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05 19:46최종 업데이트 21.12.17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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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에는 대통령 선거가 두 번이나 치러졌다. 3월 15일 제4대 대선이 치러지고, 8월 12일 제4대 대선이 또다시 치러졌다.

이승만이 득표율 100%를 기록하며 4연임에 성공한 3·15 부정선거는 그가 하야 성명을 발표한 4월 26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만장일치로 무효 처리됐다. 만장일치로 당선되고 만장일치로 무효 처리됐던 것이다.


이에 따라 8월에 다시 열린 대선은 3·15 때처럼 직선제 대선이 아니라 6월 15일 의원내각제 개헌에 따라 국회 간선제 방식을 띠게 됐다. 국회에서 대통령과 총리를 각각 선출하되, 대통령을 먼저 뽑는 방식으로 하게 됐다.

참의원과 민의원을 선출한 7월 29일 제5대 총선으로부터 2주 뒤에 양원 합동회의에서 열린 대선은 사전에 예상된 대로 끝났다. 민주당 후보 윤보선이 압도적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는 208표를 얻어 82.2% 득표율을 기록했다.

미리부터 점쳐진 것이었으므로, 윤보선의 압도적 당선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진짜로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뜻밖의 인물이 2위에 오른 것이 그보다 훨씬 더한 충격을 주었다.

'뜻밖의 인물'이라는 표현이 2위 득표자의 위상이나 비중이 낮았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위상이나 비중으로 보면 대통령이 되고도 남았다. 하지만, 이미지가 정치판과 거리가 멀었다. 고결한 이미지를 띤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이다. 불굴의 항일투사로 존경을 받던 심산 김창숙이 바로 그였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지도 않았고 대통령 될 생각도 전혀 없었던 김창숙을 29명의 국회의원이 투표용지에 기입했던 것이다.

이로 인한 당시 사람들의 충격은 그해 8월 13일 자 <동아일보> 기사 '정계의 저류(低流) 7'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2일 대통령 선거에 구파 민주당 보스 윤보선 씨가 당선된 결과가 가져오는 정치적 영향과 이날 표결에 홀연히 나타난 김창숙 옹 29표는 정계에 커다란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라고 이 기사는 말한다.

윤보선은 82.2%를 득표하고 김창숙은 11.5%를 득표했다. 그래서 수치상으로는 비교도 되지 않았지만, 위 기사는 '윤보선 당선으로 인한 정치적 영향과 홀연히 나타난 김창숙 29표가 커다란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며 1위와 2위를 대등하게 평가했다. 김창숙 29표가 윤보선 208표에 결코 뒤지지 않았던 것이다.

기구한 선비 김창숙

김창숙은 일본이 조선 시장을 개방시키고자 강화도 사건을 도발한 지 4년이 흐른 1879년에 출생했다.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선비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항일전선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1905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때는 을사오적을 참형에 처할 것을 청원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라는 상소를 올렸다. 3·1 운동이 있었던 1919년에는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독립 탄원서를 보내다가 발각됐다(제1차 유림단 사건). 1925년에는 중국에 무장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자 호남과 영남의 선비들을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하다가 발각됐다(제2차 유림단 사건).

1926년에는 의열단원 나석주에게 일제 착취 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할 것을 권유했다. 그해 12월 28일 나석주는 의거 뒤에 자결의 길을 선택했다. 김창숙은 독립운동에 대한 국제적 지원도 끌어냈다. 중국 쑨원(손문) 등이 한국독립후원회·중한호조회 등을 만들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심산 김창숙 선생 ⓒ 국사편찬위원회 및 심산기념사업회

 

이런 투쟁들로 인해 만 48세 때인 1927년, 김창숙은 경찰에 체포됐다. 이때 받은 고문으로 그의 두 다리는 마비됐다. 일제 패망 직전인 1945년 8월 7일 체포돼 왜관경찰서에 구금됐다. 그 상태에서 8·15 해방을 맞이했다.

그의 투쟁은 그 뒤에도 계속됐다. 투쟁의 필요성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친일파와 협력하고 외세에 의존하는 이승만 정권을 상대로 하는 분단 반대 투쟁이 그것이었다.

그의 삶은 투쟁의 측면에서는 꼿꼿한 선비의 삶이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면에서는 기구한 선비의 삶이었다. 여관과 병원을 전전하는 궁핍한 나날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81세가 된 1960년 8월의 대통령 선거 개표 현장에서 그의 이름이 "홀연히" 튀어나와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다.

민주당 극심한 분열

4·19 혁명을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최대 수혜자가 된 민주당은 구파와 신파의 대립이 극심했다. 한국민주당(한민당) 및 민주국민당으로 구성된 '구파'와 자유당 탈당파 및 흥사단 출신들로 구성된 '신파'는 1955년에 반(反) 이승만을 기치로 대동단결했지만, 공동의 적인 이승만이 무너지자 급격히 분열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4·19 뒤에 분당을 추진했다. 하지만 여론이 호의적이지 않아 무산됐다. 할 수 없이 7·29 총선을 함께 준비하게 된 두 파벌은 공천 단계에서도 격렬히 대립했다. 선거 자금도 계파 별로 따로 마련했을 정도다. 이런 양상은 공천 탈락자 상당수가 결과에 불복해 무소속 출마를 단행하는 원인이 됐다.

이렇게 분열이 심했는데도 민주당은 대승을 거뒀다. 상원인 참의원 의석 58석 중 31석을, 하원인 민의원 의석 233석 중 171석을 차지했다. 2위는 4석을 차지한 사회대중당이었다. 얼마 전까지 집권당인 자유당은 2석이었고, 통일당·한국사회당 및 기타 단체가 각각 1석씩이었다. 나머지 53석은 무소속에 돌아갔다. 자유당 몰락으로 민주당 외에 대안이 없었던 상황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신·구파의 대립은 총선 뒤에 더 심해졌다. 당선자 총회를 각각 열었을 정도다. 다소 우세를 점했던 구파는 총선 직후에 분당을 시도했다. 신파를 배제한 별도의 다수당을 만든 뒤 무소속을 영입해 대통령과 총리 두 자리를 모두 차지할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여론이 만만치 않아 이 계획도 무산됐다. 총선에 이어 대선도 '한 지붕 두 가족'으로 치르게 됐던 것이다.

무소속의 힘

그래서 8·12 대선은 정당 대 정당의 대결이 아니라 파벌 대 파벌의 대결로 전개됐다. 숫자가 약간 더 많은 구파는 대통령·총리를 모두 차지한다는 목표를 세운 반면, 신파는 대통령은 내주고 총리만 차지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1960년 8월 4일 자 <경향신문> 톱기사인 '의총 앞서 비상한 전략'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신파는 구파 리더인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로 '적극' 추천했다. 윤보선은 대통령 후보는 물론이고 총리 후보로도 유력했다. 구파의 유력한 총리 후보를 탈락시킬 목적으로 윤보선을 '적극' 밀었던 것이다.

7·29 총선에서 민주당 신·구 양파는 양원에서 총 202석을 획득했다. 8·12 대선에서 윤보선은 208표를 얻었다. 무소속 일부를 포함해 신·구 양파가 윤보선에게 표를 던진 결과였다. 그를 힘 있는 총리 관저가 아닌 힘없는 대통령 관저로 보내려는 신파의 전략이 그런 결과로 이어졌던 것이다.

8월 12일 대선 개표장에 모인 사람들은 208표라는 결과를 보면서 '신파의 작품'이라는 생각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다. 그들은 208표와 함께 튀어나온 29표를 보면서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신파의 작품도 아니고 그렇다고 구파의 작품도 아닌, 이 29표는 뜻밖에도 무소속 의원들의 작품이었다.

7·29 총선에서는 무소속이 대거 당선됐다. 참의원에서는 20명, 민의원에서는 53명이었다. 양원 291명 중 73명이었으니 무소속 비율이 25.1%나 됐다. 이 25.1% 안에는 공천에 불복해 민주당을 탈당한 이들도 있었다.

제2당인 자유당이 총 6석(참 4석, 민 2석)밖에 안 되고, 제3당인 사회대중당이 총 5석(참 1석, 민 4석)밖에 안 됐기 때문에, 이 시기의 정국은 민주당 두 파벌을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소속들이 '우리도 여기 있다'며 존재를 과시하고자 단합한 결과가 김창숙 29표였다. '이분도 여기 계신다'며 뜻밖에도 불굴의 독립투사를 대선 투표장으로 모셔갔던 것이다.

무소속의 존재와 단합을 과시하려는 정략적 발상에서 김창숙 29표가 나오기는 했지만, 그럴지라도 이 사건은 당시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이 됐다. 동시에 민주당 신·구 양파에는 끔찍한 충격으로 다가갔다.

"이날 표결에 홀연히 나타난 김창숙 옹 29표"라는 표현을 썼던 위의 <동아일보> 기사는 "신·구 양파에 끔찍한 충격을 준 것은 이날 선거에 나타난 김창숙 옹 29표이었다"며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이날 튀어나온 29표"라는 표현을 썼다. 신·구 양파의 입장에서는 자신들 외에 유력 그룹이 또 있다는 사실이 그런 식으로 드러났기에 끔찍한 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창숙을 앞세운 무소속의 세력을 확인한 신·구 양파는 닷새 뒤의 총리 선거를 위해 무소속 끌어들이기에 착수했다. 그렇게 해서 8월 17일 국회에서 열린 총리 인준 투표는 신파의 승리로 끝났다. 윤보선이 지명한 구파 후보 김도연은 인준을 통과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윤보선은 신파의 장면을 지명했고, 장면이 의원내각제 하의 실세 총리로 당선됐다. 신파의 의도대로 됐던 것이다.

뒤이어 무소속들의 의도도 관철됐다. 장면 내각의 각료 임명을 위한 협상에서 '신파 5석, 구파 5석, 무소속 2석'으로 합의가 도출된 것은 '김창숙 29표'를 무시할 수 없었던 당시 분위기를 반영한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신정부수립 경축식에 참석한 윤보선 대통령 내외와 장면 국무총리 내외. 1960.10 ⓒ 연합뉴스


1960년 8월 대선에 깜짝 등장해 무소속들의 기를 살려줬던 김창숙은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1962년 5월 11일 자 <동아일보> '김창숙 옹 별세'는 "신병으로 서울 시내 메디칼 센터에 입원 중이던 심산 김창숙 옹은 10일 저녁 9시 25분쯤 동 병원 제15병동 10호실에서 폐질환 및 동맥경화증으로 별세하였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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