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2.24 20:44최종 업데이트 22.02.24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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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비평연재 <좋은데, 싫었습니다>(좋싫)는 주류의 담론에 대항하는 저항의 언어조차 어쩌면 '당위'라는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지 질문합니다. 그저 이것'만'이 옳고, 이것은 '반드시' 좋아해야 하고, 그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대해야 한다는 절대적이고 당위적인 언어들이 정말로 대안과 저항의 언어가 될 수 있는지 묻습니다.[편집자말]

영화 <만신>의 한 장면 ⓒ (주)엣나인필름

 
하지만 사람이 죽고 사는 일, 삶을 이어가는 것이 평화로운 일만은 아니다. 오히려 삶은 적나라한 고통이고, 그것을 이겨내는 단단한 마음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더 많다. 무속은 굽이굽이 곡절 많고 시련 많은 인간사를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의지가 되는 종교일 것이다.
- <비단꽃 넘세>(김금화 저, 생각의나무 발행)
 
'나라 만신'이라고 불리던 김금화 선생은 생전 자신의 자서전에서 무당의 일을 적나라한 고통과 시련에도 질기게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오지랖'이라고 말했다. 무당의 일이란 사람들의 한을 함께 짊어지고 복을 같이 나누는 일이라는 것. 이 같은 선생의 이야기에 가톨릭 수녀들은 "복이 든 술잔과 떡을 나누는 굿은 성당의 미사와 비슷하다"라고도 했다. 그래서일까 선생은 이탈리아 로마대학에서 교황이 좋은 곳으로 가길 바라며 진혼굿을 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뭇 민족들의 왕들은 백성들 위에 군림한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은인으로 행세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지 않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하고, 또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
- 누가복음 22:25-26
 
예수께서는 언제나 병들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계셨다. 예수께선 죄인과 농군과 어린아이와 병든 이들을 가장 가까이하셨다. 그들 곁에 있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가르치셨고 그들의 일상과 고통과 기쁨 모든 것에서 그의 아버지의 가르침을 발견하고 전하셨다.

적나라한 고통을 위로하는 일, 고통받고 병든 이들과 이야기하는 일. 김금화 선생의 삶에서도, 예수의 가르침에서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은 그런 것이다. 우리의 삶이 조금은 더 행복해질 수 있길 바라는 일.

종교의 본질과 정치의 본질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질문을 던지고, 함께 답을 찾고, 이 과정에서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로하고, 함께 답을 찾은 기쁨이나 여전히 받는 고통을 나누기 위해 떡과 술을 나누는 일을 종교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 사회가 더 좋아지기 위한 정책은 무엇인지 질문하고, 공동체가 함께 그 질문의 답을 토론하고, 이 공동체의 더 많은 구성원이 조금이라도 더 풍족할 수 있도록 재화를 분배하고, 그 분배의 효율을 최대화하고 그 고통을 최소화하는 효율을 만들어 내는 일. 이건 정치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의 발전, 개인의 행복 추구, 나눔과 연대라는 의미에서 종교의 본질과 정치의 본질은 사실 같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질문이 무엇일지 찾아가는 탐구의 과정.

먼 옛날, 제정일치 사회가 가능했던 것은 대중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지식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단 같은 본질로 작동하는 두 '도구'를 구분하여 사회에 적용할 만큼은 체계가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실제로 종교는 지금이라면 '시민을 위해' 정치가 해야 할 일들을 '대중을 위해' 해왔다. 일주일에 하루는 무조건 쉬어야 한다고, 그것은 신분과 성별에 상관이 없어야 한다고 말하기 위해 '주일'이 생겨났을 것이다. 신분제의 어리석음을 가르치고자 부처는 노예 출신의 제자들을 왕족 출신의 제자들보다 먼저 받아들였다.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어야 하는 것은 그 본질이 다르기 때문이나, 종교가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이어서가 아니라 그 수단과 언어의 상이에서 오는 '오해의 악용'을 막는 것에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를테면 무절제한 생활을 하지 말라고 가르친 것을 '동성애 하지 말라'고 이해하여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일을 경계하는 것.

문제는 그게 아니라니까 

어느 후보가 무당과 친하네 어쩌네, 어느 후보는 무당이 아예 선대위에 공식 직함이 있네 저쩌네 한다. 중요한 것은 손바닥에 글씨를 썼다는 것도, 무슨무슨 법사에게 조언을 구했다는 것도, 이따금 무당에게 가서 점을 봤다는 것도 아니다. 교회나 절에서 영생이나 극락을 기도하는 일이나 조상 신에게 복을 기원하는 것이나 다를 것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조언을 받고 어떤 신앙을 지녔느냐가 아니라 거기서 무엇을 배워서 어떤 정치를 하느냐다.

주요 종단의 이른바 '종교 지도자'라고 불리는 이들은 이따금 대통령이나 정치인들 같은 이른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만나 사회적 이슈에 말을 얹는다. 많은 경우 좋은 이야기, 사회에 보탬이 되는 가르침이다. 종교계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종교 지도자들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헛소리'를 늘어놓기도 한다. 이른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이 좋은 가르침의 영향력과 헛소리의 파급력을 취사해 자기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이데올로그로 사용한다.

보수 개신교계의 지지를 얻기 위해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일, 대형 교회의 부동산 투기와 재산 증식을 보조하는 일, 종교계를 위해 조세 제도에 구멍을 내는 일, 종교의 자유를 운운하며 방역에 해악을 끼치는 일까지. 이런 해악을 방지하는 것이 종교와 정치를 분리해야 한다는 헌법적 원칙의 의미다.
 

공식 선거운동 첫 날 유세에 나선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15일 오후 대구 동구 동대구역 광장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데 한 시민이 '무속 중독'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무속 신앙을 가졌다고 대선 후보를 비판하기 위해서는(사실 이 비판은 양쪽 후보가 서로를 향해 하고 있어서 어느 쪽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무속 신앙의 비윤리적이고 불합리한 조언을 받았는지, 그 조언에 따라 비윤리적이고 불합리하게 행동했는지, 그 무속 조언자들이 부당하게 대선 후보의 공무와 정책에 관여했는지 여부다(이 비판도 마찬가지로 그 후보들이 저지른 비윤리와 불합리를 향해야 한다. 그들이 어떤 신앙과 조언자를 지녔는지가 아니라).

지금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지 못해 헌법적 원칙을 파탄내고 종교의 본질을 외면하고 정치를 퇴행시키는 것은 무속인가 아니면 뭇 대중들의 존경과 사랑을 바탕으로 전횡을 일삼는 기존의 거대 종단들과 정치인들인가.

비판하고 질타할 것들이 차고 넘친다

'역대급 망작'인 이번 대선에는 고작 후보자의 신앙생활(실제로 믿는지 어떤지 여부도 판단하기 어려운, 판단해봐야 뭐 어쩔 것도 없는)보다 더 시급히 비판해야 할 것들이 차고 넘친다.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일, 고달픈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할 시간도 아깝다"라고 한 일, 공적인 자리에서 거짓말을 일삼는 일, 1주일에 120시간씩 일하지만 최저임금은 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일. 이뿐인가. 기후·젠더·노동·인권 어느 하나에도 마땅한 비전을 제시하지 않으며 공동체의 복원에도, 인간다운 삶으로의 진전에도 아무런 답을 하지 않는 일.

사실 대통령은 고작 직업인이다. 5년짜리 기간제. 막중한 권한과 임무를 지녔기에 그 선택에 신중해야 하지만 그가 '개인'인 것은 변함이 없다. 그는 개인이기에 어떤 신앙을 지녀도 상관없지만 그는 대통령이기에 그가 어떤 판단을 하고 어떤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날을 세워야 한다. 지금 '무속' 논쟁은 '개인'을 향하고 있는가 '대통령'을 향하고 있는가. 하등 쓸데없는 소리를 하느라 정작 봐야 하고 말해야 할 것을 놓치고 있진 않을까. 그 쓸모없는 소릴하며 보낸 시간의 수혜는 누가 가져갈까. 이 논쟁을 정치적 이득으로 환원하는 이데올로그로 만드는 이. 어쩌면 그것이 진짜 제정일치의 사회일지도 모른다.
  

왼쪽부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 ⓒ 오마이뉴스

 
김금화 선생의 삶을 다룬 영화 <만신>에는 김금화 선생이 신내림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마을의 새 만신이 들어서는 행사인 '쇠걸립'은 집집마다 쓰지 않는 죽은 쇠를 모아 무구를 만들어 산 쇠를 만드는 과정이다. 마을의 만신이란 공동체의 어려움(죽은 쇠)을 찾아내 새로운 삶의 희망(산 쇠)을 만드는 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영화는 이 쇠걸립 시퀀스를 가장 마지막에 배치하며 무속이란, 실은 무속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와 소통하며 함께 사는 일이란, 경계를 넘나들어 공동체를 이뤄내고 그 고통과 기쁨을 나누는 일이라고 말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쇠를 얻으러 다니는 어린 넘세(김새론 분)에게 "큰 무당이 돼라"며 쇠를 건네는 건 극 중 어린 넘세가 살던 마을 주민을 연기한 배우였다. 극 중 배역으로서가 아니라 연기한 배우로서 쇠걸립에 쇠를 내놓는 것. 이어 나이 든 김금화를 연기한 류현경·문소리 배우도 극 중 김금화로 분한 모습이 아니라 촬영장에 온 배우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카메라와 마이크를 든 스태프들 그리고 마침내는 그를 지켜보는 진짜 김금화까지 어린 넘세에게 쇠를 건넨다. 극의 안과 밖의 경계가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는 축원'에 의해 무너지는 모양이다. 

시간과 공간은 물론 극의 안과 밖,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까지 모두를 넘나드는 장면은 종교든 정치든, 그 무엇이든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본질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그 본질의 이름 따위 뭐가 중요할까. 무당이든 예수든 대통령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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