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15 07:29최종 업데이트 21.11.15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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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때때로 타고난 능력이 자신의 발목을 잡기도 합니다. 남들보다 뛰어난 운동신경을 과신해 연습을 게을리하다 일찍 선수 생활을 마감하는 체육인도 적지 않고, 화려한 언변을 과도하게 흩뿌리다 망신살이 뻗쳐 조기 은퇴하는 예능인도 흔합니다.

차라리 재능이 특출나지 않았더라면 최고의 자리에 오르진 못하더라도 자신의 분야에 오래 머물며 족적을 남겼을 텐데, 오히려 해가 된 셈입니다. 그러니 어제와 별다를 바 없는 오늘일 때보다, 기막히게 술술 모든 상황이 잘 풀릴 때 더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만년필계도 예외는 아닙니다.


'로이 콘클린(Roy Conklin)'이 미국 오하이오주에 속한 항만도시 톨레도에 1898년 회사를 세운 이래 수많은 순풍과 역풍이 불었습니다. 만년필 역사가 시작되고 1800년대 후반까지, 펜에 잉크를 주입하기 위해선 별도의 충전 도구가 필요했습니다.

마치 예전 경운기 엔진을 돌리기 위해선 별도의 핸들 손잡이가 필요했던 것과 같습니다. 1990년대부터 나온 신형 경운기는 자동차처럼 열쇠를 사용해 시동을 겁니다. 요즘 출시되는 차들은 버튼을 눌러 시동을 켜는 걸 넘어, 별도의 키 없이 스마트폰만 있어도 차를 움직일 수 있으니 그야말로 격세지감입니다.

만년필계에 빼놓을 수 없는 콘클린
 

만년필계 셀프 필러 시대의 포문을 연 콘클린(Conklin) ⓒ 김덕래

   
현재는 그 위상이 많이 낮아졌지만, 콘클린은 만년필계에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을 이룬 제조사입니다. 펜에 장착된 부속만을 움직여 잉크를 흡입하는 자가충전 방식의 '크레센트 필러(Crescent filler)'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다른 만년필 제조사들의 경쟁심에 불이 붙고, 세상에 다양한 형태의 셀프 필러가 줄줄이 태어나게 됩니다.

크레센트라는 말 자체가 초승달 모양을 의미하니, 왜 필러에 이런 이름을 붙였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 브랜드인 비스콘티도 여기에 영향을 받아, 자사 모델들에 이 필러를 장착하기도 했습니다. 형상이 비슷한 것처럼 작동 방식도 같습니다.

배럴 외부 초승달 형상의 부속을 눌렀다 떼기를 몇 차례 반복하면 됩니다. 잉크를 채운 후엔, 배럴을 감싸고 있는 원형 부속을 돌려줍니다. 혹여 필기 중 의도치 않게 금속 돌출부가 손에 눌려 잉크가 쏟아지는 걸 막기 위한 안전장치인 셈입니다.
     

콘클린의 영향을 받아 크레센트 필러를 장착한, 비스콘티 문라이트 스노우 스톰 ⓒ 김덕래


출시 초반 대중들로부터 큰 호응을 이끌어냈지만, 예나 지금이나 기술은 점점 더 발전하기 마련입니다. 자동차 회사에서 신모델을 내놓으면 반짝 매출이 상승하나, 얼마 뒤 경쟁사에서 비슷한 가격대에 더 좋은 옵션이 달린 차량을 내놓게 됩니다. 그건 마치 내가 상대편 코트로 보낸 탁구공이, 네트를 넘어 다시 내 영역으로 들어온 것과 같습니다. 마땅히 그 공을 다시 건너편으로 넘겨야만 스코어가 유지됩니다.

크레센트 필러는 구조적으로 배럴에 돌출부가 있는 형태입니다. 이로 인해 저절로 구르다 추락하는 사고를 막을 순 있으나, 반대로 생각하면 필기 시 걸리적거릴 수 있다는 뜻도 됩니다. 때때로 확실한 장점이라 믿었던 것이, 난데없는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후발주자들은 이 부분을 충분히 고려해 충전을 위한 부속이 제 역할을 수행한 후엔 배럴 면에 밀착되게끔 하거나, 아예 펜의 맨 뒷부분에 장착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관객들 뇌리에 내내 남을 만큼 기가 센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일수록, 대중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후속작을 제때 만나지 못하면, 영영 잊히기도 쉽습니다. 최선의 선택을 한다는 명목으로 마냥 시간을 늦추는 것보다, 다소 미숙해도 적절한 시기에 한발 더 내디딛는 게 중요합니다.

레버 필러와 피스톤 필러를 순차적으로 채용해 신모델을 만들고, 어떤 브랜드보다 더 강력한 사용자 관점의 서비스 정책을 펼쳤으나, 이미 타이밍을 놓친 후입니다. 워터맨과 파카를 필두로 한 경쟁사들의 기세는 점점 등등해져 가고, 한때 영화롭던 콘클린의 앞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맙니다.

주류에서 밀려난 콘클린은 점점 쇠약해지다 결국 1948년 완전히 생산을 접게 됩니다. 그렇게 영영 역사 속에 매몰될 줄로만 알았는데, 필기구 브랜드 몬테베르데를 거느린 'Yafa' 그룹에 의해 60년이 넘는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2009년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펜은 1920년대 초반 콘클린이 만든 오리지널 '듀라그라프(Duragraph)'를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모델입니다. 그새 90년 넘는 세월이 흘렀으니, 원래의 맛과 멋이 온전하길 기대하는 건 무리일지도요. 만년필의 황금기로 불리는 1920년대. 경쟁업체들이 불꽃 튀는 공방을 주고받던 그 시절. 어쩌다 보니 주류에서 밀려났다가 조용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콘클린. 한때 만년필계 이름을 떨치던 브랜드의 정취를 느껴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의미는 충분합니다.
 

다시 태어난 콘클린 듀라그라프 ⓒ 김덕래

 
펜촉 상판 한가운데 위치한 벤트홀의 형상은, 브랜드에 따라 각양각색입니다. 같은 브랜드더라도 모델에 따라 그 형태가 다른 경우도 많습니다. 제조사에 따라 하트형, 원형, 세모꼴형 등등 다양할 뿐더러 아예 삭제된 경우도 있으니, 기술력이 상향 평준화된 요즘의 벤트홀은 기능성보다는 미적 표현 수단, 또는 브랜드 정체성을 나타내는 소통 창구에 가깝다 보는 게 맞겠지요. 듀라그라프의 벤트홀은 콘클린의 상징이기도 한 크레센트 필러의 형상과 유사하고, 또 브랜드의 이니셜인 'C'와도 닮은 꼴입니다. 콘클린에게 있어 초승달 문양은 버릴 수 없는 자존심일지도요. 
 

콘클린 듀라그라프 펜촉 상판 ⓒ 김덕래

 
펜촉이 틀어지는 이유는 여럿입니다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역시나 사용자의 과한 필압입니다. 마치 자동차를 운전할 때 과속주행, 급핸들 조작을 반복하다 보면 타이어가 고르지 않게, 또 평균치보다 빨리 마모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저 바람이 가을 들녘 벼 끝을 스치고 지나가듯,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가볍게 펜을 쥐고 써도 좋습니다. 살짝 넘친 2%의 그 손힘이 펜촉을 틀어지게 만듭니다. 

가장 성가신 필기구지만
 

5. 좌 - 손보기 전 틀어진 펜촉 우 - 매만져 손본 후의 펜촉 ⓒ 김덕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집필한 일본의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Natsume Soseki)는 영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접하게 된 오노토 만년필을 즐겨 썼다고 합니다. <톰 소여의 모험>으로 국내에서도 친숙한 미국 현대문학의 아버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콘클린의 모델로도 활동한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즘은 디지털 디바이스와 연결된 키보드를 타이핑하는 것으로 글을 쓰는 작가들도 많지만, 여전히 손글씨를 고수하는 아날로그 애호가들도 존재합니다. 아무리 지금보다 더 발전된 세상이 오더라도, 여전히 손에 잉크 묻혀가며 종이 위 사각거리는 만년필만의 그 필감을 애정하는 이들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키보드를 누를 땐 손가락 끝부분만 사용하지만, 펜을 손에 쥐고 글을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손바닥으로 쥐거나 매만지게 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펜과의 친밀감이 생깁니다. 물론 사람의 손과 손이 맞닿는 것만 하겠습니까? 어디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산 생명체를 쓰다듬는 것만 하겠어요?

하지만 회사 동료나 친구는 고사하고, 가족끼리도 손맞잡기를 주저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펜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정서적 교감이 이루어집니다. 손끝을 포함한 손바닥 전체의 감각세포가 만년필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되고, 그러는 새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습니다.

만년필을 찾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성가신 필기구이기 때문입니다. 예민하고 까다로워 꾸준히 관리를 해주지 않으면 애물단지가 되곤 합니다. 분명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지 않았는데도 내 맘같이 안 나올 때가 있습니다. 만년필을 제외한 어떤 필기구도 이처럼 손이 가진 않습니다.

갈수록 첨단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여전히 아날로그 필기구의 상징인 만년필이 존재하는 이유는, 앞으로도 내내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짧아 더 애틋한 계절, 가을입니다. 아무 펜이라도 손에 쥐고 몇 줄 낙서라도 해보세요. 그걸로도 좋습니다. 그저 이 일상의 헛헛함을 잠시라도 보듬어줄 수 있다면요.
 

콘클린 듀라그라프 크랙 아이스 M촉 시필 테스트 ⓒ 김덕래

 
* 콘클린(Conklin)
- 1898년 로이 콘클린(Roy Conklin)이 미국 오하이오주 톨레도에 설립. 만년필 역사에 남을 크레센트 필러를 개발함. 세계 최초의, 실제 상용화된 자체 충전식 만년필을 전면에 내세우고 한때 시장을 주도했으나, 경쟁사들의 막강한 화력에 밀려 1948년 생산 중단을 선언. 2009년 Yafa그룹이 인수해 다시 살려내 현재에 이르름. 부단히 정진해 예전의 명성을 회복하길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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