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23 15:03최종 업데이트 21.11.23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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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의 주역 홍범도 장군이 8월 15일 광복절에 귀향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방현석 소설가의 '홍범도 실명소설 <저격>'을 주 2회(화요일, 금요일) 연재합니다.[편집자말]

   

 
3

나는 지게를 진 초지반 고공 둘을 데리고 무지공장으로 건너갔다. 내일 초지작업을 할 닥을 인수해 오늘 오후에 닥죽으로 만들어두어야 했다.


무지공장의 드넓은 마당은 닥나무의 하얀 내피로 빽빽했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긴 줄을 따라 촘촘히 내걸린 닥나무 속살은 한낮의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마침 불어온 초겨울 바람에 희디흰 닥나무 내피는 물결치듯 흔들리며 햇빛을 반사했다.

닥무지반의 고공들이 야외 가마에서 반나절 동안 찐 닥나무를 지게에 지고 무지공장으로 달려갔다. 백피반의 여자 고공들은 닥나무의 겉껍질을 벗긴 하얀 피륙을 머리에 이고 무지공장에서 뛰어나왔다. 마당 끝에서부터 줄을 따라가며 마른 피륙을 분주하게 거두는 것은 고해반의 고공들이었다. 잘 마른 피륙을 거두어 두드리고 씻으며 잡티를 제거하는 게 고해반의 일이었다.

조선 팔도에서 생산되는 종이의 품질을 절반 이상 좌우하는 것은 그 조지소 고해반의 솜씨였다. 고해반에서 만들어낸 닥의 질감이 떨어지면 백지의 밀도가 떨어지고 윤기도 나지 않았다. 겉껍질이나 잡티를 제대로 걸러내지 못하면 백지가 누렇고 거무튀튀한 황지가 되고 말았다. 총령 조지소의 백지가 조선 최고로 꼽히는 것은 고해반장의 능력이 절대적이었다. 물론 총령의 늘씬한 닥나무를 길러내는 비와 바람, 뽀얀 닥을 만들어내는 맞춤한 일교차, 윤기 흐르는 백지를 완성시키는 햇살과 달빛은 사람의 영역이 아니었다.

고해반의 일머리를 잡아가던 장진댁이 우리를 발견하고 하얀 피륙의 물결을 헤치고 나왔다. 닥나무를 닥으로 만드는 무지공장의 최종공정을 담당하는 고해반이 닥의 반출 업무도 맡았다. 장진댁은 고해반장이었고, 조지소에서 여자 고공 중에서 유일한 반장이기도 했다.

"몇 관이나 필요하지비?"
"스물일곱 관 주십시오."
"무시기 그리 많슴둥?"

장진댁은 한 관짜리 추에 맞춰 닥의 무게를 저울로 달았다. 저울의 눈금에 가 있어야 할 내 눈길이 자꾸 닥나무 피륙이 넘실거리는 마당 너머로 향했다.

"내 말이 가다 넘어졌슴메?"
한 관씩 무게를 달아 자루에 부어 넣던 장진댁이 손을 멈추고 내게 물었다.

"..."
"내래, 무시기 스물일곱 관이나 되는가, 물었지비. 기런데 내 말이 가다 넘어졌수다."

"아주마이 말이 오다가 넘어지다니, 무시기 말임까. 주문이 많슴다."
나는 장진댁의 함경도 말투를 흉내내며 얼버무렸다. 그리고는 다시 목을 빼서 닥나무 내피가 널린 마당 너머를 바라보았다.

"기러다 황새 모가지가 되갔슴."
장진댁은 이 무렵이면 내가 누구를 기다리는지 알았다.

"어련히 오지 않겠슴둥."
나는 데리고 온 고공 둘이 눈치채지 않게 장진댁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비밀을 지켜달라는 부탁이었다.

"단풍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고, 꽃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 오지비. 어째 그거이 해가 바뀐다고 거꾸로 되갔슴?"

동짓달 들어서는 첫날부터 나는 백무아를 기다렸다. 해마다 동짓달 달이 가득 찼다가 줄어들기 시작하는 열이레 무렵이 되어서야 그녀가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동짓달 초하루의 그믐달을 보며 달이 차오르기를 기다렸다. 아니, 총령의 골짜기로부터 진달래가 피어올라오는 봄부터 그녀를 기다렸다. 아니다. 나는 그녀가 총령을 다녀간 다음 날부터 다시 그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백무아가 거짓말처럼 총령에 처음 나타났던 날을 잊지 못한다. 3년 전 동짓달 열이렛날이었다. 저녁노을을 등지고 내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고도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무철이, 왜 그렇게 서 있어?"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할 때까지도 나는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누나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지?"
비상하는 독수리처럼 두 팔을 활짝 펼쳐 보이는 그녀의 품을 향해 다가가면서도 나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하루도 백무아를 잊은 날이 없었지만 그녀가 나를 찾아 오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나는 그날 밤 백무아를 데리고 총령의 범바위로 올라갔다.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범바위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는 묻지 않았다. 내가 보자기에서 대추 세 개와 밤 아홉 개, 감 하나를 꺼내 냉수 한 대접과 함께 범바위 아래 평평한 돌판에 진설을 할 때까지도 그녀는 말이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같이 절을 하자고 했다.

"녀자가 무슨 절을 하겠습니까?"
고개를 가로젓는 백무아에게 내가 농을 했다.

"내레 여자로 보입네까, 싹뚝."
나는 내 머리 꼭지를 잡고, 백무아가 내 가상투를 단칼에 날리던 순간을 흉내 내며 덧붙였다. 양반집 제사에서 종부가 아닌 여자는 절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다.

"양반도 아니면서, 우리가 왜 그 잘난 양반의 법도를 따라야 합니까."
"기래도 늬기레 제산지는 알아야 절을 하잖캈습니까?"
의아한 눈빛으로 내게 묻는 백무아에게 내가 되물었다.

"동생에게 말을 올리는 누나도 있어요?"
나를 빤히 바라보던 백무아가 고개를 까딱이고 나서, 내게 다시 물었다.

"기래? 기럼, 뉘기 제사인지 이 누나에게 말해 보라."
"누나 맞네. 그럼 우리가 같이 절할 사람이 무현 형 말고 누가 있겠어요?"
백무아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아직 꽉 찬 열이레의 달이 백무아의 갸름한 뺨을 비추었다.

"내 동생 맞네."
그녀는 겉치마 속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서 감 하나, 대추 하나, 밤 하나가 차례로 나왔다. 나는 그것을 받아 돌판 위에 함께 진설했다.

"이거이 짝순데 일 없단?"
대추는 네 개, 밤은 열 개, 곶감과 감은 하나씩이었다.

"그깟 숫자 따지는 오랑캐들 풍습은 양반이나 따르는 거지,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정성껏 구해서 있는 대로 올리면 알아서 다 드실 거예요. 없어서 못 드시지, 홀수 짝수, 가려서 안 드시겠어요?"

"그럼 밤 대추 감 곳감, 놓는 순서가 어떻게 되는지도 상관 없단?"
"차려서 바치는 것만 평생 얻어먹다 죽은 양반들이나 순서를 바꿔놓으면 못 찾아 먹고 굶지, 우리 무현형은 어디 놔둬도 다 찾아 드실 텐데 뭐가 걱정이에요."
"하긴, 그렇겠네."

백무아의 입꼬리가 그렇게 길게 늘어나는 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그녀의 짙은 눈썹이 오늘처럼 둥그스름하게 곡선을 그리고 눈빛이 부드럽게 풀리는 것을 여태 본 적이 없었다. 긴장과 경계의 끈을 풀어 놓은 그녀의 표정은 다른 사람처럼 낯설고도 살가웠다. 내가 그녀의 얼굴이라고 여겼던 표정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한시도 풀 수 없었던 긴장과 경계의 방패였다는 사실을 나는 비로소 눈치챘다. 나는 왼쪽 뺨에만 있는 그녀의 보조개를 채운 달빛을 쫓아 밤하늘을 거슬러 시선을 옮겼다.

호랑이의 정기가 서렸다는 범바위에서 백무현의 기제를 지내고 내려오면서 우리는 감과 곳감, 밤과 대추를 나누어 먹었다.

"제사에 왜 밤, 감과 함께 대추를 꼭 올리는지 알간?"
백무아가 내게 대추를 내밀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씨가 하나인 대추는 하나뿐인 임금을 받들고, 한 송이에 세 톨이 들어 있는 밤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삼 정승이 나기를 빈다는... 그 따위 양반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양반도 아닌 내가 왜 알아야 해요?"

어떤 해는 냉수 한 그릇만을 놓고 아버지, 어머니의 기일에 남몰래 혼자 절을 올렸다. 그저 너무 빨리 나를 단독자로 만들어 버린 두 사람을 떠올리며 그리워했을 뿐 제상에 놓인 가난한 제물의 의미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제사상을 양반들처럼 차릴 수도 없었고 정승이 될 리도 없었던 어린 나는 의식적으로 양반들의 제례법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무시하고 싶었고, 무시했다. 나 혼자 지내는 제사에 간섭할 사람도 없었다.

"아니야. 그건 양반들이 지어낸 헛소리고 정말 뜻은 그런 거 아니란 말임. 대추는 반드시 결실을 거두는 과실야. 한 번 꽃을 피우면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열매를 맺고, 한 번 열매를 맺으면 어떤 태풍에도 떨어지지 않고 견디는 게 대추야. 기래서 제사상에 대추를 올리는 기야. 한 번 꿈을 품었으면 반드시 이루고,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말라, 어떤 도전에도 굴복하지 말라, 기런 다짐으로 대추를 올린단 말임."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동짓달 열이레, 은은한 총령의 달빛이, 입술에 번지는 미소를 사려 문 그녀의 까무스름한 얼굴을 비추었다.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요? 야소교인은 부모 대신 천주를 섬긴다는데, 아니에요?"
"그거이 다 모자란 인간들이 하는 짓이란 말임. 우릴 낳아준 아바이 어마이 은혜를 기리는 것과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어버지를 영접하는 거이 무슨 상관이란 말임. 기딴 헛소리 믿지 말라."

대추를 입안에 넣은 채 머리를 긁적이는 나에게 백무아가 물었다.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동생이라고 우기던 그녀가 갑자기 '당신'을 들이댔다.

"?"
나는 입안에 남은 대추씨를 뱉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는 당신은?"
"내래 꿈이야 어버지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고, 내래 당신의 꿈을 물었단 말입니다."

나는 꿈같은 건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내 땅을 가지고, 지주의 머슴이 아닌 인간으로 사는 것이 꿈이었던 적이 있었다. 신포수처럼 양반이 없는 산에서 짐승을 쫓으며 살겠다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다. 한때 정파총과 박한초관과 같은 무관이 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그걸 꿈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다 내던져버린 것들이었다. 달아오른 내 얼굴을 환히 비추는 열이레의 밝은 달이 이 순간만은 한없이 피하고 싶었다. 달빛은 피하지 못하고 그녀의 눈길만 피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밤마다 혼자 올려다보았던 유난히 밝게 빛나는 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저 별 이름이 뭔지 알아요?"
"북극성을 으째 모르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헛똑똑이네..."
자기 이름도 몰라요? 나는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했다.

"아니면, 저 별 이름이 뭐란 말입니까?"
나는 대답 대신 그녀에게 언제 다시 올 것인지를 물었다.

"내년 오늘."
"그때까지 알아오세요."
덧붙이는 글 방현석은 소설가다. 소설집 <사파에서>, <세월>, <내일을 여는 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 <새벽 출정>과, 장편소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십 년간>, <당신의 왼편>이 있다. 산문집 <아름다운 저항>, <하노이에 별이 뜨다> 와, 창작방법론 <이야기를 완성하는 서사패턴 959> 등을 썼다. 신동엽문학상(1991), 오영수문학상(2003), 황순원문학상(2003) 등을 받았다.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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