줄어드는 결과를 낳았다.
  

맥아더와 히로히토의 기념사진. ⓒ 위키백과

 
히로히토 역시 점령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공산주의에 공동 대처할 필요성을 적극 역설했다. 이시카와 마스미 니가타 국제정보대학 교수의 <일본 전후 정치사>는 총 11회에 걸친 맥아더-히로히토 회담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천황은 냉전 대립에 있어서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해 언급했고, 일본의 안전보장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관여해주기를 요청했다"면서 "마지막 회담에서 천황은 도쿄재판에서 자신을 소추의 대상에서 제외시켜 준 맥아더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다"고 서술한다.

1945년 이후의 미국이 일본의 협조 하에 소련에 대항할 목적으로 히로히토를 전범 재판으로부터 보호해준 것과 2022년의 우크라이나가 일본의 군사지원을 받아 러시아에 대항할 목적으로 히로히토를 히틀러·무솔리니와 떼어놓은 것은 무게감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기는 하지만 공통적인 한 가지를 공유하고 있다. 전범 히로히토와 전범국 일본이 죄과도 치르지 않은 채 이처럼 당당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준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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