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26 06:05최종 업데이트 22.01.26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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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출마한 마지막 선거는 1978년 7월 6일 대통령 선거다. 이 선거는 '도사'가 사실상의 선거 운동을 진두지휘했다는 점에서도 특기할 만하다. 영(靈)의 세계와 속(俗)의 세계가 함께 뛴 선거였던 셈이다.

경쟁자 없이 단독으로 출마한 박정희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거행된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통대) 제1차 회의에서 6년 임기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대중과 재야와 야권은 박정희 독재에 신음하고 있었지만, 제도권 언론들은 마치 구세주의 재림을 찬미하듯 그의 다섯 번째 당선을 찬양했다.

그날 발행된 <경향신문> '국민과 호흡 함께하는 민족적 지도자 제9대 당선된 박정희 대통령'은 기사 첫머리에서 "민족중흥의 기수이며 구국의 지도자로서 다시 등장한 박정희 대통령"이라며 그의 5선을 축하했다. 같은 날 발행된 <매일경제> 톱기사는 통대 제1차 회의 때의 대통령 선거 투표를 보도하면서 "박정희 후보를 거의 만장일치로 선출했다"라고 전했다. 실질적으로는 득표율 100%였다. "거의 만장일치"라고 한 것은, 재적 대의원 2581명 중 2578명이 참석한 가운데 2577명이 박정희를 찍고 나머지 1표가 무효가 됐기 때문이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식이 1978년 12월 27일 장충문화체육관에서 거행되었다. 약 3000여 명의 각계 인사가 취임식에 참석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딸 박근혜와 함께 취임식에 참석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 대통령 기록관

 
단독 출마해 "거의 만장일치"로 요식 행위를 밟은 박정희는 12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취임식을 했다. 이날 발행된 <매일경제> 7면 기사는 "겨레의 환희와 바람이 차분하게 내린 가랑비에 섞여 온누리를 적셨다", "시민들은 임시 공휴일로 지정된 이 민족의 경축일을 가족과 함께 마음껏 즐겼으며 전국 방방곡곡은 축제 분위기에 젖었다"라고 한 뒤 "박 대통령의 입장과 함께 1백 8명으로 구성된 국립교향악단의 <대통령 찬가>가 울려퍼졌으며"라고 보도했다.

시인 박목월이 작사하고 친일파 김성태가 작곡한 <대통령 찬가>는 "어질고 성실한 우리 겨레의/ 찬란한 아침과 편안한 밤의/ 자유와 평화의 복지 낙원을/ 이루려는 높은 뜻을 펴게 하소서/ 아아아 대한 대한 우리 대통령/ 길이 빛나리라 길이길이 빛나리라"라는 1절 가사를 담고 있다. 박정희를 지상낙원을 건설할 메시아처럼 추앙하는 찬양가였던 것이다.


이렇게 칭송을 받던 이 시기, 박 정권은 근본에서부터 허물어지고 있다.

외형은 굳건해 보였지만

박 정권은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을 봉쇄하고자 1974년 1월 8일부터 1975년 5월 13일까지 총 9건의 긴급조치를 발표했다. 그리고 4년 반 동안의 긴급조치 제9호 하에서 800여 명을 구속했다. 하지만 국민들의 민주화 투쟁을 봉쇄하는 데는 실패했다. 개헌 논의를 금지하고자 영장 없는 체포까지 예고했지만, 대학가를 중심으로 대규모 반 정부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일반 국민들도 반 유신 투쟁에 동조했다. 이 점은 1978년 대선 5개월 뒤인 그해 12월 12일 제10대 총선에서 증명됐다. 국회 의석 231석 중에서 유신정우회(유정회)가 77석, 민주공화당이 68석, 신민당이 61석, 민주통일당이 3석, 무소속이 22석을 가져간 총선이었다.

대통령이 추천한 후보들을 놓고 통대가 선출한 국회의원들은 유정회라는 교섭단체를 구성했다. 사실상 박정희가 임명한 의원들은 유정회로 묶였던 것이다. 유정회를 제외한 직선 의원들만 놓고 보면, 공화당이 68석으로 신민당보다 7석 많았다.

하지만 투표율에서는 신민당이 앞섰다. 그해 12월 14일 자 <경향신문> 1면 좌단은 "신민당이 공화당보다 1.1%를 앞섰다"라고 보도했다. 민심의 향방을 보여주는 지표라 할 만했다.

국민들이 박 정권보다 야당에 더 많은 지지를 보냈는데도, 공화당 68석에 유정회 77석이 더해져 박 정권이 국회를 압도적으로 장악하는 형국이 조성됐다. 그보다 앞선 7월 대선에서는 박 정권이 "거의 만장일치"로 승리했다. 정권 기반이 허물어지고 있는데도 외형상으로는 굳건해 보였던 것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도사

박 정권이 속으로 썩어 들어가는 상황에서, 이 정권의 외형적 번영을 위해 뛰어다닌 종교인이 있다. 서두에 언급한 '도사'가 바로 그다.

이 도사는 박정희의 1978년 대선 승리를 위해 뛰어다녔다. 1973년 5월 13일 자 <대전일보> 광고란에 실린 홍보 팸플릿에 따르면 불교·기독교·천도교를 두루 섭렵한 것 같지만, 실상은 무속인에 가까웠던 최태민이 바로 그다.
  

최태민이 1973년 5월 13일 자 <대전일보>에 낸 광고 ⓒ 대전일보

 
최태민의 의붓아들이자 박근혜의 재산관리인인 조순제를 아버지로 둔 조용래씨가 아버지에게 들은 내용을 토대로 집필한 <또 하나의 가족 - 최태민, 임선이 그리고 박근혜>에 따르면, 최태민은 어머니 육영수를 잃은 박근혜에게 접근할 때 육영수의 혼이 자신에게 빙의된 것처럼 행동했다.

박 정권 때 운동권 학생이었고 2012년에 <태자마마와 유신공주>를 펴낸 재미교포 김수길씨가 쓴 <최순실 언니 박근혜>라는 책에 "2007년 대선 경선 당시 버시바우 주한미국대사가 본국에 보낸 비밀 문건에서 '죽은 최태민이 박근혜의 몸과 영혼을 완전히 통제했으며 그 결과로 최태민의 자녀들이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고 보고했다"는 대목이 들어 있다.

그런 소문까지 났을 정도로 박근혜를 사로잡은 최태민은 박근혜와 함께 1978년 선거운동에 참여했다. 이를 위해 최태민은 대한구국봉사단·대한구국선교단·새마음갖기국민운동본부 같은 단체들을 활용했다.

1978년 대선은 투표일 닷새 전인 7월 1일에 선거 공고가 났다. 거기다가 박정희가 단독 출마했기 때문에 대선 자체는 긴장감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 투표권을 가진 통대 대의원을 뽑는 선거가 4월 29일 공고 되고 5월 18일 실시됐기 때문에, 대선 분위기가 4월 하순부터 7월 초까지 2개월 이상 유지됐다고 볼 수 있다.

이 기간에 최태민이 박근혜를 앞세워서 벌인 사실상의 선거 운동을 당시의 신문 기사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6월 2일 자 <경향신문> 7면은 "대통령 영애 박근혜 양은 1일 하오 서울 구로동의 한국수출산업공단 공설운동장에서 거행된 공단 새마음갖기결의 실천대회 및 새마음직장봉사대 결단대회에 참석, 여자 종원업들과 업계 대표들을 격려했다"라고 보도했다.

이날 박근혜는 대한구국봉사단 총재 자격으로 격려사를 했다. 대선을 앞둔 시점에 최태민과 함께 새마음갖기 결의대회를 열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는 이런 결의대회가 전국적으로 거행됐다. 박근혜 없이 열리는 결의대회도 많았다. 개중에는 금품이 제공되는 행사들도 있었다. 5월 31일 자 <경향신문> 6면은 "구국여성봉사단 구로4동지회 산하 봉사단원들은 30일 구로4동 노인회관을 방문, 대형 선풍기 1대를 기증하고 경향신문 구로보급소 배달소년들에게 운동화 40켤레, 공책 2백여 권을 전달, 격려했다"라고 보도했다.

이런 활동들이 선거 운동이 아니냐는 문제제기도 있었다. 하지만 대선 2개월 뒤인 9월 29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법 위반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해석을 내렸다. 다음 날 발행된 <경향신문> 1면 중앙 기사는 "구국여성봉사단이 벌이는 새마음갖기결의 실천대회는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없다고 해석했다"라는 선관위 결정을 보도했다.
  

1975년 6월 21일 서울 배재고등학교에서 열린 한국 구국십자군 창군식에 박근혜 당시 영부인 대행과 최태민(왼쪽)씨가 참석해 있다. ⓒ 연합뉴스

 
'도사 최태민'은 박근혜와 함께 사실상의 대선 운동에 뛰어들었다. 선관위는 문제없다는 결정을 내렸지만, 통대 선거와 대선이 진행되는 시기에 '새마음 갖기 결의대회'라는 명목 하에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고 금품을 살포했다. 박 정권의 영구집권을 위해 나름대로 분투했던 것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사람은 진짜 도사로 평가받지 못한다. 최태민은 박정희 영구집권을 위해 분투했지만, 그 정권은 바로 그다음 해에 무너졌다. 진짜 도사였나 하는 생각을 품게 할 만한 일이다.

선거 운동의 또 다른 목적 

박 정권이 위태하다는 점은 이 정권이 정상적 절차에 따라 운영되지 않았다는 점, 국민적 저항이 심했다는 점에서도 어느 정도 예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도사 최태민'은 박 정권을 위해 열심히 뛰었다. 여기는 그 나름의 목적도 있었다.

1977년 2월 16일 자 <동아일보> 6면에 최태민이 새마음갖기운동을 벌이는 취지가 소개돼 있다. 이 기사는 "지난 1월 발족한 새마음갖기국민운동본부의 최태민 본부장(대한구국봉사단 총재)은 '물질만능사상으로 메말라버린 사회를 인본주의 사상으로 순화시키는 것이 이 운동의 목적'이라면서 이 같은 가두 캠페인을 앞으로 주례 행사로 실시, 국민 저변에 새마음갖기 인식을 심어나가겠다고 말했다"라고 보도했다.

정신 문명을 개조하고자 새마음갖기운동을 벌인다는 발언은 이 운동 배후의 정치적 의도를 은폐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는 종교인인 최태민 자신의 희망사항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힘 있는 교주가 되고자 했던 그의 의식적 지향을 감안하면, 박 정권을 돕는 새마음갖기운동을 통해 자신의 종교 세계도 확장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박정희가 아니라 최태민 자신의 일을 했던 것이다.

'딴마음'을 품은 '도사 최태민'이 박정희의 마지막 선거에서 중요 역할을 수행했으니, 이래저래 박 정권의 말년 운명은 참 위태위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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