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08 18:27최종 업데이트 22.01.08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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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을 앞둔 보수정당의 내부 분열이 매우 심각했던 사례로 1992년 민주자유당(민자당)을 들 수 있다. 민자당의 분열이 어찌나 심각했던지, 민주당 김대중의 당선에 대한 기대감이 자연스레 높아졌을 정도다.

그해 5월 27일 자 <경향신문> 3면 사설은 "김 후보는 근래에 여러 차례 야당 집권의 유리한 여건이 조성됐다고 말한다"며 "이것은 집권여당의 거듭된 실정과 당내 혼란을 근거로 삼은 듯하다"고 한 뒤 "그러나 민자당 실점(失點)과 분열의 반사이익만을 노리는 제1야당의 후보가 돼서는 안 된다"고 주문했다.


민자당 분열은 대통령 후보 선출 과정에서 집중적으로 부각됐다. 그해 5월 19일 민자당은 어느 정도 형식적이기는 했지만 사상 최초로 자유경선을 실시했다. 김대중이 이끄는 민주당은 일주일 뒤에 경선을 치렀다. 3월 24일 실시된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31석을 획득하며 제3당이 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국민당은 경선 없이 기립투표로 후보를 결정했다. 이 방면에서는 민자당이 빨랐던 것이다.

이종찬의 흔들기

1987년 6월항쟁과 1988년 총선 참패로 위기를 겪은 보수 진영은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민자당을 탄생시키는 방법으로 탈출구를 모색했다. 민자당은 전두환 정권 출신인 민정계가 다수를 점하긴 했지만, 박정희 정권 출신인 공화계와 정통 야당 출신인 민주계가 한 지붕 세 가족을 이룬 정당이었다. 보수정당이 종전처럼 일사불란하게 후보를 선출하지 못하고 자유경선을 도입한 데는 이런 구조도 큰 몫을 했다.

경선 5개월 전에 보도된 1991년 12월 26일 자 <조선일보> 3면 기사에 나오는 "민주계의 현 대의원 지분이 24%에 불과하고 민정계 65%, 공화계 11%라는 점을 감안하면"이라는 문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민자당 내에서는 민정계가 절대 우세를 차지했다.

그런데 대중적 인기가 가장 높은 대선주자는 민주계 김영삼이었다. 그래서 민자당이 이기려면 김영삼을 내세우는 게 가장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대의원 투표를 통해서는 그것이 힘들었다. 이 경우에는 박태준이나 이종찬 혹은 '6공 황태자' 박철언 등이 김영삼보다 유리했다.

그래서 김영삼은 보수정당의 '전통적 방식'을 요구했다. 민주화 투사였던 그는 비민주적인 사전 조정을 통해 자신을 후보로 추대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민정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노태우 대통령은 '경선 방식으로 선출하되 김영삼을 내밀히 지원하는 카드'로 김영삼을 설득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보수정당 최초의 자유경선이 정치무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특정 후보를 내밀히 지원했기 때문에 공정성 논란이 촉발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민정계 일부의 불만을 촉발해 당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민정계를 대표해 경선에 나선 이종찬은 전당대회 전날 '경선 거부'를 선언했다. 그러고도 다음날 투표에서 33.2%나 득표하는 의외의 성과를 거둔 그는 곧바로 김영삼 흔들기에 나섰다.

전당대회 11일 뒤인 5월 30일 탈당을 시사한 이종찬은 이미 선출된 후보를 계속해서 공격하다가 8월 17일에야 공식적으로 탈당을 선언했다. 당을 최대한 분열시켜놓은 뒤에 당을 박차고 나간 것이다. 그런 뒤 11월 17일 대의원 5천여 명을 모아놓고 새한국당을 창당했다. 10월 13일 김영삼이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신한국 창조 운동'을 역설한 뒤에 이종찬이 새한국이라는 유사한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노태우의 핵폭탄급 선언

이종찬 발 분열이 끝이 아니었다. 훨씬 더 큰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영삼을 은밀히 지원해 이종찬 발 분열을 촉발했던 노태우가 9월 18일 민자당 탈당을 선언하는 핵폭탄급 사건을 일으켰다. 대통령에 의지해 선거를 치르는 데 익숙했던 보수 집권당으로서는 대단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노태우의 변심은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됐다. 6월 항쟁 이듬해에 취임한 그는 민중혁명 발발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토지공개념 등을 추진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김영삼이 낙선할 경우에 대비해 '보험'에 가입해 두고자 했다. 탈당 선언은 '보험 가입 청약 선언'과 다를 바 없었다. 이 선언을 누구보다 환영한 인물이 김대중이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다분히 김대중의 당선 가능성을 의식한 행보였다.

탈당을 선언한 날 노태우는 중립내각 구성도 선언했다. 제대로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행정부의 선거 중립을 관철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것이 민자당에 일으킨 폭풍의 위력은 작지 않았다. 탈당하겠다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노태우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민자당 김영삼 대표(오른쪽)와 이종찬 의원(왼쪽) 두 대권 경선 후보와 나란히 오찬장으로 가고 있다. 1992.4.27 ⓒ 연합뉴스

 
10월 12일 자 <경향신문> 3면 기사 '탈당 도미노 긴장감 증폭'에도 언급된 것처럼, '탈당 도미노' 현상이 민자당을 휩쓸었다. 이로 인해 최일선에서 선거운동을 해야 할 일선 지구당들이 곳곳에서 마비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김영삼은 이때를 이렇게 토로한다.
 
선거를 두 달 앞두고 이루어진 연쇄 탈당으로 나는 선거 체제를 가동하는 데 커다란 애로를 겪었다. 현역 의원들이 탈당한 지역은 대통령선거까지 지구당 개편대회를 치를 시간적 여유조차 없었고, 결국 공백을 메우기 위해 탈당 지역은 임시체제로 선거대책위원장을 임명해서 선거를 치렀다.
- <김영삼 회고록> 제3권
 
10월 6일 자 <조선일보>에 '김영삼 씨의 홀로서기'라는 기사가 나온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김영삼은 홀로서기를 고민해야 할 정도로 위기 상황으로 내몰렸다.

김영삼이 승리한 결정적인 요인

하지만 결과는 판이하게 나타났다. 그는 12월 18일 대선에서 승리했다. 1987년에 노태우가 얻은 36.64%보다 많은 41.96%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3당 합당 뒤에 대선이 치러진 점을 감안하면 41.96%보다 훨씬 높아야 했지만, 극심한 당내 분열을 겪은 사실을 생각하면 무난한 득표율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민자당의 분열이 극심해 '이번에는 김대중이 될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상승하고 그런 속에서 노태우까지 탈당한 뒤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김영삼이 득표율 1위를 기록한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의원들의 탈당에 맞서 김영삼 측도 의원 영입을 추진해 국회 과반수를 유지한 점, 3당 합당으로 변절자 이미지를 갖게 된 김영삼의 인기가 민정계와의 갈등으로 인해 현저히 개선된 점, 새한국당을 차린 이종찬이 대선 직전에 정주영에게 합류한 데서도 나타나듯이 탈당파들이 제대로 활약을 펼치지 못한 점, 김영삼이 민정계 잔존세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리더십을 발휘한 점 등이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민중혁명에 대한 보수세력의 두려움에 기초한 공안정국이 노재봉 내각(1990년 12월~1991년 5월) 시기에 집중적으로 조장된 뒤였다. 그래서 보수층의 위기감이 매우 높을 때였다. 보수 기득권층이 볼 때 김영삼 외에 대안이 없었다는 점도 그의 당선을 가능케 했던 또 다른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위 요인들에 더해 결정적인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관권선거다. 민정계 일부의 이탈과 대통령의 탈당에도 행정부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5년 전에 제정된 헌법의 제7조 제2항에 규정된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는 조항이 공무원들의 동요를 막는 제도적 장치가 됐다고 볼 수 있다.  

공무원 조직은 여당의 분열에 동요되지 않았고, 집권여당과 행정부의 유착 관계는 계속 유지됐다. 선거 개입에 익숙한 이 당시 공무원 조직의 관권선거는 김영삼의 당선을 추동하는 원동력이 됐다. 공무원의 신분을 보장한 헌법 규정이 그 같은 부조리한 유착관계를 유지하는 역기능을 낳은 것이다. 

대선 뒤의 분석 기사인 12월 31일 자 <한겨레> 5면 기사가 "민자당의 부정선거 사례에 대한 검경의 단속은 거의 없었거나 형식적"이었다고 한 데서도 나타나듯이, 당시의 공무원 조직은 예전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았어도 민자당의 승리를 위해 편파적으로 움직였다. 헌법 제7조 제2항이 김영삼과 민자당을 살린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선거 이틀 전인 12월 16일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 주재로 부산 지역 기관장들이 초원복국집에서 선거대책회의를 열고, 여기서 나온 김기춘의 "우리가 남이가?"라는 발언이 영남 지역감정을 촉발해 선거 판세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도 관권선거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하나는 금권선거였다. 민자당의 금권선거는 재벌정당인 국민당을 능가했다. 정치부 기자들의 대담 형식으로 집필된 위 <한겨레> 기사는 "민자당이 중앙당에서 지구당별로 평균 5억 원을 지원했다고 볼 때 2백 37개 지구당이 1천 1백 85억 원을 썼다는 얘기가 됩니다"라며 "사조직이 지역 유지들의 주머니로 활발히 운영된 것을 감안하면, 전체 선거 비용은 몇 천억 원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라고 말한다.

대담에 따르면 민자당 관계자들 중에 "국민당이 소문만큼 돈을 쓰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자신들이 국민당보다 돈을 더 많이 쓰는 것을 확인하면서 "재벌 정당이 저런가?"라고 말하는 민자당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김영삼이 민자당 대분열을 겪고도 무난히 대통령이 된 것은 이 당이 종전처럼 관권선거 및 금권선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민정당을 계승한 민자당은 6월 항쟁을 통해 이미 민심을 잃은 정당이었다. 관권과 금권을 동원할 수 없었다면, 이 당이 극심한 내부 분열을 겪고도 대선 승리를 거두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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