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16 06:02최종 업데이트 21.12.16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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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이준석 대표 ⓒ 국회사진취재단

 
여성에게 폭력을 저질러선 안 된다는 아주 당연해 보이는 이 명제는 과연 인류 역사에서 보편적인 원칙이었을까. 놀랍게도 그렇지 않다. 일례로 18세기 영국에서는 엄지 손가락보다 굵지 않은 채로 아내를 때리는 것이 '체벌'로서 허용되었으며, 19세기 말까지 영국과 미국에서는 폭력으로 아내를 '처벌'해도 된다는 규범이 널리 퍼져있었다.

1980년대 이전까지 이탈리아에서는 남성이 명예실추를 이유로 여성을 살해한 경우 사법부가 형을 감경했다. 우리가 인권에 있어서 그나마 선구적이라 간주하는 영미권과 서유럽 쪽만 보아도 그렇다. 이는 아직까지도 가정 폭력, 성착취 등 여성을 향한 폭력이 서구권에서도 사회문제로 지적되는 이유다.


한국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1983년 가정폭력 운동단체인 '한국여성의전화'가 생기기 이전까지 이 나라에서 아내에 대한 폭력이란 일상적인 일이자 '훈육'으로 여겨져 왔다. '서울대 신 교수 성적 괴롭힘 사건'은 한국 최초의 직장 내 성적 괴롭힘 사건이었는데, 소송은 1993년에 시작되었고 승소판결은 1999년에나 나왔다.

성범죄 처벌 규정에 붙여져 있던 '정조에 관한 죄'라는 이름은 1995년에서야 '강간과 추행의 죄'로 개정되었고 법이 보호해야 하는 것이 '여성의 정조'가 아니라 '성적 자기 결정권'임을 제대로 규정할 수 있었다. 여성 인권에 관해 우리가 보편적인 원칙이라 생각했던 명제들이 사실 기나긴 인류의 역사에서 보자면 근래에 합의되기 시작한 셈이다.

당연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던 원칙들

언뜻 보기에 당연하지만 사실은 치열한 사회운동과 설득을 통해 뒤늦게 합의된 가치들은 상대적으로 디딘 토대가 단단하지 않은 편이다. 그리고 관련된 선언과 법제의 제정이 이루어졌음에도 여전히 그 원칙들이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영역에서는 실현되지 못한 경우도 많다. 주로 1990년대를 기점으로 여성 인권에 관한 국제적인 협약들이 다수 만들어진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계속해서 약속해야만 확립된 원칙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우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퇴보는 한순간에 이루어질 수도 있다. 가령 미국의 경우 임신 중절 허용의 기반이 된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보수 우위의 현 연방대법원에서 뒤집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려스러운 행보를 보이는 인물이 있다. 바로 국민의힘 당대표인 이준석이다. 물론 이 대표가 페미니즘 백래시에 편승하여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 사용자들의 지지를 노골적으로 호소한 게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다만 최근 'n번방 방지법'이나 '민식이법'을 향한 그의 발언을 보자면 이제는 정치인이라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조차 넘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첫 번째로 그의 발언은 명백한 선동이다. 가령 'n번방 방지법'이 통신의 자유를 침해하고 사전검열이나 다름없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이미 방송통신위원회가 해명했지만 이 법은 사적인 대화가 아니라 공개된 온라인 공간에 한하며 불법촬영물이 업로드 되었는지를 기계적으로 필터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즉 이 대표가 퍼트리는 건 가짜뉴스고 이는 제도에 대한 근거 없는 악감정만을 부추길 뿐이다.

선동
 

지난해 11월 26일 오전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이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에서 징역 40년을 선고 받은 가운데, 텔레그램성착취공대위 회원들이 선고 직후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전국 법원 1심 선고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모습. ⓒ 권우성

 
두 번째로 이준석이 행하는 선동은 명백히 약자와 소수자를 향하고 있다. 언뜻 듣기에 의아할지도 모른다. 이준석이 대놓고 성 착취 피해자나 아동을 비롯한 교통약자를 비난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 다만 이 대표는 그들을 보호할 제도를 공격하고 그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을 가진 이들을 부추긴다.

그는 문제로 지적한 법들이 '분노한 여론'과 '선악구도' 속에서 과잉 입법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정말로 그런가. 교통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운전자에게 보다 무거운 책임을 지우고, 성 착취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선제적인 조치를 취하는 건 사회가 취할 수 있는 합리적 선택 중 하나다. 이걸 권리의 제약으로 보는 건 왜곡이다.

하지만 이준석 대표는 보호를 목적으로 한 법들이 다른 사회 구성원들의 권리나 이해와 충돌하는 것처럼 포장한다. 'n번방 방지법'이나 '민식이법'에 대한 부정확하거나 막연한 거부감에 실질적인 근거가 있는 것처럼 만들어버린다. 이런 식의 메시지 전달은 터무니없고 유해한 주장에 힘을 실어버린다. 결과는 이 대표가 한 행동과 마찬가지가 된다. 사람들은 성 착취 피해자와 아동을 보호할 법을 무너뜨리려하고 가짜뉴스를 재생산 하게 된다. 오히려 자신이 하는 행동이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나쁜 법안에 반대하는 것이라 생각할 테니 상황이 더욱 안 좋다.

정치인의 본분

나는 보수건 진보건 정치인은 다양한 신념을 가질 수 있고 이는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치인 본연의 역할에 어긋나는 생각에 대해서까지 그럴 순 없다. 정치인이라면 공동체가 최소한 지켜야 할 윤리적인 선을 허무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문제는 특히나 소수자에 대한 '윤리적인 선'이라는 것이 앞서 살펴본 것처럼 확립된 지가 오래되지 않았고 따라서 허물어지기도 매우 쉽다는 것이다. 약자와 소수자를 보호하는 제도에 대한 근거 없는 증오는 결국 당사자에게까지 이어지기 쉽다. 그들을 평등하게 대하고 필요하다면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보다 차별하고 혐오한 역사가 훨씬 길기 때문이다. 긴 역사 속에서 형성된 문화와 정서는 쉽게 허물어지기 어렵다.

이준석은 제1야당의 당대표이자 대선 국면에서 큰 마이크를 쥔 주요한 정치인이다. 그의 말 한마디가 가진 파급력이 어마어마하다.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도 마찬가지다. 그의 말과 행동에 따라 우리 사회가 애써 형성하고 지켜온 소수자를 위한 가치관이 돌이킬 수 없이 무너져버릴 수 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트럼프 시대의 미국은 그런 우려가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매우 노골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던가. 정치인들이 자신의 본분을 알고 경각심을 가져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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