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17 13:39최종 업데이트 22.03.17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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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모습 ⓒ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집무실을 광화문이나 용산으로 옮기는 방안을 고심 중이다. 용산의 경우에는 국방부 청사 등이 검토되고 있다. 청와대 이전 태스크포스(TF)가 이 문제를 집중 검토할 것이라고 보도되고 있다.

과거 같으면 이런 논의는 천도 문제로 해석되기 쉽다. 군주의 거처나 집무실을 옮기는 것을 천도라고 했다. 용산은 서울특별시 안에 있지만 한성부(한양) 사대문 밖이기 때문에, 100년 전 사람들 같았으면 이 문제를 천도로 받아들이기 쉬웠다.

용산의 과거

용산이 지금과 비슷하지만 약간 낮은 수준의 관심을 받은 것은 고려 제15대 주상인 숙종 때였다. 고려 건국 177주년인 1095년에 만 13세 된 어린 조카인 헌종을 압박해 왕위를 차지한 뒤 반대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한 만 41세의 숙종은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는 시대에 군주 생활을 시작했다.


동아시아 최강국인 거란족 요나라가 약해지고 여진족이 강성해지는 과도기였다. 그래서 외교 노선에 대한 고심이 특히 깊을 수밖에 없었다. 또 이복동생 왕수로 인한 고민 역시 깊었다. 왕수가 세력을 키운다는 소문도 무성했다. 이 시기에는 왕권이 형제에게 계승되는 사례가 많았다. 그래서 왕수의 동태를 예의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숙종은 음력으로 숙종 4년 11월 3일(양력 1099년 12월 27일) 왕수에게 역모죄를 적용했다. 그를 경산부(경북 칠곡)로 유배 보냈다. 그렇게 해서 한시름 놓은 뒤에 추진한 것이 개경 남쪽에 남경이라는 소경(小京)을 재설치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인 제11대 문종이 1067년에 설치했지만 오래 못 가고 폐지된 남경을 부활시키는 일이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4대의 차이나 있었던 것은 문종 뒤에 문종의 두 아들인 순종(제12대)과 선종(제13대), 문종의 손자이자 선종의 아들인 헌종(제14대)이 왕위를 이은 뒤에 문종의 또 다른 아들인 숙종이 즉위했기 때문이다.

소경 역시 왕의 거점이었다. 그러므로 숙종이 남경 부활을 추진했다는 것은 이 시점에 상당한 힘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그 힘을 바탕으로 왕권강화를 생각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남경 복원을 건의한 인물은 김위제(金謂磾)였다. 김위제는 고조선 국교인 신선교의 전통을 잇는 도사였다. <고려사> 김위제 열전에 따르면, 김위제는 개경-서경(평양)-남경의 트리오 체제를 건의했다. 그렇게 되면 70개 국가가 고려 임금에게 복속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조선상고사>에서 역사학자 신채호는 김위제가 고조선 역사서인 <신지>를 근거로 그런 예언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때 숙종의 명령을 받고 1101년에 남경 후보지를 물색한 책임자 중 하나가 윤석열 당선인의 조상이자 동북 9성 축조의 주역인 윤관이다. 그리고 윤관 등이 돌아본 지역 중 하나가 바로 용산이었다.

<고려사> 숙종세가(숙종 편)에 따르면, 윤관 등은 "신들이 노원역·해촌처·용산처에 가서 산수를 살펴보았지만 도읍을 세우기에 부족했습니다. 다만, 삼각산 면악 남쪽의 산세와 물 흐름이 옛 문헌에 부합할 뿐입니다"라고 보고했다. 지금의 노원, 도봉산 밑, 용산은 부적절하니 청와대 쪽에 남경을 세울 것을 건의한 것이다. 윤관 등이 용산처로 호칭한 것은 이곳이 향·소·부곡 같은 특수 행정구역이었기 때문이다.

윤관 등이 말한 '용산은 부적절하다'는 의미는 남경 중심부로 부적절하다거나 남경 궁궐 부지로 부적절하다는 의미였던 듯하다. 숙종세가에 따르면, 1102년에 남경의 구역 범위를 결정할 때 용산이 남경의 남쪽 끝으로 설정됐다. 용산이 남경의 중심부는 아니지만 남경의 울타리 안으로는 포함됐던 것이다.

그렇게 남경에 포함되긴 했지만 조선시대 들어서는 용산의 의미가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남대문 바깥에 놓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치적·행정적 위상이 이전보다 낮아졌다. 하지만, 국가재정 상의 의미는 그렇지 않았다. 조선왕조는 한성부와 한강을 잇는 이곳에 군수품 관청인 군자감의 창고를 설치했다.

그런 의미에 더해, 조선 후기인 19세기에는 군사적 의미가 크게 부각되면서 재정적 의미와 겹쳐졌다. 군인 급료의 부실 지급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1876년 강화도조약 및 시장개방에 대한 저항으로 촉발된 1882년 임오군란을 청나라 군대가 진압한 뒤로 '군사+재정'의 의미가 강해졌다.

청나라 군대는 남대문 남쪽인 용산에 주한청군기지를 세우고 이곳을 근거지로 도성을 위협했다. 민란을 진압해주겠다며 인천에 상륙해 용산까지 들어온 이 군대는 거점을 이곳에 두고 1894년까지 내정간섭을 실시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용산은 외국군 주둔 기지의 성격을 갖게 됐다. 1904년 이래로 일본도 똑같은 장소에서 주한일군기지를 운영했다. 한성부와 한강의 길목을 차단하고 도성을 압박할 수 있는 용산의 지리적 의미를 일본도 활용했던 것이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만리창으로 상륙한 일본군. 청일전쟁 수행기간 동안 용산은 일제의 조선강압 및 전쟁수행과 후방 물자수탈기지로 활용되었다. ⓒ 서울역사아카이브

 
"왕기가 서린 곳"

한편, 용산은 종교적 의미도 강했다. 지명 자체가 그런 분위기를 농후하게 풍겼다. 여타 지역의 용산 지명이 가진 의미가 여기에도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 시조 고주몽이 묻힌 곳도 용산이다. 고구려 땅에도 이 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편은 "왕이 승하하니 이때 나이가 40세였다"며 "용산에 묻고 동명성왕이라고 불렀다"고 알려준다.

충북 충주시에도 용산동이 있다. 역사학자 이은식은 <지명이 품은 한국사> '다섯 번째 이야기 2'에서 "충주시 용산 언덕 남쪽으로 작은 연못이 하나 있었다"며 "사람들은 그 연못을 신령스럽게 생각하여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주민들이 신성시한 이유와 관련하여 "어느 술사가 용산의 연못에는 용이 사는데 그 용이 승천하면 마을이 번창하고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전설이 전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용산은 용이 승천하는 곳이라는 전설이 주민들의 종교적 경외감을 낳았음을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그곳에서는 '용산은 왕기(王氣)가 서린 곳'이라는 믿음이 존재했다. 이 믿음은 구체적인 신앙 행위로 이어졌다. 위 책은 "용의 승천을 한 마음으로 기원하던 용산동 주민들은 승천한 용이 마을의 번영을 가져다주리라고 굳게 믿었으므로 기도를 계속했다"며 "용을 위한 승천제는 끊이지 않고 이어지다가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었다"고 한 뒤 "1995년 충주시와 군의 통합을 기념하는 거룡승천제가 거행되었다"고 설명한다.

서울 용산 지명에도 비슷한 의미가 담겨 있다. 송호열 서원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가 쓴 <한국의 지명 변천>은 서울 용산 역시 용 숭배 사상과 관련된 지명임을 알려준다.
 
<증보문헌비고>에서는 백제 때 한강에 두 용이 난다고 해서 용산이라고 하였다고 하며,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양화나루 동쪽 언덕의 산형이 용이 서리어 있는 형국(용두봉)이라 한 데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일본제국주의 때도 종교적 의미가 용산에 부여됐다. 일본제국주의가 이곳에 야스쿠니신사 분사를 세웠던 것이다. 경성호국신사가 세워진 곳이 바로 용산이다.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이 쓴 <용산, 빼앗긴 이방인들의 땅> 제1권은 "서울 용산구 용산고등학교의 인근에 자리한 우리은행 후암동지점 앞 삼거리에서 남동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면 이내 산비탈을 타고 길게 이어진 돌계단을 마주하게 된다"고 한 뒤 "108하늘계단이라는 고운 이름이 붙어 있지만, 이 계단의 정체는 사실 일제 패망기에 조성된 경성호국신사의 표참도이다"라고 설명한다.

이 책은 1942년 7월 24일자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를 인용해 야스쿠니신사에 직접 참배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경성호국신사를 세웠으며, 조선에 주소지를 둔 전사자, 조선에서 근무했거나 조선에서 전투한 전사자들의 위패가 이곳에 안치됐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용산은 우리 역사에서 다채로운 의미를 가진 지역이다. 이런 곳이 청와대 이전 문제로 인해 또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됐다. 용산의 운명이 어떻게 전개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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