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25 16:12최종 업데이트 21.11.26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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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전두환 빈소 23일 서울 마포구 세브란스병원 신촌장례식장에 마련된 전두환씨 빈소. ⓒ 연합뉴스

 
퇴임 9개월 뒤인 1988년 11월 23일 국민의 분노를 피해 설악산 백담사에 은둔했던 전두환이 정확히 33년 뒤인 지난 23일 연희동 자택에서 만 90세 나이로 쓰러졌다. 그의 정치적 궤적은 흔히 1979년 10월 26일로부터 서술되지만, 그가 역사에 끼친 해악은 그 이전과 이어진다. 그 정치적 행적은 박정희는 물론이고 이승만과도 닿는다.

박정희는 1960년 4·19 혁명을 짓밟고 일어섰다. 4·19는 동학혁명으로 대표되는 구한말 개혁운동과 3·1 운동으로 대표되는 항일운동을 계승했다. 박정희의 1961년 5·16 쿠데타는 이런 흐름을 짓밟고 역사를 반동(反動)시켰다. 역사의 시곗바늘을 회귀시키는 이 같은 반동은 이승만에 의해서도 일어났다. 그는 항일운동 흐름이 한반도 전역에 걸친 자주독립국가 건설로 이어지는 것을 차단했다. 그 이승만을 4·19가 무너트렸지만, 뒤이어 박정희가 4·19를 무너트림으로써 이승만 시대는 상당 부분 되살아났다.


백담사 은둔 33주년에 쓰러진 전두환 역시 이승만·박정희의 계승자라 할 수 있다. 그 역시 한국 현대사를 과거로 회귀시켜 박정희 시대를 상당 부분 되살리고 이를 통해 이승만 시대 역시 되살려놓았다. 이들의 시대에 경제·정치적 이익을 얻은 세력은 전두환을 지지했다. 그런 세력을 자신의 기반으로 만들어놓았다는 점에서도, 전두환은 그 둘의 계승자다.

계승자

박정희의 최후는 엄밀히 말하면 김재규에 의한 10·26보다는 국민에 의한 10·16에 의해 더 많이 좌우됐다. 유신체제에 맞서 마산과 부산을 중심으로 일어난 부마민주항쟁(부마항쟁)이 박정희 체제를 위협하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마음까지 흔들어놓았다. 박정희를 쏜 뒤인 1980년 1월 28일 작성한 '항소이유 보충서'에서 김재규는 "부마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 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다며 "순수한 일반 시민에 의한 민중봉기"로 높이 평가했다. 10·26이 10·16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전두환이 거스른 것 역시 10·26과 더불어 10·16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 두 사건이 추동하는 새로운 흐름을 전두환은 12·12 쿠데타로 일단 막아냈다. 하지만 그 직후 일어난 1980년 '서울의 봄'은 그 흐름이 12·12로 차단될 수 있는 게 아님을 증명했다. 그래서 전두환은 1980년 봄의 민주화운동에 대해 5·17이라는 또 하나의 쿠데타로 대응해야 했다.

그러나 12·12는 물론이고 5·17로도 역부족이었다. 5월 18일 광주에서 폭발한 대규모 항쟁은 두 차례 쿠데타로도 막기 힘든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반영했다. 전두환이 앞선 쿠데타 두 건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대규모 학살을 자행한 것은, 그런 거대한 흐름을 저지하기 위한 발악이었다.
 

전두환 심판 국민행동본부가 23일 오후 6시경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정문 앞에서 전두환씨를 규탄하는 회견을 열었다. ⓒ 손가영


두 차례 쿠데타와 한 차례 학살 끝에 전두환은 역사를 과거로 되돌려놓는 데 간신히 성공했다. 10·16과 10·26에 의해 붕괴될 뻔했던 구체제를 가까스로 수습한 것이다. 이를 통해 박정희의 유산 중 상당 부분이 훼손되지 않고 전두환 체제로 승계됐다. 죽은 박정희가 되살아난 것이다.

그 같은 역사의 반동으로 한국 현대사는 최소 13년 이상 퇴보했다. 헌법 제1조에 따라 국민의 공화국이 구현되기는커녕 헌법 1조를 짓뭉개는 '전두환의 공화국'이 세워졌다. 전두환의 나라는 1988년까지 이어지다가 노태우의 나라로 모습을 바꿔 1993년 2월까지 계속됐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박정희·전두환과 궤를 달리하지 않는 이명박·박근혜가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전두환의 정치적 유산과 무관하지 않다. 전두환 때문에 후퇴한 역사가 얼마나 되는지 세어보려면, 손가락 열 개를 몇 번 접었다 폈다 해야 할 정도다.

샤이 전두환 지지자들

이전 독재자들을 전두환이 계승하고, 그런 전두환을 제대로 단죄하지 못해 그 아류들까지 계속 출현한 것은 친(親) 전두환 세력이 여전히 적지 않음을 보여준다. 세상 분위기를 감안해 외형상 침묵은 지키지만, 비슷한 부류들의 힘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그가 퇴임 후 33년간 끝끝내 사과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5·18 뒤에 전두환은 광주를 꺼렸다. 망월동 5·18 묘역 땅바닥에 '전두환 대통령 각하 내외분 민박 마을'이란 비석이 박힌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전두환은 학살 2년 뒤인 1982년 3월 10일 광주 바로 옆 담양군 고서면 성산마을까지만 가고 광주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6일 전인 3월 4일 김대중을 포함한 2863명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지만, 그것은 전두환의 불안감을 씻어줄 수 없었다.

재임 중에 광주를 꺼려한 인물이, 퇴임 뒤 33년간 5·18로 인해 욕을 먹으면서도 끝끝내 버텼다. 대통령을 지낸 기간보다 훨씬 긴 33년을 그렇게 살면서도 마지막까지 버틴 것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전두환이 정치는 잘하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숨은 전두환 지지자'들이 바로 그 믿는 구석이다. 국민의힘의 전신인 자유한국당의 김진태·이종명·김순례 의원이 5·18 망언을 한 사례에서도 나타나듯이, 5월 광주 시민들의 의거를 왜곡하거나 북한군 투입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보수 정치권에 남아 있다는 점은 '샤이 전두환 지지자들'의 존재를 반영한다. 전두환을 미화하는 발언을 하고도 한참 후에야 밀린 듯한 사과를 하고, 전두환 사망 소식이 들리자 "가야 하지 않겠나"라고 답했다가 3시간 뒤 캠프 공보실을 통해 발언을 취소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에게서도 그런 세력의 존재가 느껴진다.

윤석열보다 더한 이들도 적지 않다. 국민의힘에서 김기현 원내대표를 비롯해 이재오 상임고문, 윤상현·주호영 의원, 김진태 전 의원 등이 빈소를 찾았다. 검찰 소환을 거부하고 고향을 찾아간 전두환이 1995년 12월 3일 새벽에 잠옷 바람으로 체포된 곳인 경남 합천군의 문준희 군수도 지역 내에 설치된 분향소를 찾았다. 
 

주옥순 엄마부대 대표와 20여 명 관계자들이 장례식장 앞에서 전두환씨의 업적을 찬양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 신나리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차려진 빈소에는 조원진 대표를 비롯한 우리공화당 당원들이 대거 방문했다. 24일 이곳을 방문한 극우 성향의 조문객들은 "윤석열은 오지도 않고 뭐하는 X이야!"라며 소동을 피우기도 했다. 

극우 성향의 온라인 커뮤니티인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에도 24일 저녁 6시 현재 수백 개의 추모 글이 달렸다. 그중 하나는 "각하,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라며 "언젠가는 당신께서 당하신 온갖 음해와 선동이 거짓으로 밝혀질 것이고 당신께서 세우신 크신 공이 올바르게 평가되며 훗날 역사가 당신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평가할 것이라고 믿습니다"라는 글이다. 

그들이 샤이를 벗어던진다면

전두환 계승자들이 적지 않다는 점은 이승만·박정희를 노골적으로 찬미하는 세력이 있다는 사실과 같은 말이다. 두 독재자의 나라는 전두환의 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을 찬미하는 사람들은 전두환 체제에 대해서도 우호적일 수밖에 없다. 이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의 망령이 언제든 되살아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다시 힘을 갖게 되면, 우리 역사가 또다시 퇴보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 국민들이 전두환 종결자가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눈앞에는 포스트 코로나라는 새로운 상황이 열리고 있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시대정신이 당연히 필요하다. 이런 시대에 이승만·박정희의 망령이 되살아나서도 안 되고 전두환의 망령이 되살아나서도 안 된다. 전두환의 망령이 되살아나지 못하도록, 친 전두환 세력이 힘을 갖지  못하도록, 우리 국민 모두가 전두환 종결자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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