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2.09 13:32최종 업데이트 22.02.09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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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기자말]
이번 대통령 선거는 참으로 희한하다는 얘기가 무성하다. 비호감 대선, 혐오 대선, 네거티브 대선, 정책 실종 대선, 리스크 대선, 역주행 대선 등등. 여기에 한 가지 더 보탠다면 노동 없는 대선?!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선거는 모처럼 '정책의 창'이 활짝 열리는 기회다. 후보들이 수많은 선거 공약을 쏟아내며 열띤 경쟁을 하는 가운데 국민의 관심사로 떠오르는 이슈가 차기 정부의 주요 정책 과제로 선정되기 때문이다. 지난 19대 대선에서는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 대책, 노동시간 단축, 그리고 일자리 창출 등이 유력 후보들의 주요 선거 공약으로 부각됐으며, 결국 문재인 정부의 국정 과제에 포함됐다.

2021년 12월 현재 일하는 국민은 봉급쟁이(임금노동자) 기준 2087만 명, 취업자 기준 2729만 명에 달한다. 그런데 '노동'이 찬밥 신세로 취급되고 있으니 희한할 수밖에.

대신 유력 후보들은 '나라 경제를 우상향으로 성장시키겠다', '2%대의 잠재성장률을 더블(4%대)로 높이겠다' 그리고 '5대 경제강국을 이루겠다'는 등 분홍빛 약속을 쏟아낸다. 물론 우리 경제의 성장 동력을 잘 살려내야 국내총생산(GDP)과 일자리 기회가 늘어날 테니 틀린 얘기는 아닐 듯하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이번 대선 후보들은 경제 성장의 분홍빛 약속을 쏟아내면서도 ‘노동’은 찬밥 취급하고 있다. ⓒ 셔터스톡

 
경제 선진국, 노동 후진국
 
우리나라는 10대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여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같은 국제기구들이 인정하는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오랜 세월 선망과 추격의 대상이었던 일본 등 여러 선진국을 추월했거나 거의 따라잡아서 이제는 부러움과 경계의 대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눈부신 경제 기적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개발과 성장의 이면에는 늘 일하는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이 밑거름 되어 왔고, 지금의 경제선진국을 떠받치는 노동자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고 위태롭기만 하다. 또한 경제 선진화의 과실이 일부 사람들에게만 쏠리는 분배 구조가 확고히 자리 잡으면서, 일하는 사람 다수는 정당한 몫을 나눠 받지 못한 채 불안정 노동의 늪에 허덕이고 있다.

가위눌린 민생 경제와 후진적 노동 현실을 배경 삼아 펼쳐지고 있는 2022년의 대선판에서 경제 강국과 선진화를 외쳐대는 대통령 후보들의 화려한 공약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와닿을지 모르겠다. 혹시 공허하고 요란한 '남의 잔치'로 비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우리나라 노동의 현실이 과연 얼마나 후진적인지 한번 팩트체크 해보자.

여전한 산재공화국
 
2015∼2020년 우리나라에서는 연평균 1961명의 노동자가 산업 재해로 목숨을 잃었다. 하루 평균 7∼8명의 노동자가 일하다 숨진다는 말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추락·끼임·충돌·질식·교통사고 등 후진적 산재 사고로 목숨을 잃는 노동자의 수가 지금도 1년에 800명을 훌쩍 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보면 산재공화국의 후진적 면모가 잘 드러난다. 우리나라는 2014∼2020년 평균 노동자 10만 명 당 산재사고 사망률이 5.1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멕시코와 터키 다음으로 높은 수준이고 OECD 평균(3.0)에 비해 무려 70% 높다.  
 

노동자 10만 명 당 산재사고 사망률(2014-2020년 평균) 자료: ILOSTAT, Statistics on safety and health at work (https://ilostat.ilo.org/topics/ safety-and-health-at-work/) ⓒ ILOSTAT

 
장시간 노동사회

대한민국이 오랫동안 OECD 안에서 가장 일 많이 하는 나라의 하나로 자리매김해온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2010년대 초반에 연 2100시간을 초과했던 근로시간이 문재인 정부의 주 52시간제와 코로나19 덕분에 2020년에 1908시간으로 줄어들긴 했다. 하지만 여전히 장시간 노동 사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연간 노동시간이 OECD 평균인 1687시간보다 221시간 길어 거의 한 달 반(5.5주)을 더 일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 노동자들은 산업 재해와 과로 질환의 위험에 더 쉽게 노출되고 있다. 노동생산성 또한 OECD 하위권에 속해 나라 경제와 기업 경영에도 결코 유익하지 않을 것이다. 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일하는 사람들은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하고, 일자리 독점으로 취업난이 가중된다. 이래저래 장시간 노동의 일중독 사회는 대한민국의 또 다른 후진적 단면임이 틀림없다.
 

주52시간제와 코로나19로 근로시간이 많이 줄어다고 하지만 여전히 장시간 노동사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셔터스톡

 
노동법 사각지대

우리나라에는 일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많은 노동관계법령이 제정되어 있다. 하지만 노동법의 보호 밖에 놓인 노동자의 수도 무척 많다.

우선 5인 미만 사업장에 소속된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의 일부 조항이 적용되지 않으며 직장괴롭힘·대체휴일·중대재해처벌과 관련한 노동관계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이같은 제도적 사각지대를 악용하여 사업체 규모를 쪼개는 가짜 5인 미만 사업장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더하여 새로운 취업 형태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는 특수고용·프리랜서·플랫폼 노동자들은(실제 이들의 다수는 종속된 노동 조건에서 일하고 있지만) 고용된 신분이 아니라 독립 계약자라는 이유로 노동관계법의 보호에서 아예 배제되고 있다.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와 '독립' 계약자의 수를 합치면 대략 790만∼840만 명에 이른다. 임금 노동자의 약 40% 그리고 취업자의 약 30%에 달한다.

코로나19 질병재난은 특수고용·프리랜서·플랫폼 노동의 종속적 사업자뿐 아니라 영세 자영업자들에게 폐업과 실직의 크나큰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비임금 노동자들의 고용보험 및 산재보험 사각지대에 대한 정책적 공론화가 이뤄진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고용노동부에는 노동관계법의 집행을 감독하는 특별사법경찰, 즉 근로감독관들이 근무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근로감독관의 수를 2016년 1694명에서 2021년 10월 3122명으로 거의 두 배 가까이 늘렸다. 그럼에도 임금체불액은 2016년 1조 4300억 원에서 2020년 1조 5800억 원으로 늘어났다.

2021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퇴직금·시간외수당·유급휴가의 법정 기준을 보장받지 못하는 노동자 비율이 26.8∼50.0%에 달했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 중 60∼70%는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못해 '비정규직에게는 노동법이 없다'라는 탄식이 나온다. 이처럼 구멍 난 제도와 부실한 감독행정으로 인해 상당수의 노동자, 특히 취약 노동자들이 노동관계법 및 노동 안전망의 보호로부터 여전히 배제되고 있다.

벌어지는 노동 소득 격차

지난 1990년대 이래 우리나라에서는 노동 소득의 격차가 크게 확대되어 왔다. 1990~2020년 30년 동안 상위 10%의 노동소득 비중은 34.1%에서 46.5%로 12.4%P 증가한 반면, 중간 40%와 하위 50%의 노동소득은 각각 6.9%P(44.4% → 37.5%), 5.4%P(21.4% → 16.0%) 감소했다.

우리나라 노동 소득 격차는 2010년대 들어 다소 완화되는 조짐을 보이기도 했으나, 지난 30년의 추세를 살펴보면 미국·일본·독일·스웨덴 등 주요 선진국들에 비해 현재 수준이나 그 변동 폭이 심각하다. 또한 노동시장의 대표적인 분절선으로 손꼽히는 성별(남-녀)·고용형태(정규-비정규)·기업규모(대기업-중소기업)에 따른 임금 격차에서도 우리나라가 대부분의 OECD 회원국들에 비해 심각한 불평등 상태에 놓여 있다.

문재인 정부 4년 동안 노동조합 조직률 및 조합원 수는 2016년 10.3%(196만 명)에서 2020년 14.2%(280만 명)로 꾸준히 상승했다. 하지만 노조의 단체교섭이 현행 제도와 관행 때문에 조합원의 권익 개선에만 맞춰지다 보니 노조 없는 일터의 노동자들은 단체교섭의 성과를 전혀 공유할 수 없다. 그 결과 대기업·공공기관 정규직 중심의 유노조 노동자들과 중소기업 비정규직의 무노조 노동자들 사이에는 임금과 근로조건의 격차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노동조합은 '제 욕심만 채우는 기득권 집단'이라는 낙인을 피하기 어려워지기도 한다.  
 

노동 소득 분배 구조의 변동 추이에 대한 주요 국가 비교 (1990∼2020년) 자료: World Inequality Database (https://wid.world/data/) ⓒ World Inequality Database

 
아울러 대전환 시대의 다중 위기가 취약 노동자 집단을 더욱 위태롭게 할까 우려된다. 탄소 중립 에너지 전환, 디지털 전환, 포스트 코로나, 저출산 고령화 등으로 인해 차기 정부에서 산업·부문별 구조 개편과 고용 조정을 동시에 전개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양질의 일자리가 소멸하고 일부 업종·부문·지역에서 고용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우리나라가 거둔 경제 선진화의 눈부신 성공 이면에 후진적인 노동현실이 자리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곰곰이 살펴봤다. 이에 더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또다른 위기를 안겨줄 수 있는 대전환의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음을 언뜻 전망해봤다.

그렇다면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는 대한민국의 후진적 노동 문제를 확실히 뜯어고치고, 대전환 시대의 일자리 위기를 극복해줄 수 있는 국가 리더십이 응당 선출돼야 하지 않을까? 노동을 후진의 덫에서 건져내야 경제도 더욱 선진화해 나갈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여 노동도 존중할 줄 아는 대통령이 선택돼야 하지 않을까? 또한 대전환의 경제·산업·노동 위기를 잘 극복해내기 위해 효과적인 정책 대안을 강구하고 사회·정치 대타협을 이끌어갈 줄 아는 유능한 정부가 꾸려져야 하지 않을까? 선진 경제에 한참 뒤처진 후진 노동을 치켜세우는 일을 차기 정권의 핵심 국정과제로 삼아 노동 존중의 개혁을 힘 있게 추진하려는 비전과 실력을 갖춘 집권 세력이 등장해야 하지 않을까?

후진적 노동 현실을 뜯어고치는 일은 더 이상 미루거나 외면할 수 없는 시대적 개혁 과제다. 여러 후보들의 공약인 우리 경제의 선진화 도약을 뒷받침하는 노동의 협조와 헌신을 얻어내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민생 경제를 진짜 책임지는 대통령이 되려 한다면 노동 후진국을 신명 나게 일할 수 있는 나라로 탈바꿈하려는 개혁 비전과 정책 대안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른 봄 3월 9일이 국민들의 생명 안전과 일·생활 균형을 보장해주고, 노동법과 노동안전망의 사각 지대를 없애주며, 불합리한 격차와 부당한 차별이 없는 공정한 노동 시장을 만들어줄 대통령을 뽑는 투표일이 되기를 소망한다.

5월 9일에는 새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존중받는 노동이 경제 선진화의 힘찬 도약을 뒷받침하며 경제와 노동이 어깨 걸고 함께 나아가는 새 시대가 개막되길 고대한다. 차기 정부에서는 후진적 노동 현실의 개혁이 노사 간에, 보수-진보 진영 간에 소모적인 이해 다툼과 입장 대립으로 허송세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필자 소개: 이 글을 쓴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재)공공상생연대기금 이사장으로 <소셜 코리아> 고문을 맡고 있습니다.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경사노위 공공기관위원회·플랫폼노동 사회적 대화포럼 등의 위원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최근의 연구주제는 불안정노동과 노동정책입니다. 저서로는 <노동자 연대>, <사장님도 아니야, 노동자도 아니야> 등이 있습니다.
 

ⓒ (재)공공상생연대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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