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27 18:55최종 업데이트 22.03.27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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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양사 창업자 김연수 ⓒ 삼양사 홈페이지

 
<동아일보>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의 친일에 가려 제대로 부각되지 않는 것이 있다. 동생인 수당 김연수(1896~1979)의 친일 반민족 행위가 그것이다. 형 김성수와 함께 경성방직(경방) 등을 경영하면서 삼양그룹(삼양식품과 무관)을 발전시킨 김연수 역시 만만치 않은 친일 경력의 소유자다.

김연수는 아버지 김경중의 둘째 아들이라는 점에서는 김성수에게 밀리지만, 실질적으로는 밀릴 이유가 없었다. 김연수보다 5년 먼저 태어난 김성수는 세 살 때 큰아버지 김기중의 양자가 됐다. 그래서 1896년 출생 당시의 김연수는 실질적인 장남이었다.


김연수는 친일행위에서도 형에게 밀리지 않았다. 그의 형은 군국주의 침략전쟁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시국 강좌나 순회강연에 참여했다. 학도지원병과 징병제 참여도 독려했다. 국민정신총동원연맹·국민총력조선연맹·흥아보국단·조선임전보국단의 간부 자격으로 전쟁 지원에 참여하고 국방헌금도 기부했다.

김성수는 기업인이고 교육자이고 정치가였던 데 비해 김연수는 주로 기업 분야에서 활동했다. 형에 비해 활동 분야가 좁았지만, 친일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형 못지않은 친일 행각
 

학창 시절 형 김성수와 함께한 김연수(오른쪽). ⓒ <수당 김연수>

 

김연수는 기업인으로서는 다소 이례적으로 말과 글로도 친일을 했다. 일례로 1944년 1월에는 친일파 이광수·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 유학생들의 학병 참여를 독려했다. 같은 달 19일 자 <경성일보>에 쓴 글에서는 '학병에 입대하고 죽어야 조선이 제국의 일원이 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김연수는 군국주의 조직에도 참여했다. 그 역시 국민총력조선연맹·조선임전보국단 간부로 활동했다. 또 침략 전쟁을 돕고자 일본 국채를 대거 매입해줬을 뿐 아니라 헌금 형식의 기부도 많이 했다.

1993년에 박현채·서중석·한상범 교수를 비롯한 22인의 공저로 출간된 <친일파 99인> 제2권에 역사학자 윤해동의 '김연수: 민족자본가의 허상과 친일 예속자본가의 실상'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은 김연수의 친일과 관련해 "해방 이후의 한 조사에 의하면 그 자신과 경성방직 또는 방계 회사의 이름으로 납부한 헌금 총액은 80만 원을 상회한다"라고 한 뒤 "80만 원이라는 금액은 1941년 경성방직의 한 해 순이익"이라고 설명한다.

김연수는 관직을 맡는 방법으로도 일본 지배에 협력했다. 1933년에는 경기도 관선의원이 됐고, 일본의 만주 지배가 한창이던 1939년에는 만주국 명예총영사를 맡았고, 1942년에는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참의로 참여했다.

거기다가 군수품 생산에도 가담했다. 기존의 경성방직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1944년에 세운 조선항공공업회사를 통해서도 그렇게 했다. 그의 친일 행적을 죄다 열거하면 글 한 편으로는 모자랄 정도다. 1941년 1월에 히로히토 일왕(천황)이 비단 '견'과 끈 '수'가 들어간 견수포장(絹綬褒章)이라는 명칭의 표창을 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제국주의 일본에 주기만 한 게 아니라 받기도 많이 했다. 그가 경기도 의원 시절 만주에 대한 관세 정책과 경제통제 정책을 비판한 것은 그가 운영하는 기업의 만주 진출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와 형의 기업 활동에는 총독부의 자금 지원도 많았다. <동아일보>가 총독부의 기업 정책을 비판하면 총독부가 이들의 기업 활동을 지원하는 일이 3·1운동 이후에 많았다.

2004년에 <경제와 사회> 제64호에 실린 김주환 경기대 교수의 '한국사회 재(財)-재 갈등의 언(言)-언 갈등으로의 전환'은 "일제하 김성수가(家)의 기업 활동과 관련해 흥미로운 것은 동아일보의 역할"이라고 한 뒤 "동아는 당시 일제의 대조선 산업정책이 일본만을 위한 것으로 사실상 조선민족의 경제 도태 정책이라고 비판하면서 시정을 요구하고 조선인 기업에게도 차별을 주지 말고 지원할 것을 주장했다"면서 "이러한 주장은 경성방직에 대한 자금 지원으로 결실을 맺었다"라고 설명한다.

김연수는 정세 변화에도 기민했다. 일본이 만주국을 세운 뒤인 1936년에는 삼양사 만주 지점을 개설하고 만주지역 농장 건설에 뛰어들었다. 일본의 대륙 침략에 보조를 맞춰갔던 그의 경영전략을 엿볼 수 있다. 삼양그룹이 일제 말기에 전성기를 구가한 것은 그런 경영전략에도 힘입었다고 볼 수 있다.
  

만주에 세워진 삼양사 봉천 사무소. ⓒ <수당 김연수>

 
이승만 탄압에도 5대 재벌 안에 들어 

1948년 9월 29일 구성된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김연수 같은 인물을 용인할 리 없었다. 이듬해 1월 5일 활동을 개시한 반민특위는 21일에 김연수를 체포했다. 다음날 <경향신문> 4면에 "반민특별조사위원회에서는 21일 상오 10시 돌연 행동을 개시하여 전 경방 사장 김연수를 체포·구금"했다는 보도가 났다. "돌연 행동을 개시하여"라고 했다. 전격적으로 체포가 이뤄졌던 것이다.

'돌연' 끌려간 김연수는 강요에 의한 행위에 불과했다며 혐의를 부인하면서도 큰 틀에서는 뉘우치는 모습을 보였다.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경찰서에 수사받으러 들어갈 때 큰 틀에서는 '송구하다'고 말하면서도 구체적으로는 범행을 부인하는 피의자들을 연상케 된다.

김연수의 친일을 두둔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1977년 7월 8일 자 <경향신문> '비화(秘話) 한 세대 (166) 반민특위 (20)'는 "자기 사무실에서 반민특위 조사관에 의해 체포된 김연수는 머리를 푹 숙인 채 수갑을 받았다"라고 한 뒤 "'민족운동가들을 뒤에서 많이 도왔다던데'(라며) 될 수 있는 대로 피의자에게 유리한 구실을 찾아주려는 조사관 앞에서도 김연수는 '그런 직함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민족 앞에 죄스런 마음이니 벌을 달게 받을 뿐'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고 설명한다.

김연수를 두둔하는 기사이므로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일정 부분은 사실을 반영하는 기사다. 1949년 5월 27일 자 <조선일보> 2면 기사에 따르면, 반민특위가 재판부에 제출한 조사 의견서에 "개전의 정상이 현저"하다는 대목이 있었다. 김연수가 반민특위 수사관들 앞에서 뉘우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구속 2개월 뒤에 석방되고 동년 8월 6일 무죄 판결을 받은 김연수의 앞에 또 다른 위기가 놓여 있었다. 이날 '김연수 무죄'라는 <동아일보> 호외가 뿌려졌지만, 대통령 이승만은 그를 무죄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그가 '유죄'라고 생각했다.

이승만은 김성수 및 한국민주당(한민당)과 대립했다. 그래서 김연수와 삼양그룹도 싫어했다. 이승만이 삼양그룹을 탄압하면서 삼양의 대항마로 이병철의 삼성그룹을 지원하는 현실이 김연수에게 놓인 또 다른 위기였다.

한민당과 김성수는 친일세력이라는 아킬레스건 때문에 자파 대통령 후보를 내세우지 못하고 독립운동가 이승만을 지원했지만, 이승만은 당선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한민당과 김성수를 적대했다. 이것이 김연수와 삼양그룹에 장애물이 됐다.

위 김주환 논문은 "삼양과 삼성의 이익 대립 하에서 승자를 결정한 것은 자율적인 시장에서의 경쟁이 아니라 국가의 차별적 개입"이었다며 "그 정치적 배경은 최고 통치자의 재벌에 대한 선호 여부였다"라고 한 뒤 "이승만의 선호는 삼양 배제와 삼성 지원으로 나타났다"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승만의 탄압 하에서도 삼양그룹은 '선방'을 했다. 일제 때 만큼은 아니지만 이승만 정권 하에서도 여전히 주요 재벌의 위상을 지켜냈다. 이승만이 쫓겨난 지 6년 뒤에 발행된 1966년 10월 6일 자 <경향신문> 기사 '재벌론'은 "흔히 우리나라 10대 재벌로 손꼽히는 것은 (1) 삼성재벌(이병철) (2) 럭키재벌(구인회) (3) 개풍재벌(이정림) (4) 삼호재벌(정재호) (5) 삼양재벌(김연수)"이라고 설명했다.

일제강점기 때 한국 최고 부자였던 화신백화점 박흥식은 일제 패망 뒤에도 상당한 재력을 유지했지만 해방 이전과 비교하면 현저히 위축됐다. 그에 반해 김연수는 이승만 정권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그 시절에 5대 재벌 이내의 위상을 유지했다.

<동아일보>와 한민당
  

삼양사 창업자 김연수 ⓒ <수당 김연수>

 

형인 김성수의 친일에 뒤지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어떤 친일파에도 뒤지지 않는 굵직한 친일 경력의 소유자였다. 거기다가 정권의 탄압까지 받았다. 정상적인 경우였다면 그와 삼양재벌은 몰락에 이르기 쉬웠다. 그런데도 그가 삼양그룹을 지켜낸 것은 돈 자체의 힘에도 기인하고 그의 의지와 열의에도 기인하지만, 여기에는 그 이상으로 중요한 비결이 있었다.

그 비결은, 반민특위에 끌려갈 때 고개 숙이고 '큰 틀에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이는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직결된다.

김성수뿐 아니라 김연수도 <동아일보> 및 한민당과 깊은 관계를 가졌다. 김연수 부고 기사인 1979년 12월 4일 자 <동아일보> 1면 좌하단 기사에 "동아일보·경방·고려대 창업 도운 경제계 원로"라는 표현이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동아일보>를 배경에 두고 있었다.

또 한민당도 배경으로 두었다. 위 김주환 논문에도 언급됐듯이 그는 한민당의 자금원이었다. <동아일보> 및 <한민당>의 우군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이승만 정권의 탄압을 받은 이유를 설명하는 동시에 그 탄압을 견딜 수 있었던 이유도 설명한다.

<동아일보>가 조중동으로 불리며 아직까지도 건재를 과시하는 사실, 한민당이 민주당의 모체가 되어 영향력을 유지한 사실은 <동아일보>와 한민당을 배경에 둔 김연수가 오랫동안 주요 재벌의 위상을 유지한 비결을 짐작케 한다.

친일파들이 해방 이후에도 재산을 증식하며 지배력을 늘려간 것은 그들의 뻔뻔함이나 탐욕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경제·정치·사회·문화 그리고 언론 등의 상층부에 그들이 기생하면서 친일 피해자인 대중을 지배하는 구조가 그 비결 중 하나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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