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26 07:24최종 업데이트 21.11.26 07:24
  • 본문듣기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시험)이 전국 86개 시험지구 1,300여 시험장에서 일제히 열린 18일 오전 서울 중구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제15시험지구 제20시험장) 시험장에 입실한 수험생들에게 감독관들이 유의사항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수능 봤다는 소식이 여기저기 들린다. 입시 제도가 워낙 많이 바뀌어서 현 제도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중 귀에 박히는 말은 올해가 문·이과 통합형 첫 시험이라는 것이었다.

문·이과를 폐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배운 게 다르고 수능으로 당락이 결정될 수도 있는 시스템에서 통합 시험? 융합형 인재 육성이라는 교육 목표에 맞춰 바꾼 것이라고 했지만 시험 통합한다고 융합형 인간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시간표? 그런 거 없다

내게 영국식 교육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 특징은 통합형 교육이라 답할 것이다. 경험에 의하면 영국식 통합형 교육은 뿌연 안갯속에서 무질서함, 비효율성, 비체계성을 수년간 견뎌야 가능하다.   


내 첫 책가방은 토끼 그림이 그려진 빨간 직사각형의 각 잡힌 가방이었다. 그 안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습관적으로 뒷줄에는 공책을, 앞줄에는 교과서와 필통을 넣었다. 크기와 무게만 변할 뿐 내용물은 고등학교 졸업까지 그대로였던 전형적인 학생 가방이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내 기억을 기준으로 준비해야 할 목록을 물어보았다.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연필도 공책도 필요 없다고 하길래 유럽의 복지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교과서는? 교과서는 없다고 했다.

"가방이 필요하긴 해?" 학교에서 나눠주는 공지문을 넣어야 하고, 체육복을 빨려고 집으로 가져와야 하고,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넣어야 하니 필요하긴 하다고 했다. 학교 급식 대신 도시락을 쌀 거면 도시락 가방을 넣는 용도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학교에서 뭘 배우는 걸까. 교과서도 공책도 없는 상황에서 아이가 들고 오는 것은 1주일에 한 번씩 나오는 낱장으로 된 숙제와 한 학기(약 10주)에 한 번씩 알려주는 학기 주제(term topic)가 전부였다.

무슨 과목을 배울까. 영어, 수학, 미술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일주일에 언제, 몇 번 하는지, 그 외의 과목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아이도 몰랐다. 중앙 칠판 오른쪽이나 왼쪽에 큼지막한 시간표가 걸려 있던 내 교실을 떠올리며 시간표를 물어보았다. 아이는 그런 거 없다고 했다.  
  

자전거로 하교하는 영국의 초등학생들 ⓒ 권신영

 
시간표가 없는 게 어디 있냐고 잘 찾아보라고 몇 번이나 해도 아이는 그저 학교에 가면 그날의 하루 일과 계획이 칠판에 써져 있다고 했다. 다음 날 무엇을 할지 모른다고 했다. 한 교시가 몇 분이고 쉬는 시간이 몇 분이냐는 내 질문에 선생님이 결정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딱딱 끊어지는 체계화된 교육을 받은 내가 규격화되지 않은 교실의 질서를 이해하기는 지극히 어려웠다. 사실 이 부분은 아이 말이 사실인지 아니면 아이  특유의 둔감함으로 패턴을 알아채지 못한 건지 지금도 알쏭달쏭하다. 나는 시간표가 어떤 형태로든 있었을 것 같아 지금도 이따금씩 물어본다. 현재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기 학교 그리고 자기 때는 없었다고 아이는 여전히 확신 조로 말한다.

"엄마, 유연하게, 유연하게. 초등학교는 재미야(fun & game)."

빈 책가방은 갈수록 불안해졌다. 영국 엄마한테 정말 시간표와 과목이 없냐고 했다. 그녀 왈, 지금은 그나마 전국적인 지침이  있다며 자기 초등학교 때는 그것조차 없었다고 했다. 갑갑했지만 마음을 비우는 수밖에 없었고 덤덤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교실을 볼 수 있는 건 학기말 즈음 학교가 파하고 2시간 정도 공개하는 '열린 교실(open classroom)' 행사 때가 유일하다. '열린 교실'이 있는 날은 아이가 직접 한 학기 동안 공부한 공책을 보여줬다. 뭔가를 배우고 있기는 했다.

해적  

'뭔가를 하고 있기는 하네'라는 나의 냉소가 '어, 잠깐만'으로 바뀐 것은 학기 주제가 '해적'이었을 때다. 처음에는 그저 귀엽고 깜찍한, 초등학교에 맞는 주제라고 생각했다.

첫날,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해적 복장을 하고 오라고 했다. 누구는 두건을 둘렀고, 누구는 애꾸눈 변장을 했고, 누구는 흑백 가로 줄무늬 셔츠를 입고 왔고, 누구는 집에 굴러다니던 장난감 칼을 허리춤에 꽂고 왔다. 선생님은 해적 옷을 입고 아이들을 반겼다. 교실 문에는 해골이 그려진 해적 깃발이 걸려 있었다.

어느 날 아이는 해적 모자를 만들어 왔고, 해적에 대한 책을 읽고 간단한 작문을 했다. 어느 날은 해적선을 타고 항해를 떠났는지 5대양 6대주를 이야기했고, 어느 날은 나침반과 동서남북을 배워왔는지 뜬금없이 집의 방향을 물었다. 해적이 사용하던 화폐를 배웠는지 금화, 은화, 옛날 영국 돈 단위를 말했다. 향신료, 올리브, 소금, 초콜릿이 금은보화만큼 가치가 있었다는 말도 했다.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스틸컷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또 어느 날은 해적이 자주 걸리던 괴혈병을 말하며 비타민 C를 먹어야 한다고 내게 잔소리를 했다. 장기간 항해이기 때문에 마른 음식을 먹었고 바닷물이 짜서 먹을 수가 없기 때문에 맥주를 마신다고 내게 강의를 했다. 어느 날은 유명한 여자 해적 앤 보니(Anne Bonny)와 메리 리드(Mary Read) 이야기를 내게 했다.

영화나 동화에서나 들었던 바다의 난봉꾼 해적 이야기를 난 그 학기 내내 들었다. 해적이라는 주제어에 집중, 아이는 읽기와 글짓기, 수학, 미술은 물론이고 16세기 이후 선박의 발달, 항로의 확장, 국제 무역, 지리, 배 안에서의 식생활, 여성이라는 다양한 주제를 두드리고 있었다. 한편으로 전문화된 배움의 영역이 해적의 세계로 모였다. 새로운 방식이었고 나도 깨닫고 배우는 과정이었다.    

2차 대전

2차 대전은 4학년 봄 학기 주제였다. 아이는 2차 대전 비행기 모형 만들기를 숙제로 받아왔다. 기간은 한 달, 크기도 자유, 재료도 자유였다. 단, 2차 대전에 사용된 실제 전투기를 조사한 후 마음에 드는 모델을 골라 실제에 가깝게 만들어 오라고 했다.

아이는 인터넷으로 수십 개의 기종을 보더니 노란색과 회색의 나치 독일 메서슈미트(Messerschmitt)  Bf 109 전투기를 선택했다. 이유는 "멋져서"였다. 자체 검열하는 마음으로 연합군 비행기로 바꾸자고 설득하였으나 아이는 완강했다. 결국 나와 아이는 페트병을 가지고 독일군 전투기 형체를 만든 후 날개와 꼬리를 붙이고 그림을 그리고 색을 입힌 비행기를 만들었다.

한 달 후 숙제 제출하는 날, 오직 내 아이만이 독일 전투기를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남자아이들 반 이상은 독일 전투기를 만들어왔다. 이유는 한결같이 "멋져서"였다. 검열의 마인드가 없는 아이들의 세계는 자유로웠다.  
 

Messerschmitt-BF-109 3D 모델 ⓒ Panarist

 
숙제는 제출로써 끝. 나는 비행기를 까맣게 잊었다. 그리고 학기 말 교실을 공개할 때 나는 입을 막았다. 과도하게 크거나 무거운 비행기 두세 개를 제외하고는 아이들이 만든 '허술한' 2차 대전 전투기들이 교실 천장을 꽉 채우며 매달려 있었다. 그날의 교실은 2차 대전 전투기 다큐멘터리를 보는 이상으로 황홀했다.

자신들이 만든 전투기가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상태에서 아이들은 독일이 런던을 폭격했던 1940년의 블리츠(the Blitz, 대공습)를 배웠다. 폭격 소리와 폐허를 상상하며 영어 시간에 작문을 하고 시를 써서 발표했다. 식량 배급표로  2차 대전 당시의 일상을 체험했고, 마지막에는 2차 대전 연합군 군복과 철모를 걸치고 연극을 했다. 이런 환경에서 배운 역사는 지루할 겨를이 없을 것 같았다.

통합 교육, 영국 초등학교에 교과서가 있을 수 없는 이유다.
  
학년에 관계없이 학생을 섞어라

교과목의 통합을 넘어 학생을 섞는 것도 영국 통합 교육의 특징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그리핀도르(Griffindor), 슬리데린(Slytherin), 래번클로(Ravenclaw), 후플푸프(Hufflepuff), 해리 포터에 나오는 하우스 제도(house system)다.

전교생을 섞어 학년이 아닌 하우스로 배치하는 제도로 각 하우스에는 최저학년부터 최고학년 학생까지 같이 배치된다. 하우스별로 경쟁해 학년말에 제일 점수를 많이 딴 하우스에 상을 주는 제도다. 지극히 영국적인 제도로 외국인들에게 오해를 많이 산다.

하우스 제도를 설명하던 학교 설명회, 유럽연합(EU)에서 온 엄마가 손을 들었다. 하우스를 집으로 해석해 도대체 집에서 어떤 기준으로 아이에게 점수를 주라는 거냐며 질문했다. 잠시 숙연해졌다. 한 영국 엄마가 조용히 일어나더니 "하우스 시스템, 그 이름이 참으로 부적절하다"며 재치 있게 분위기를 무마하고 다시 설명해 주었다.

나도 다를 바 없었다. 아이 친구 엄마와 길을 걸으며 해리 포터에 착안해 하우스 제도를 도입한 건 좋은 것 같다고 의견을 밝혔다. 아이 친구 엄마는 약간은 난감하면서도 재미있다는 미소를 지으며, 하우스 시스템이 해리 포터 작가의 고유 아이디어가 아니고 영국 사립학교의 오랜 전통이라고 했다. 나는 왜 해리 포터 속 낯선 세계가 전부 작가의 상상력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초등학교 하우스 시스템은 중등학교 하우스 시스템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 가볍다. 학교는 각 교실과 학교 강당에 하우스별 상황표를 설치해 학생들이 한눈에 하우스 경쟁 상황을 볼 수 있게 했다. 하우스 점수는 학습 능력과 전혀 상관없다. 주로 행동에 관한 것이고 전체적으로 말을 잘 듣는 날이면 선생님이 기분으로 전부에게 하우스 포인트를 쏘는 경우도 있다. '체육복 빨리 갈아입기' 종목도 있다.

학년에 국한되지 않은 교내 인적 교류는 일대일 정례 활동으로 이어진다. 최고 6학년 학생들은 최저학년 학생 한 명과 '친구(buddy)'를 맺는다. 매주 한 번씩 책을 읽어주고 매주 금요일 오후는 둘이 같이 노는 시간이 있다. 최저 학년 체육 대회가 있는 날이면 6학년들이 본인들의 학습을 중단하고 심판 및 경기 진행 요원으로 나선다. 

이 같은 영국의 통합형 교육은 효율적·집중적인 학습 목표에 적합하지 않다. 한국처럼 주어진 시간 내에 빡빡하게 초집중해 문제 푸는 능력을 지닌 영국 학생은 거의 없다. 학습 능력 성취도에서 상위는 한국,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권이다. 교육 효과가 단기간에 가시적으로 나타나지도 않는다. 

사고의 유연함과 영역을 넘나드는 창의력은 대학 교육과 먼 훗날 사회생활에서 발휘된다. 그러다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하는 무서운 천재들, 가령 알파고를 만든 데미스 하사비스(Demis Hassabis)나 해리 포터를 쓴 작가 J.K. 롤링 등이 나온다. 
 

구글 딥마인드의 CEO 데미스 하사비스가 7일 오전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바둑프로그램 '알파고'는 오는 9일부터 서울에서 프로기사 이세돌 9단과 5판의 대국을 벌인다. 2016.3.7 ⓒ 연합뉴스

 
통합형 교육은 문·이과 통합으로 될 일이 아니다. 초등학교부터 이루어지는 장기간의 학교 생활 문화가 핵심이다. 교육 효과를 떠나 내가 통합형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이들이 학교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1학년이 6학년 친구를 봤을 때 수줍어하면서도 자랑스럽게 인사하고, 인사는 하지만 그게 썩 마음에 안 드는 6학년의 모습이 솔직하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10만인클럽후원하기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