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26 12:58최종 업데이트 21.11.26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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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의 주역 홍범도 장군이 8월 15일 광복절에 귀향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방현석 소설가의 '홍범도 실명소설 <저격>'을 주 2회(화요일, 금요일)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4

백무아는 올해도 거짓말처럼 내 앞에 나타났다. 작년보다는 하루, 재작년보다는 이틀 이른 동짓달 보름날 그녀가 왔다. 내가 외발틀을 잡은 열두 명의 고공들과 초지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는 공장으로 그녀가 들이닥칠 줄은 몰랐다.


언진산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를 따라 ㄱ자로 지어진 초지공장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 무지공장에서 인수해온 스물한 관의 닥은 어제 저녁에 닥죽으로 만들어 초지통마다 분배해두었다. 햇닥의 밀도가 높아 두 배의 닥풀과 네 배의 물을 붓고 배합했는데도 닥죽은 찰기가 감돌았다. 초지를 시작하기 위해 윤여리 나뭇잎 즙 반 관을 열두 개의 초지통에 골고루 배급했다. 고공들은 즙이 닥죽에 고루 섞이도록 초지통을 휘저었다. 초지공장은 어느새 맵고 알싸한 생강냄새로 가득했다. 종이의 부패를 막아주는 윤여리 나뭇잎의 향은 생강과 아주 흡사했다. 백지는 흰 백(白)자 백지(白紙)가 아니라 일 백(百)자 백지(百紙)였다. 고공들의 손길이 백 번을 거쳐야 만들어지는 종이가 백지였다. 닥나무의 벌목에 닥무지까지 마흔두 번, 닥죽의 고해에서부터 초지까지 서른일곱 번, 건조에서 도침까지 스물한 번의 손길을 거쳐서 탄생하는 것이 새하얀 백지였다.

"가자 가자~"
내가 소리치자, 첨벙첨범, 열두 개의 외발틀이 초지통으로 뛰어들며 물질을 시작했다. 고공들의 장단이 아귀를 물고 낭창낭창 이어졌다.

"앞물 떠서~"
1,3,5,7..., 홀수 발틀을 잡은 고공들이 선소리를 하면 2,4,6,8..., 짝수 발틀을 잡은 고공들이 뒷소리를 메겼다.

"뒤로 치고~"
천정에서 드리운 외줄에 매달린 열두 개의 외발틀이 일제히 초지통 안의 닥물을 앞으로 떠서 뒤로 넘겼다.

"왼물 떠서~"
이어지는 홀수 발틀 고공들의 선소리를 짝수 발틀 고공들이 받아냈다.

"오른 물로~"
첨벙,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초지통 안의 닥물을 파고 들어간 발틀이 비스듬히 올라오며 떠올린 닥물을 오른쪽으로 흘려넘겼다.

"오른 물은~"
"왼편으로~"

이번에는 고공들이 반대 방향으로 물질을 했다. 전후, 좌우, 우좌. 이렇게 세 번 소리를 주고받으면서 한 회 물질이 끝났다. 책을 매는 서필용 백지는 3회의 물질을 하고, 그림을 그리는 서화용 백지는 4회에서 5회의 물질을 했다. 오늘 작업은 서필용 백지다.

전후, 좌우와 우좌로 이어지는 물질에 따라 가로와 세로로 엇갈리게 결합한 닥살은 대나무 발 틈으로 물이 빠져나가면서 밀도 높고 질긴 백지의 형태를 갖췄다. 물질을 한 방향에 따라 실낱보다 가는 닥나무 피륙의 결이 정해졌고, 그 방향이 백지의 상하좌우가 되었다.

"두 번 앞물~"
"두 번 넘겨~"
두 번째 물질은 이렇게 숫자를 넣어 횟수를 헤아렸지만 마지막 물질의 회수는 달리 메겼다. 마지막은 장단도 초지공이 메기지 않았다.

"서필 좋다~"
"백지 좋지~"

마지막 물질의 장단은 건조공의 몫이었다. 초지공이 두 번 물질을 하는 동안 발틀에서 떼어낸 백지를 건조대에 고르게 펼친 열두 명의 건조공이 마지막 물질의 장단을 넣으며 다음 백지를 발틀에서 떼어낼 준비를 했다. 열두 명의 초지공과 열두 명의 건조공이 메기는 소리가 오늘은 척척 맞아 들어갔다.

초지통 안의 닥물은 점점 줄어들고 건조대 위의 서필용 백지는 차곡차곡 쌓여갔다. 장단을 좀 더 빨리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작업속도를 다잡으려면 반장인 내가 끼어들어 장단을 끌어당겨야 했다. 오늘 우리 외발틀반에 내려온 생산량이 9792장이었다.

이미 해가 짧아진 그믐달에 외발틀 하나가 816장씩 초지를 하려면 숨돌릴 틈 없이 몰아쳐야 했다. 하지만 나는 잠시나마 스물네 명의 고공들이 서로 장단을 맞춰 가며 즐겁게 일하는 흥을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종일 선 채로 백지 816장을 떠내도 고공들은 노임으로 백지 한 장 값을 받지 못했다. 그래도 자신이 초지통에서 떠 올린 나무의 피륙을 희고 미끈한 백지로 만들어내는 순간의 희열은 고공들의 차지였다.

아무리 좋은 닥나무 피륙으로 만든 닥을 무지공장에서 공급해줘도 초지공들의 물질이 서투르면 도루묵이었다. 얼핏 보면 비슷해 보여도 그날그날 다른 닥죽의 점도에 따라 발틀을 담그는 깊이와 닥물을 떠넘기는 기울기가 달랐다. 사격 자세가 비슷하다고 명중률이 같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였다. 명사수가 바람의 미묘한 속도에 반응하듯이 능숙한 초지공은 오전 닥죽과 오후 닥죽의 미묘한 차이를 알고, 물질의 깊이와 기울기를 바꿨다. 비록 품삯은 하잘것없었지만 총령의 초지공들에게는 최고의 종이, 고려지를 만들어낸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서필 좋다~"
"백지 좋지~"

나는 선소리에 끼어들어 장단을 끌어당기는 대신 고공들의 뒷소리에 추임새를 넣었다.

"좋다 좋아~"
반장의 추임새에 고공들의 선소리는 날개를 달았다.

"우리 반장~"
그렇게 선소리를 메긴 것은 5번 외발틀을 잡은 나이 든 황아바이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고공들이 뒷소리로 받았다.

"서방 가자~"
결혼하자, 처음에는 이 소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이젠 아니었다.

"날래 가자~"
빨리 가자, 내가 한술 더 뜨자 고공들이 와르르 웃음이 터뜨렸다. 백무아가 초지공장에 들어선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가긴 어딜 가네?"
"아니, 그게..."

나는 바보처럼 입을 반쯤 벌린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내가 넣은 추임새만 들은 건지 '서방 가자'는 선소리까지 들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딜 날래 가간, 날래 이리 오라."
그녀는 고공들의 눈길 따위는 아랑곳 않고 두 팔을 활짝 펼쳤다. 나는 쭈뼛거리며 그녀의 품에 안겼다. 내 어깨에도 닿지 않는 그녀의 키는 오늘도 무척 커 보였다.

백무아와 나는 장진댁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백무아는 조지소에서 대우를 받는 고객이었다. 해마다 많은 백지를 구매하는 평양 야소교회의 담당자가 백무아였다. 평양 야소교회는 한자로 된 성경을 만드는 청나라에 보낼 종이까지 총령에서 조달해갔다. 가장 얇고 질긴, 단가가 가장 비싼 최고급 백지의 값을 깎지 않고 사 가는 백무아를 상대하는 사람이 장진댁이었다. 내가 총령으로 오기 전부터 조지소를 드나든 백무아와 장진댁의 관계를 안 것은 지난해였다. 장진댁은 야소교도였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고 귀하지 아니하더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겠느냐. 마태복음 6장 26절 말씀입니다."

백무아는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나지막이 식전기도를 올렸다. 장진댁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복창했다.

"아멘."
한 손에 숟가락을 든 채 눈을 반쯤 감고 이들의 눈치를 살피며 기다리던 나는 백무아를 따라 눈을 떴다. 총령의 조지소를 경영하는 유임생은 수안군 동학의 총대였다. 총대를 수안군수에 비견되는 벼슬로 여기는 유임생은 고공들을 동학에 들도록 집요하게 강요했다. 장진댁이 야소교도인 것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유임생이 모른 체하는 이유를 나는 알지 못했다. 더욱 모를 일은 야소교회에 종이만이 아니라 책까지 공급하는 이유였다. 척양척외를 내세우며 서학에 맞서 보국안민하겠다는 종교가 동학이었다.
밥을 먹으며 백무아가 장진댁에게 물었다.

"서책은 몇 권이나 만들었습네까?"
백무아가 말한 서책은 서학의 경전이었다.

"한자로 된 서책은 백사십육 장인데 이백 권으 찍었는지비. 기렇티만 백팔십이 장으로된 우리네 언문 서책 사백 권은 아직 오침제본으 아이했음."

장진댁은 대답을 다 한 다음에야 장부를 꺼내 확인했다. 장진댁의 장부는 그녀 외에는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신비한 부호와 작대기로 채워져 있었다. 한자도 언문도 모르는 그녀는 닥의 일일 생산량과 품질, 특이사항은 물론 닥의 반출일자와 반출량도 그녀만의 문자로 기록했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지만 조지소에서 가장 정확한 장부였다.

그녀의 장부보다 더 정확한 장부가 하나 더 있긴 했다. 그녀의 머릿속이었다. 그녀는 3년 전의 반출물량과 일자도 정확히 기억할 만큼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어떻게 그 많은 숫자를 정확하게 기억하느냐는 내 물음에 장진댁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글으 모르니 외우는 수밖에 더 있간. 장진댁의 장부는 실제 용도가 없는 보존용 문서에 가까웠다. 나는 그 장부의 부호와 작대기가 실제 숫자를 기록해둔 것이 아니라 그녀의 기억에 이의를 제기하는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증빙용으로 만든 허구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기도 했다. 여기에 그렇게 적혀 있다, 장진댁이 장부에 적힌 신비한 부호를 따박따박 짚어가며 반출일자와 물량을 들이대면 그 부호를 읽을 수 없는 상대방은 속수무책이었다.

"유임생이 동학인데, 왜 서학책 만들어 주오?"
나는 백무아에게 물었다. 사장 유임생은 조지소와 함께 동학의 경전을 만드는 활판인쇄소를 은밀히 운영했다. 그 활판인쇄소에서는 동학만이 아니라 서학의 경전도 만들었다. 백무아는 싱긋 웃으며 장진댁한테 눈길을 돌렸다. 장진댁이 말했다.

"돈에는 종교가 없다는 총대의 말으 아직도 못들었음둥? 돈은 눈도 코도 없고, 신념도 신심도 없다고 했지비."

밥을 먹은 장진댁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닥나무를 벌채할 때처럼 한철 일꾼이 없는 시기에는 여자 고공들이 밥을 하고 배식과 설거지도 맡았다. 오늘 당번이 무지공장이었다.

"내래 왜 결혼을 아이 하는지 압니까?"
"..."
"저거 보라."

그녀는 50여 명의 고공들이 먹은 밥그릇을 개울가로 이고 가 설거지를 하는 무지공장의 여자 고공들을 턱으로 가리켰다. 내가 눈만 껌뻑이자 그녀가 이번에는 턱으로 양지바른 자리를 찾아 궐련을 피워 물고 있는 남자 고공들을 가리켰다.

"왜 남자들은 쉬는 시간에 여자들은 일을 합네까?"
"그거야, 밥하고 설거지는 본래 여자가 하는 일..."

나는 불이 뿜어져 나오는 그녀의 눈빛에 하마터면 입을 델 뻔 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오. 여자들은 남자들 일할 때 놀았댔습네까. 남자들하고 똑같이 일하고, 로임은 절반을 받고, 남자들 쉬는 시간에 밥하고 설거지하고, 물 이고 나르는, 이게 가당하단 말입니까? 이게 공평한 세상이라고 생각합네까."
가시 돋친 말을 연발로 쏘아댄 백무아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저렇게 살고 싶은 생각, 절대 없습니다."
백무아의 눈길이 닿는 곳에 두 딸을 양쪽에 거느린 금희네가 젖먹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그녀는 다짐하듯 덧붙였다.

"내래 애 낳는 기계로 살려고 이 지구에 오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녀의 단호한 표정 앞에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어색한 침묵이 머쓱했는지 백무아가 나를 향해 씽긋 웃었다. 나는 생각 없는 인간처럼 그녀를 따라 웃으며 슬쩍 물었다.

"그렇지 않은 남자가 있으면,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하는 남자가 있으면 혼인합니까?"
"조선에 그런 남자 없단 말입니다."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가리켰다.

"신포수와 산에서 지낼 때 내래 밥하고 설거지 다 했슴다. 나물도 잘 무친다고 칭찬 들었단 말입니다."
나는 백무아의 반응이 두려워 짐짓 농인 것처럼 그녀의 말투를 흉내내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녀가 화를 내면 빠져나갈 퇴로가 필요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가족끼리 기럴 순 없단 말입니다."
바보처럼 나는 또 과장되게 그녀를 따라 웃었다. 관계가 무엇이든 그건 상관없었다. 그녀를 잃지 않을 수만 있다면 가족이라고 해도 그만이었다. 나는 지난해보다 훨씬 더 까맣게 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돌렸다.

"요즘은 어디로 전도를 다닙니까?"
"평안도와 황해도, 아이 가는 곳이 없습니다."
"사격 실력은 좀 늘었습니까."

나는 지난해 총령에 온 그녀에게 숨겨두었던 육혈포를 건네주고, 사격술을 가르쳐주었다. 전도를 위해 겁도 없이 먼 길을 예사로 나다니는 그녀가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아직도 야소교에 대한 박해는 계속되었고, 산적과 무뢰배는 어디에서 만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단도 쓰는 솜씨는 눈부셨지만 상대가 서넛을 넘으면 소용없었다. 눈앞의 상대를 제압하는 방어용 무기로는 육혈포를 능가할 것이 없었다. 여섯 발을 한꺼번에 장전하는 육혈포 하나면 아무리 완력이 쎈 강도도 여섯 명까지는 처리가 간단했다. 상대가 열을 넘어도 셋만 단숨에 쏘아제끼면 나머지 일곱은 줄행랑을 놓기 마련이었다. 단도를 잘 쓰는 그녀는 사격감각도 뛰어났다. 총열이 짧은 육혈포는 10보 앞의 표적도 명중시키기 어려운 총기인데 그녀는 탄창 하나를 연습하고 15보 앞의 표적을 꿰뚫어서 나를 놀라게 했다.

"이걸로도 충분합니다."
그녀는 저고리의 왼쪽 소매에 감춘 단도를 보여주었다.

"총은?"
"잘 지니고 다니니까 걱정마시라요."
그녀가 슬쩍 들춰보이는 겉치마 안으로 육혈포가 보였다. 설거지한 솥과 그릇의 단도리까지 마친 장진댁이 돌아와 언문본 서책의 오침제본을 사흘 안에 끝내주기로 했다고 알려주었다. 활판인쇄소에도 야소교도가 생겼다는 장진댁의 얘기를 듣던 백무아가 갑자기 나를 쳐다보았다.

"활판인쇄소로 공장을 옮기는 게 어떻간?"
나는 손사래를 쳤다.

"이제 겨우 초지공장의 반장이 되었는데, 언제 다시 인쇄기술을 배워요?"
"기래도 인쇄술을 배워보라."
"왜요?"
"서책이 없었다면, 성경주해가 없었다면 내가 야소교를 믿었겠어. 총알 한 알보다 백 배 무서운 것이 글자 한 자고, 총 한 자루보다 천 배 무서운 것이 책 한 권이야. 총은 적을 없애지만 책은 아군을 만들어내니까. 총기는 눈앞의 악한 인간만 소멸시킬 수 있을 뿐이지만 서책은 살아있는 인간의 마음에 선을 키워낼 수는 있으니까. 총은 거짓을 강요하고 불의를 이기게 하는 동시에 거짓을 부수고 불의를 소멸시키기도 하지. 하지만 진실과 정의는 총으로 이룰 수도 소멸시킬 수도 없어. 총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 진실을 기록하고 정의를 지키는 일을 하는 게 서책이야."

그녀의 말 때문이었는지,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오후 작업을 알리는 쇠북 소리를 듣고 일어서며 나는 백무아에게 물었다.

"왜 나한테는 야소교 믿으라고 안 합니까?"
"내가 왜 그런 소릴 해? 이미 믿고 있는데."
"내가? 믿는다고 한 적 없는데."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는 내게 그녀는 오른쪽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날 믿잖아."
나는 더 대꾸하지 못하고 초지공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백무아는 나흘 뒤 총령을 떠났다.
그녀는 초지공장 앞마당에서 마지막으로 나를 안아주었다. 이 한 번의 포옹이 남긴 여운의 힘으로 내가 또 일 년을 견딘다는 것을 알 리 없는 그녀는 둘러선 여자 고공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내 동생 아무도 건드리지 마. 이미 정해둔 여자 있어"
여자 고공들뿐 아니라 남자 고공들까지 폭소를 터뜨렸다. 나는 목소리를 낮춰 그녀에게 물었다.

"내년에도 오는 거죠?"
"기럼."
덧붙이는 글 방현석은 소설가다. 소설집 <사파에서>, <세월>, <내일을 여는 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 <새벽 출정>과, 장편소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십 년간>, <당신의 왼편>이 있다. 산문집 <아름다운 저항>, <하노이에 별이 뜨다> 와, 창작방법론 <이야기를 완성하는 서사패턴 959> 등을 썼다. 신동엽문학상(1991), 오영수문학상(2003), 황순원문학상(2003) 등을 받았다.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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