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26 19:58최종 업데이트 21.12.26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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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장기독재의 출발점은 1948년 7월 20일 대통령 선거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배태한 1919년 3·1운동 정신에 따라 대한민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정부 하의 제1대 대선이 된 이 선거에서 이승만은 180표(92.3%)를 획득해 13표(6.7%)에 그친 백범 김구를 제치고 대통령이 됐다. 김구 본인은 국회 간선제로 치러진 이 선거에 출마할 의사가 없었지만, 누구에게든 표를 던질 수 있었던 당시의 선거 룰로 인해 이런 일이 벌어졌다.

12년 장기독재의 시작은 이승만이 92.3%라는 압도적 득표율을 기록한 데 기인하지 않는다. 그 기원은 1948년 대선이 '강력한 대통령'을 선출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내각책임제 대통령

원래 이승만은 내각책임제 대통령으로 선출될 사람이었다. 그를 밀어주는 보수정당인 한국민주당(한민당)이 내각제를 선호했다. 이전 시대 특권층들이 그랬듯 한민당은 기득권층의 의사가 좀 더 용이하게 반영되는 총리 책임제를 선호했다. 친일세력이 다수 포진한 한민당으로서는 그것이 독립운동가 출신인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세운 뒤에 자신들의 권익을 보장받는 방편이었다.


그런 이해관계에 따라 한민당 발기인인 유진오가 내각제에 입각한 헌법 초안을 작성했다. 법학자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인 유진오가 그해 5월 제출한 헌법 초안 제58조에는 "대통령과 부대통령의 임기는 6년으로 한다. 단, 재선에 의하여 1차 중임할 수 있음"이라고 규정돼 있다. 재선을 통해 최장 12년간 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12년씩이나 재임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은 유진오 초안 속의 대통령이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73조는 "내각은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으로서 조직되는 합의체로서 대통령의 국무 수행에 대하여 동의를 주고 국회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라고 규정했다. 국회에서 선출된 뒤 대통령의 형식적 임명을 받는 국무총리가 대통령이 아닌 국회에 책임을 지도록 했다. 총리가 대통령에 대해 독자적 지위를 가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총리가 내각회의 의장이 되어 내각을 통할하도록 한 제75조 등과 더불어, 제73조는 대통령을 명목상의 국가수반으로 만드는 조항이었다. 이렇게 자신이 취임할 대통령직이 명목상의 자리로 굳어질 조짐을 보이자, 이승만은 가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그해 6월 22일 자 <동아일보> 톱기사는 "정부조직에 잇서서 원안에는 내각책임제로 되어 잇스나 이승만 박사는 자초(自初, 처음부터)로 대통령책임제를 주장하여 왓스며 지난 15일에는 기초위원회에 임석하야 대통령제를 주장하였"다고 보도했다. 헌법기초위원회 회의장에까지 나타나 '내각제는 안 된다'고 한마디 하고 갔던 것이다.

그렇게 해도 통하지 않자, 6월 17일에는 대통령제를 주장하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여전히 반응이 없자 21일에는 기초위원회 회의장에 또다시 등장했다. 이 자리에서 '내각제가 채택되면 나는 헌법상의 어떠한 지위에도 취임하지 않을 것'이라며 엄포를 놓고 사라졌다.

폭탄선언에 놀란 기초위원과 전문위원들이 자택인 이화장을 방문해 설득을 시도하자 "임금은 임금으로서 실권을 행사해야 하고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의 실권을 가져야 한다"며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 같은 이승만의 배짱 앞에서 한민당은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유진오 초안이 배척되고 대통령제 헌법이 채택됐다. 이 헌법이 공포된 지 사흘 만에 대통령 선거가 치러져 이승만이 당선됐다. 머지않아 장기독재로 이어질, 강력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 이승만의 집권이 개막하는 순간이었다.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취임식 및 제3회 광복절 기념식 ⓒ 대통령 기록관

 
한민당은 왜

오랜 해외 생활로 국내 기반이 취약한 이승만이 몽니를 부리고 토착세력이자 기득권층인 한민당이 응석을 받아주는 이 장면에서 음미해볼 대목이 있다. 이승만이 유력한 지도자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다수세력인 한민당이 그 정도 몽니 앞에서 뜻을 굽혔다는 것은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이승만의 고집이 통할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인지를 궁금케 하는 대목이다.

5·10 총선을 앞둔 그해 3월 31일, 정가에 충격을 주는 담화가 발표됐다. <동아일보> 설립자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인 김성수 한민당 위원장이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것이다. 4월 2일 자 <조선일보> 1면 하단 기사는 "김성수 씨가 선거에 임하야 입후보를 중지하고 조민당 부위원장 이윤영 씨를 해(該, '그')선거구인 종로구 갑구 입후보로 추천하기로 하였다고 발표"했다고 전한다.

38도선 이북의 조만식이 만든 조선민주당에서 부위원장으로 임명된 이윤영에게 서울 종로갑구 선거구를 양보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물산장려운동 주역인 조만식에 대한 존경을 표함과 동시에 우파 진영의 후보 난립을 막겠다며 단행된 이 담화는 한민당으로서는 커다란 손실이었다. 정당을 이끄는 당수가 국회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니, 지도부 리더십에 해를 끼칠 만한 일이었다.

김성수의 불출마는 대선에 전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7월 20일 대선에서 그의 이름이 적힌 투표용지는 한 장도 나오지 않았다. 그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지 않은 결과였다. 3·31 담화는 안 그래도 이승만보다 낮은 그의 영향력을 더욱 낮추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민당 지도자가 대선 경쟁에서 이탈하는 결과를 낳은 이 담화는 '임금이 임금다워야지'라며 내각제 개헌을 거부하는 이승만 앞에서 한민당이 무기력하게 넘어가는 원인을 제공했다. 이승만에 대한 한민당의 의존도를 더욱 높이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조만식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라든가, 우파의 표 결속을 위해서라는 명분에 비해 손실이 훨씬 큰일이었다.

그로부터 2년 전인 1946년 10월 21일부터 31일까지 전국적으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입법의원) 선거가 있었다. 미군정 의회인 입법의원에 들어가기 위해 김성수 위원장은 서울시에서 입후보를 신청했다. 

시내 행정구역별로 뽑힌 유권자 564명이 참여한 1차 투표에서 김성수는 서울의 세 지역구 중 하나인 '전체 지구'에서 107표를 얻어 2위를 기록했다. 그 뒤를 여운형(17표)과 이승만(12표)이 이었다. 그는 2차 투표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둬 서울 지구 당선자 3명에 포함됐다. 함께 당선된 나머지 둘은 장덕수·김도연이다. 한민당 창당 멤버이자 지도자인 장덕수도 동반 당선됐던 것이다.

하지만 이 선거는 무효로 처리됐다. 부정선거가 극심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오늘날의 대학로 인근인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서는 동네 반장이 주민들을 대신해 투표하는 사례도 있었다. 부정행위 양상이 심했기 때문에, 강원도 입법의원 선거와 더불어 서울시 입법의원 선거는 무효로 처리됐다.

부정선거에 대한 감시망이 촘촘해진 뒤인 그해 12월 재선거에서 김성수는 송진우와 함께 고배를 마셨다. 김성수는 조소앙에게 패하고 장덕수는 신익희에게 패했다. 좀 더 제대로 치러진 선거에서 친일파 정당의 두 거물이 독립운동가들에게 패배했던 것이다.

김성수의 패배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조소앙의 사퇴로 1947년 2월 치러진 보궐선거에서도 또다시 낙선했다. 전면적인 보통선거는 아니었지만, 선거를 통한 대중과의 접촉에서 두 번이나 연거푸 낙선한 것이다.

친일파의 처지

그를 포함한 한민당 지도부를 위축시킬 만한 일들은 이 시기에 비일비재했다. 일례로, 한민당을 '친일 원흉'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한민당이 이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는 점은 1947년 7월 30일 자 <동아일보> 1면 좌단에 대문짝만 하게 보도된 한민당의 항의 성명에서도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한민당은 미소공동위원회에 제보된 투서에 "친일 원흉 한민당 급(及, 및) 그 계열을 반다시 공위(共委)에서 제외할 것"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것을 문제 삼았다. 한민당 사람들을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배제하라는 투서에 '친일 원흉'이란 표현이 들어갔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쓰지 말아달라는 등의 내용을 담은 항의 성명을 공표했던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만 '한민당은 친일 원흉'이라는 말이 오고갔다면, 한민당이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항의 성명을 실어 이 사실을 널리 알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고 있었기에 신문을 통해 호소했던 것이다. 우군인 조선총독부와 일본제국주의가 몰락한 뒤로 친일파들이 대중을 얼마나 의식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초대 대통령 취임기념 우표 ⓒ 대통령 기록관

 
이처럼 한민당이 친일 원흉으로 지탄을 받는 상황에서 한민당 지도자들이 입법의원 선거에서 부정선거 시비에 휘말리다가 재선거·보궐선거에서 연거푸 낙선했다. 유권자 숫자가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입법의원 선거를 통한 대중과의 접촉에서 연이어 고배를 마셨다. 한민당 지도부가 자신들의 처지를 돌아보도록 만드는 계기가 될 만한 사건이었다.

한민당이 압도적인 경제력과 사회적 기반을 갖고도 이승만의 몽니 앞에서 쩔쩔맨 이유를 이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독립운동가 출신을 내세우지 않고는 해방된 한국에서 살아남기 힘들었던 친일파들의 처지를 반영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한민당에 그런 약점이 없었다면, 굴욕을 감내하면서까지 이승만에게 허리를 숙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승만은 아예 대통령이 되지 못했거나, 유진오 초안 제58조에 따라 12년간 명목상의 대통령을 지낸 뒤 편안한 여생을 마쳤을 수도 있다.

한민당의 콤플렉스로 인해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이승만이 명목상 대통령이 아닌 강력한 대통령이 된 것이 이승만의 12년 장기독재를 초래한 주요 요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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