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07 11:55최종 업데이트 21.12.07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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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의 주역 홍범도 장군이 8월 15일 광복절에 귀향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방현석 소설가의 '홍범도 실명소설 <저격>'을 주 2회(화요일, 금요일) 연재합니다.[편집자말]

   

 
8

나는 우마차를 얻어타고 진남포로 향했다. 도중에 순검을 두 번 당했지만 포졸들은 우마차에 실린 감홍로에만 관심을 가졌다.


평양의 감홍로는 황해도의 이강주, 전라도의 죽력고와 함께 조선 3대 명주로 손꼽혔다. 하지만 감홍로는 이강주 · 죽력고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단연 으뜸이었다. 누룩을 맷돌에 갈아 증류한 다음 1년을 숙성시킨 감홍로는 도수가 높고 뒤끝이 청량했다. 청국과 왜국에서 들어온 물산을 평양으로 싣고 왔다 진남포로 돌아가는 우마차에는 평양 특산 감홍로가 가득 실려 있었다. 감홍로는 진남포를 통해 조선 팔도는 물론이고 청국과 왜국으로도 팔려나갔다.

우마차의 주인은 코쟁이들도 사간다고 자랑을 했다. 나는 여차하면 포졸을 때려눕히고 뛸 작정으로 우마차의 주인 옆에 앉아 호위 장정 행세를 했다. 혼자 이동하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포졸들의 시선을 덜 끌었다. 청국과 왜국 상단이 호위 무사를 붙이고 다녔기 때문에 조선 상인들이 호위 장정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순검하는 포졸들은 감홍로 한 병에 입이 찢어졌다. 내가 얻어 탄 우마차는 감홍로 두 병을 내주고 무사히 진남포에 도착했다.

진남포에서 백무아를 잡아들인 형방 서진태는 부자 동네인 억양기리에 살았다. 현감의 관사 부럽지 않은 번듯한 집이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집을 둘러본 나는 밤을 기다렸다.

어둠이 빨리왔다. 거리를 몰려다니는 떼놈과 왜놈, 코쟁이들로 진남포의 저녁이 흥성거렸다. 내일이 동짓날이었다.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이었다. 팥죽과 팥떡을 파는 사람들이 등불을 밝히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불렀다. 동짓날은 한 해 동안의 빚을 청산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작은 설날이기도 했다.

비석리 장거리 끝에 있는 객사에서 빠져나온 나는 시끌벅적한 장터를 지나 서진태의 집으로 갔다. 뒷담을 넘은 나는 놈이 혼자 있는 사랑채의 방문을 조용히 열어젖혔다.

"무슨 일이냐?"

서탁에 놓인 장부에 코를 박은 채 놈이 물었다.

"계산할 게 있어 왔다."

내 대답에 고개를 들던 서진태가 내 손에 들린 육혈포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바로 죽고 싶으면 소리를 질러도 좋다."
"왜... 왜 이러는 것이냐?"
"네가 한 짓을 생각해봐라."

나는 방문을 닫고 놈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누, 누구냐?"

형방 서진태는 말을 더듬으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장부책을 더듬었다.

"빚을 갚지 않았으면 면해주고, 빚을 갚았으면 돌려주겠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놈이 봄 보릿고개에 빌려준 보리를 가을에 쌀로 돌려받고, 가을에 빌려준 쌀은 이듬해 가을에 두 배로 거둬들이고, 갚지 못한 자의 전답을 빼앗는다는 얘기를 이미 객사에서 듣고 온 나였다. 오늘이 바로 빚을 거둬들이는 동짓날이었다. 악귀를 물리치기 위해 동지팥죽을 먹는 오늘, 빚을 진 농민과 뱃사람들에게 물리칠 수 없는 악귀가 바로 놈이었다.

"그럼, 어, 얼마를 주면 되겠나?"
"돈으로 치를 수 없는 계산이야."

나는 놈의 급소를 살폈다.

"아니면, 누, 누굴 풀어주면 되겠나?"
"이미 늦었어."
"무, 무엇이든 하라는 대로 하겠네... 목숨만 살려주게."
"살 짓을 하고 살기를 바라야지."
"제, 제발. 한번만 살려주게."

형방 서진태는 무릎을 꿇고, 보자기로 입과 코를 가린 나를 올려다보며 애원했다. 나는 녀석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잠시 생각했다.

"네 놈이 지난 석 달 동안 잡아들인 억울한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고, 절을 하며 사죄해라."

서진태는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놈이었다.

"마상돌."

놈은 이름을 부르고 큰절을 하며 주절거렸다.

"사죄드립니다."

나는 백무아가 간 미국이란 나라의 방위를 생각했다.

"나를 보고 하지 말고, 동쪽을 보고 해라."

마상철, 박주신, 경경완, 안이만, 막달녀. 기종걸... 아홉 번 절을 한 서진태가 엎드린 채 고개만 들고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오른손에 쥔 권총의 약실을 왼손으로 돌렸다. 찰칵찰칵 돌아가는 약실 소리에 놈은 얼른 다른 이름을 불렀다.

"형관수"

대여섯 명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열이 되도록 그녀의 이름은 나오지도 않았다. 나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님!"
"형관수님."

놈은 얼른 열 번째 이름을 다시 부르고 절을 했다.

"사죄드립니다."

피일섭님, 조순이님, 갑동이님, 백무... 그녀의 이름이 열네 번째로 서진태의 입에서 튀어나오려는 순간 나는 발을 날려 놈의 주둥이를 걷어찼다.

"더러운 주둥이로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마라."
"...사죄드립니다."
"네놈이 능욕했느냐?"
"아니오, 난 그저 보부상단의 부탁을 받고 잡아들였을 뿐이오."
"왜놈 보부상단?"
"예."
"이놈이냐?"

나는 품속에서 백무아가 그린 왜놈의 초상을 꺼내 보였다.

"맞습니다."
"다케이치 신지로?"

"예."
"형방이란 놈이 제 나라 여자를 지키지는 못할망정 왜놈에게 팔아넘겨?"
"사죄드립니다..."

놈이 갑자기 나에게 달려든 것은 내가 잠시 백무아의 생각에 빠진 순간이었다. 내 손에 들려있던 육혈포가 방바닥에 떨어졌고 놈이 소리를 질렀다.

"여봐라, 여봐..."

나는 놈의 아랫목 혈을 손날로 내려쳤다. 놈은 입을 반쯤 벌린 채 끽소리도 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육혈포를 허리춤에 꽂으며 잠시 머뭇거렸다. 곧 집안의 식구들이 몰려올 것이다. 육혈포를 쓰면 문간방의 호위 포졸까지 달려올 것이다.

맨손으로도 얼마든지 놈의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었다. 단도를 쓰면 가장 확실하고, 위험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육혈포를 다시 뽑아 들며 손잡이를 살폈다, BFR, BFJ. 나는 그녀가 손잡이의 양쪽에 새겨 둔 알 수 없는 글자를 감싸 쥐었다. 놈의 왼쪽 눈을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이건 백무아 몫의 탄환이었다. 놈이 왼쪽 눈을 감싸고 주저앉았다. 약실을 돌린 나는 놈의 오른쪽 눈을 향해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탕.

이건 나의 심장에서 빠져나간 탄환이었다. 놈이 바닥에 널부러졌다.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서탁에 놓인 놈의 고리대금 장부에 불을 붙이고 등잔의 기름을 끼얹었다. 순식간에 방안에 불길이 번졌다. 나는 문을 열고 뒷담을 향해 달렸다. 장독대를 딛고 담 위로 뛰어오려는 순간 중심을 잃었다. 장독대에 뿌려둔 동지팥죽에 미끄러진 것이다. 내가 다시 중심을 잡고 담장에 뛰어오르려는 순간 뒤에서 총소리가 들렸고, 오른쪽 어깨에 충격이 왔다. 나는 왼손을 짚고 담장을 뛰어넘었다.

호위 포졸은 집요하게 쫓아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녀석의 허벅지에 총알 한 방을 박아주고 억양기리를 벗어났다.
덧붙이는 글 방현석은 소설가다. 소설집 <사파에서>, <세월>, <내일을 여는 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 <새벽 출정>과, 장편소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십 년간>, <당신의 왼편>이 있다. 산문집 <아름다운 저항>, <하노이에 별이 뜨다> 와, 창작방법론 <이야기를 완성하는 서사패턴 959> 등을 썼다. 신동엽문학상(1991), 오영수문학상(2003), 황순원문학상(2003) 등을 받았다.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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