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03 06:11최종 업데이트 21.12.03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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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 연합뉴스

 
11월 19일 일본 기시다 내각은 55조 7천억 엔(한화 580조) 규모의 재정지출을 결정했다.

추가경정예산(이하 추경)으로선 전후 최대 규모이며 그 중에서도 '신형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확대 방지' 목적으로 가장 많은 22조 1천억 엔을 책정해 의료체제 강화와 개인사업자, 사회적 약자를 지원한다. 9조 2천억 엔은 '사회경제활동 재개와 위기대처' 명목으로 GoTo트래블, 백신 및 치료제 개발 등에 쓰이며, 19조 8천억 엔은 간호사, 사회복지사, 보육사 등의 임금인상, 그리고 디지털 도시국가 구상을 포함한 '새로운 자본주의의 기동(起動)'을 위해 사용한다고 한다.

역대급 추경

기시다 총리는 자민당 총재 선거 때부터 '성장과 분배'를 내걸면서 "성장도 중요하지만 분배를 적극적으로 행해야 한다"는 새로운 자본주의를 천명했다. 디지털 국가가 미래를 내다보는 새로운 성장전략이라면, 임금인상은 분배를 의미한다. 나름대로 총리의 의지가 반영된 추경 안이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자연재해 복구, 부흥, 국가안전보장 등의 명목에 4조 6천억 엔이 배정됐다.


재원 조달처를 살펴보면 우선 중앙정부의 지출분이 43조 7천억 엔이다. 21년도 추경예산안으로 계획돼 있던 31조 9천억 엔을 전부 투입하며, 부족분은 국채를 새로 발행한다. 작년 동시기에 집행된 스가 내각 제3차 추경예산은 40조 엔인데 원래 상정돼 있던 추경 규모가 20조 1천억 엔이었으니 기시다 내각의 이번 추경 예산편성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추경예산안은 1.6배(20조 1천억 엔→31조 9천억 엔), 재정지출은 1.4배(40조 엔→55조 7천억 엔) 늘어난 규모이며, 이는 작년 4월 실행된 아베 내각 시기의 '긴급경제대책을 위한 추경' 48조 4천억 엔을 뛰어넘은, 그야말로 역대급 추경이라 할 수 있다.

서구 선진국들과 비교해봐도 이번 기시다 내각의 결정은 의외로 받아들여진다. 노무라종합연구소 기우치 다카히데 선임연구원은 NRI에 기고한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세계 각국을 살펴보면 코로나 대책에 관한 재정지출은 작년 하반기부터 확연한 축소경향을 띠고 있다. 코로나 문제가 발생한 지 거의 2년이나 흐른, 그것도 긴급사태선언 해제와 맞물려 경제회복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하는 시기에 (아베 내각, 스가 내각 추경을 뛰어 넘는) 과거 최대 규모의 코로나 경제 대책을 실행하겠다고 나선 일본은, 그야말로 이례적이다. 내용보다는 경제대책의 '규모'로 국민에게 어필하려고 하는, 즉 형식에 치우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2021년 11월 18일, NRI, 나렛지 인사이트 칼럼)

청소년과 저소득층에 100만원씩... 그런데

하지만 보다 큰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이번 예산안이 각의결정되고 구체적인 항목이 매스컴에 공개되자 자민당과 공명당이 발 빠르게 합의한 18세 미만 어린이 및 청소년 1명당 10만 엔(현금 5만 엔, 상품권 5만 엔. 세대주 연소득 960만 엔 이상 제외) 지급을 위한 사무비용으로 968억 엔을 책정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또한 이와는 별도로 주민세 비과세 세대에 일괄적으로 10만 엔씩 현금을 지급하는 데 들어가는 사무비용도 854억 엔으로 책정됐다. 즉 이 두 항목의 급부금을 지급하는데 들어가는 총비용이 1822억 엔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 두 분야의 총 급부금이 2조 엔에 달하기 때문에 비율로 보자면 약 9%에 불과하다. 수수료 문화가 정착된 일본사회의 관례상 그렇게 높진 않다. 하지만 아예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게 아니다. 이미 아동수당을 받는 세대 및 주민세 비과세 세대의 데이터가 존재한다. 그런데도 한국 돈으로 치자면 약 2조원이 돈을 주기 위한 돈으로 쓰인다는 거다.

논란이 커지자 자민당과 연립정권을 구성하고 있는 공명당 야마구치 나쓰오 대표는 "현금과 상품권 지급으로 결정됐기 때문에 어느 정도 경비는 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한 일본정부 및 내각부 관계자들도 일본 언론의 취재에 "현금으로만 지급하면 아예 안 쓰고 저축으로 돌릴 수가 있기 때문에 경제효과를 생각해서 상품권으로 대체하는 것"이라며 "상품권을 만들고, 우편으로 우송하는 등 사무처리 비용이 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한 주민세 비과세 세대에 대해선 "해당 당사자들을 선정하고 받을 건지 안 받을 건지 당사자 의사도 확인하기 위한 서류 인쇄대금, 우편비, 인건비 등 각종 비용이 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사실이 밝혀지자 트위터 등 인터넷은 난리가 났고, 저명인사들도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시모토 도루 전 오사카 지사는 1일 TBS의 <고고스마>에 출연해 "아이들을 키우는 가정에 상품권을 새로 만드니 뭐니 하는 거에 968억 엔이나 든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마 자민당, 공명당 사람들은 경비가 이렇게 드는 줄 몰랐을 거라 생각하고 싶다. 알았다면 누가 이런 바보 같은 정책을 내냐. 상품권 그거 안 하고 그냥 원래대로 현금으로 10만 엔씩 급부금 주면 많이 해봤자 300억 엔 정도로 끝날 건데 경비가 세 배로 불어났다. 상식이 있다면 이런 바보 같은 짓 좀 하지마라. 고치지 않을 거면 국회의원 당신들이 내던가. 900억 엔이다. 국민이 낸 세금을 뭐 이딴 데 쓰고 있는지 정말 생각할수록 화난다.

입헌민주당 렌호 참의원 역시 주민세 비과세 세대 10만 엔 지급에 대해 자신의 트위터에 "새롭게 나왔네요. 854억 엔의 사무비용입니다"라며 "백신개발, 경구약 개발지원, 겨울에 또 닥칠지 모르는 대량 확진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의료체제 정비 등 정해진 예산으로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으니까 주민세 비과세 세대를 위한 급부금은 받을지 안 받을지 물어보지 말고 그냥 일률적으로 나줘주는 게 맞다"라고 말했다.

트위터 유저들도 아베 내각시절 시행됐던 천 마스크, 일명 '아베마스크'와 경산성의 지속화 급부금을 집행했던 서비스추진디자인협의회, 광고대리점 덴쓰, 인재파견회사 파소나 등을 거론하며 "중간에서 빼먹는 건 일본정관계의 유구한 전통"이라 꼬집었다.
 

아베 전 일본 총리. 총리 재임 당시 별다른 실적 없는 영세기업이 40억 엔 상당의 정부 마스크 발주를 받았고, 그 배경에 공명당 소속 의원의 로비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유야무야됐다. 일명 아베마스크 논란이다. ⓒ 연합뉴스


아베마스크 악몽 되풀이 되나

아베마스크는 2020년 4월 후쿠시마현 후쿠시마시에 위치한 주식회사 유스비오라는, 별다른 실적 없는 영세기업이 40억 엔 상당의 정부 마스크 발주를 받았고, 그 배경에 공명당 소속 의원의 로비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유야무야된 사건이다.

지속화급부금 스캔들은 일반사단법인 서비스추진디자인협의회가 경산성 산하 중소기업청이 발주한 '코로나 시국의 중소기업 지속발전을 위한 급부금 사업'의 일환으로 769억 엔의 예산을 받아 광고대리점 덴쓰에 749억 엔으로 재발주한 사건을 말한다. 즉 서비스추진디자인협의회는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안했는데 20억 엔의 수익을 남긴 것이다. 이후 조사에서 이 사단법인이 경산성 OB로 구성돼 있고, 과거 결산서를 조사한 결과 모든 사업을 경산성에서 발주 받은 사실이 발각돼 물의를 빚었다.

파소나는 도쿄올림픽 당시 연출자 평균 일당을 35-45만 엔으로 책정해 예산을 받은 후 실제로 일한 노동자에겐 하루 약 1만 2천-2만 엔을 지급한 것으로 나타나 구설수에 올랐다. 파소나의 실질적인 오너는 고이즈미 정권 시절 어둠의 총리로 불리며 신자유주의를 일본에 상륙시킨 다케나카 헤이조다. 지금 언급한 세 가지 스캔들은 최종적으로 아무 문제없이 넘어갔다.

즉 인터넷에서 난리 난 이유는 결국 역대급 추경 55조 7천억 엔에 들어가 있는, 사무비용으로 산정된 약 2천억 엔에 달하는 예산 역시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 위탁을 할 것이고, 역시 지금까지 그래왔듯 그들이 중간에서 빼먹는다(中抜き)는 말이다.

확실히 기시다 내각은 이전 정권에 비해 결단력이나 행동력이 빠르다. 추경결정뿐만 아니라, 코로나 오미크론 변이에 대해서도 선제적 입국 금지, 국외 항공권 신규예약 금지 등의 조치를 내렸다. 아베 및 스가 내각 시절 만연했던 '회의를 위한 회의'도 눈에 띄게 줄었다.

하지만 여전히 비상식적 행위가 전통이라는 미명하에 횡행하고, 그러한 사실 및 의혹에 대해 분노는커녕 체념과 비아냥의 소재로 삼는 국민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여전히 일본의 미래는 암울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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